홍콩은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로 불린다. 비즈니스를 위해 관광을 위해 또는 쇼핑을 위해 저마다의 목적으로 홍콩을 방문한 사람들은 각자의 눈에 비친 홍콩의 얼굴을 보고 돌아온다.
필자는 포럼개최를 위해 홍콩을 찾아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공무원들과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아시아 금융 허브로서 홍콩의 얼굴을 비교적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를 가졌다. ‘왜 홍콩은 번영하는가’라는 물음을 다양한 사람들에게 던져 나름대로 얻은 답변은 바로 ‘오픈마인드(Open Mind)’였다.
홍콩은 한국과의 교역에서 수출 310억달러, 수입 23억달러로 한국의 네 번째 수출시장이자 두 번째 무역 흑자지역이다. 그만큼 중요한 상대인 홍콩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첫 번째 문제는 홍콩의 금융산업 규모에 대해서다. 국내에서 영업 중인 증권사는 모두 62개다. 홍콩의 증권회사는 대략 몇 개나 될까. (1) 1000~1500여개 사이 (2) 1500~2000개 사이 (3) 2000개 이상.
두 번째는 홍콩의 관광산업에 대한 문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해외 관광객 1000만명 시대를 맞았다. 홍콩 인구는 700만명, 면적은 서울의 1.8배에 불과하다. 지난해 홍콩을 찾은 해외 관광객은 얼마나 될까. (1) 3000만~3500만여명 (2) 3500만~4000만명 사이 (3) 4000만명 이상.
마지막은 홍콩의 부동산 시세에 대해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파트값이 비싼 대치동 은마아파트 115㎡(35평)형이 8억원대다. 홍콩 중심지에서 같은 면적 아파트 가격은 어느 정도일까. (1) 10억원대 (2) 20억원대 (3) 30억원대.
‘나이론콩’ 세계3대 금융허브
첫 번째 문제의 답을 말하기 전에 홍콩의 금융산업을 조감해 보자. 홍콩은 뉴욕, 런던과 합쳐서 ‘나이론콩(Nylonkong)’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세계 3대 금융허브 중 하나다. 중국 광둥성 아래 작은 섬인 홍콩은 잘 알려진 대로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이후 1842년 난징조약으로 영국의 조차지가 됐다. 별 볼일 없는 중국의 변방이던 홍콩이 세계가 주목하는 금융제국으로 우뚝 서기까지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인물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덩샤오핑이다.
1970년대까지 홍콩은 한국과 대만, 태국 등 동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자금조달 시장 기능을 맡아왔다. 1979년 덩샤오핑이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홍콩과 지근거리인 광둥성 선전을 특구로 지정한 것이 홍콩이 글로벌 금융시장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홍콩은 이 선전특구에 진출하는 외국기업들을 위해 자금을 지원하고 법률 회계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중국 진출의 전초기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홍콩 정부는 이 기회를 극대화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선전특구 지정 즈음해 1978년 3월 외국계 은행들의 은행업 인가 제한을 없애 요건에만 맞으면 외국자본이 은행을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미국달러 연계환율제를 도입해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환리스크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해줬다. 1977년 74개이던 홍콩의 은행 수가 1984년 140개, 1995년에는 185개로 급증했고 예금은 22조 홍콩달러로 선전특구 지정 이전보다 400배 이상 폭증했다. 홍콩은 전통적으로 뉴욕, 런던에 비해 상대적으로 은행업이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중국계 대기업이 홍콩 증시에 상장하면서 증권산업의 비중도 날로 높아져 현재 홍콩에는 은행이 193개, 증권회사는 1731개에 달한다.
덩샤오핑이 내린 혜택은 이 뿐이 아니다. 1984년 영국 대처 수상과 협약을 맺어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환원되더라도 2047년까지 50년 동안 홍콩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고 모든 분야의 자치권을 갖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같은 중국이지만 사회주의 체제인 본토와 달리 영국이 심어놓은 자본주의 체제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중국 귀속이 다가오자 과연 그 약속이 지켜질까라는 의구심이 높아졌다. 홍콩이 그동안 누려온 자유경제체제가 무너질 것으로 우려한 외국 금융기관들이 1990년대 초부터 매년 4만~5만명씩 다른 지역으로 빠져 나갔다. 특히 홍콩 금융회사들이 많이 건너간 캐나다 밴쿠버는 ‘홍쿠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유명한 홍콩배우 장국영과 유덕화, 왕조현이 이제 인민복을 입고 나타날 거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홍콩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중국정부가 일국양제를 확고히 지키는 것이 확인되면서 불식됐고 홍콩에는 다시 외국계 금융기관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홍콩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덩샤오핑은 중국 영토로 환원된 홍콩 땅을 살아생전에 밟아 보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1997년 중국 환원을 5개월 앞두고 97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홍콩금융제국을 건설한 또 한 사람의 영웅은 HKMA(홍콩금융관리국)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재인 조셉 얌 치쾅(Joseph Yam Chi Kwong)이다. 1993년 HKMA 설립과 함께 총재로 취임해 2009년 물러날 때까지 16년간 홍콩 금융산업의 비약적 발전과 위기관리를 주도하면서 홍콩제일능리(香港弟一能吏·홍콩에서 제일 유능한 관리)라는 칭송을 받았다.
외국금융회사 자유 최대한 보장
홍콩대학 경제학과 출신으로 네덜란드 헤이그 대학에서 유학한 그는 세계 중앙은행총재 중 가장 가방 끈이 짧고(학사 출신),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두 가지 기록으로도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의 연봉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연봉의 7배, 유럽중앙은행과 일본중앙은행총재의 3배에 달했다. 그의 최대 치적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조지 소로스를 위시한 핫머니 세력에 맞서 홍콩의 금융시장을 지켜낸 것이다. 1998년 8월 소로스 세력은 외환공격을 통해 홍콩 주식시장을 폭락시킨다는 계획아래 대량의 공매도 계약을 체결했다. 얌 전 총재는 이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홍콩의 외환보유고를 총동원해 홍콩주식시장 시가총액의 5%에 해당하는 주식을 사들였다. 헤지펀드들의 디데이였던 8월 28일 항셍지수는 7830포인트로 마감됐다. 결국 자신들이 공매도를 위해 빌린 값보다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사서 갚게 된 헤지펀드들은 큰 손실만 입고 홍콩시장에서 퇴각했다.
소로스가 한국과 태국에서 번 돈을 홍콩에 반납하고 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홍콩정부의 강력하고 단호한 조치는 자유방임주의 정부라고만 여겼던 헤지펀드들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당시 얌 총재의 주식시장 개입은 세계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 대상이 됐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홍콩정부가 정신이 나갔다”고 비판했다. 미국 FRB 의장 앨런 그린스펀도 당시 국회증언에서 “얌 총재의 시장 개입은 상당히 모험적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후 홍콩 금융시장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정부가 매입한 주식이 모두 상승하자 “얌의 선택은 정확한 것이었으며 내가 괜한 우려를 했었다”고 토로했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홍콩시장을 덮치면서 뱅크런 우려가 높아지자 얌 총재와 HKMA는 당시 10만 홍콩달러 한도이던 홍콩 내 모든 금융기관의 고객예금을 무제한 보장하고 필요시 은행에 외환보유고를 통한 긴급 자본금을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리먼 파산 이후 불과 한 달 만에 신속 과감한 선제조치를 단행하자 홍콩시장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금융시장은 안정을 되찾고 금융기관의 건전성도 유지할 수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주홍콩 총영사관 재경관을 지낸 최광해 기획재정부 장기전략국장은 “홍콩은 외국금융회사들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홍콩을 국제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홍콩 정부는 기회만 있으면 ‘시장이 주도하고 정부는 따라간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그러나 조셉 얌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한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홍콩정부는 위기상황에서는 신속하고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시장 참가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단호하게 대응함으로써 시장 참가자들의 신뢰를 얻고 시장 질서를 정상화시킨 홍콩의 사례는 정부가 할일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고 말했다.
관광의 천국
홍콩은 국제비즈니스의 천국이자 관광의 천국이기도 하다. 필자가 포럼을 준비하면서 홍콩의 HKMA와 주홍콩총영사관, 대우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금융회사들을 찾아 돌아다니던 기간은 한여름이었다. 태풍이 오락가락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그러나 센트럴 지역을 카메라와 수첩만 든 채 우산도 없이 돌아다녀도 아무 불편함이 없었다. 센트럴지역 내 주요 건물이 모두 지하보도나 건물사이를 잇는 육교로 연결된 덕분이다.
김영근 한국투자증권 홍콩법인장은 대학 졸업 후 홍콩으로 건너와 줄곧 홍콩 증권시장에서 활동해 온 홍콩 토박이에 속한다. 김 법인장은 “센트럴 지역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자댕하우스를 중심으로 반경 2km가 말 그대로가 청춘을 바친 무대다. 다른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홍콩의 매력은 비즈니스 중심지 센트럴이 첵랍콕 국제공항에서 익스프레스 트레인으로 25분이면 연결되는데다 지역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센트럴 외곽 비즈니스 지역도 택시로 5~10분이면 이동이 가능해 짧은 시간 집중적인 미팅과 회의를 열기에 홍콩보다 더 좋은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지하철의 환승구조도 서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서울의 지하철은 1, 3, 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5가역에서 3호선을 5호선으로 환승하려면 미로같이 복잡한 역내를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번갈아 탄 후 한참을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홍콩 지하철은 환승 열차가 같은 플랫폼 내 반대방향으로 들어오도록 설계돼 바로 환승이 가능하다. 도시 전체가 마치 거대한 인공지능에 의해 설계되고 움직여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홍콩에서 공식 통용되는 언어는 3가지다. 영어와 중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사용되는 표준어인 보통화, 우리로 치면 남도 사투리쯤인 광둥어다. 그러나 광둥어는 중국어라고는 해도 보통화와는 영어와 불어만큼이나 차이가 커서 통역 없이 알아들을 수 없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는 항상 3가지 언어가 같은 내용으로 표기돼 있고, 안내방송도 같은 내용으로 나온다. 중국 본토 관광객들이나 영어권 국가의 관광객들 누구나 어디를 가든 불편 없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다.
홍콩은 영토 자체도 서울의 1.8배에 불과하지만 260개의 섬을 제외하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면적은 여의도 10배 크기가 전부다. 이 좁은 면적에 세계 대부분의 금융회사와 주요 기업들 사무실이 밀집돼 있고 사이사이에 아파트도 지어야 하다 보니 숨이 턱 막히는 고층빌딩의 숲이 될 수밖에 없다.
작년 홍콩 찾은 중국인 23% 늘어
홍콩에서 가장 높은 카오룽(九龍) 반도의 118층짜리 ICC 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바라보는 홍콩의 야경은 분명 아름답지만 그것을 빼면 절경이라고 할 만한 볼거리도 거의 없다. 그런 홍콩이 해외 유치 관광객 수가 우리나라 전체의 4배를 넘는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지난해 우리는 한국을 찾은 해외관광객이 1000만명을 돌파하면서 관광산업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떠들썩했다.
중국의 언론포털 중국망은 지난해 12월 22일자 보도에서 홍콩의 방문 관광객 수가 4000만명을 넘어섰다고 전했다. 중국망은 “미국 시카고의 낸시 라이언이 4000만 번째 입국 관광객으로 카운트돼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의 왕복 비행기 티켓과 디즈니랜드 입장권 등 17만 홍콩달러의 선물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홍콩의 관광객 중 상당수는 비즈니스를 겸해서 방문하는 것이어서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2900만명 정도를 순수한 관광객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어찌됐든 우리나라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홍콩의 관광산업 발전은 중국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내륙 관광객들이 쇄도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지난해 홍콩을 찾은 중국 내륙 관광객은 2500만여명으로 전년대비 23.8%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중국 관광객은 300여만명이었다. 홍콩의 중국 관광객들은 1인당 평균 8000홍콩달러(우리돈 110만원 선)를 쓰고 가 미국을 제치고 최대 소비를 기록했다.
중국 관광객들이 별로 볼거리도 없는 홍콩에 이토록 몰려드는 것은 관광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쇼핑이고 두 번째는 주식투자, 세 번째는 식도락이다. 홍콩은 식도락가에겐 천국이다. 광저우, 쓰촨, 상하이, 베이징 등 중국 4대 요리를 입맛에 따라 어디서나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과 비즈니스맨들이 몰려드는 홍콩 센트럴 지역의 식당가는 주말이건 평일이건, 점심이건 저녁이건 넘쳐나는 손님들로 어딜 가나 발 디딜 틈이 없다. 비즈니스맨들은 대개 손님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서 오전 11시부터 12시 사이 또는 오후 1시부터 2시 사이에 식사를 하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다.
홍콩의 관광산업은 ‘아시아의 라스베이거스’ 마카오와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마카오의 지난해 관광객 수가 3000만명을 돌파한 것으로 집계됐는데 마카오 관광이 페리로 한 시간 거리인 홍콩과 패키지로 이뤄지고 있어 홍콩은 마카오의 카지노 산업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홍콩 관광산업 최대 고객인 중국 내륙인들이 홍콩에 몰려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원정출산이다. 홍콩기본법에 따라 중국인이 홍콩에서 아이를 낳으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고, 시민권을 얻으면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가진 홍콩의 영국식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지난해 홍콩에서 태어난 신생아 9만명 중 중국인 원정출산 산모의 아기는 4만명을 넘었다. 2000년 초 한 해 1000명 수준에서 40배 이상 급증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홍콩의 산부인과는 모두 만실이어서 정작 홍콩 임산부들은 병원을 잡기가 어려운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출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치원 입학 때부터 홍콩 교육의 수혜를 누리기 위해 다시 홍콩으로 몰려든다.
지난해 10월 선전시와 국경을 맞댄 홍콩 셩수이에 있는 한 유치원이 입학전형을 시작하자 정원 240명인 이 유치원에 입학하려고 학부모 1400여명이 몰려 장사진을 이뤘다. 그런데 이 학부모들 대다수는 홍콩의 현지 언어인 광둥어가 아니라 내륙에서 쓰는 보통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지역 전체 17개 유치원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 중국인 부모들은 홍콩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중국 자금을 홍콩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면서 홍콩 경제를 살찌우는 거름이 되고 있다.
비싼 부동산
홍콩은 면적이 협소한데다 주거나 사무용 부지는 더더욱 좁아 부동산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특히 홍콩섬의 아파트 가격은 서울 강남지역을 훨씬 웃돈다. 홍콩섬의 115㎡형 아파트 시세는 1500만달러 수준으로 현재 환율기준으로 21억원에 달한다. 목돈이 없어 구입하지 못하면 우리나라와 달리 전세가 없어 매달 임대료를 내고 입주해야 하는데 같은 규모 아파트의 월세는 3만7000홍콩달러로 우리돈 500만원 정도다. 은행금리를 기준으로 전세 환산을 해보면 115㎡형 아파트의 전세가는 7억원 수준이다. 홍콩의 주택 임대료는 러시아의 모스크바, 일본 도쿄에 이어 3위 수준으로 세계 16위인 서울보다 약 2배 정도 비싼 수준이다.
아파트가격 서울 강남 명함도 못 내밀어
이처럼 높은 주택가격은 민간아파트에 한하고 홍콩주민의 절반가량은 정부가 소득수준에 맞춰 저가에 제공하는 공공주택에 거주하기 때문에 살인적인 집값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불만은 높지 않다. 홍콩의 아파트들은 가격이 비쌀 뿐 아니라 같은 115㎡형이라도 우리나라 아파트보다 훨씬 협소하다. 클럽하우스와 공동체육시설 등 공유공간이 많아 개별 가구당 전용면적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마’라고 불리는 외국인 가사 도우미들의 전용 공간을 두는 것이 관행이어서 가족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더더욱 좁아진다.
그런데 이 아마들이 바로 홍콩에서 거주하는 한국 공공기관이나 금융회사 주재원 가족에게는 홍콩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매력덩어리들이다. 주변에서 홍콩이나 동남아에서 살아본 주재원 가족들이 그곳에 있을 때는 하녀를 두고 떵떵거리며 살았다고 회고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아마들은 홍콩의 효율적이고 개방적인 마인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다.
홍콩이 선전특구의 혜택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하자 가사에 묶여 있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을 직장에서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사노동을 전담할 저임금 가사 도우미들을 필리핀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 아마다. 이후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도 받아들여 현재 홍콩에는 30만명에 가까운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체류하고 있다.
홍콩전체 230만 가구의 13% 정도, 대략 8가구당 1가구 정도는 가사도우미가 청소 세탁 요리 어린아이와 노인 돌보기 등 가사 노동을 전담하고 있다. 아마의 평균 급여는 우리돈 50만원 정도인데 노동법에 따라 급여와 고용안정성을 보장받는다. 처음에 2년 단위로 계약을 하고 그 후 2년 단위로 연장하며 입국할 때와 귀국할 때 항공료는 고용주가 부담한다. 의료서비스도 제공해야 하며 법정공휴일과 주 1회 휴무, 연 7일 유급휴가, 10주간의 출산휴가도 주어진다. 홍콩의 아파트에는 대개 부엌 옆에 화장실 딸린 방을 두어 아마들의 독립생활을 보장하고 있다. 아마들은 주말이면 홍콩 중심가 센트럴 지역을 연결해주는 육교나 건물 차양 아래 모여 들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춤을 추면서 타향살이의 애환을 달랜다. 시민들도 홍콩 사회의 풍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최광해 국장은 “우리나라도 홍콩처럼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수입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고학력과 높은 기술력을 보유한 여성인력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여성 노동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수입이야말로 최적의 대안이며 닥쳐오는 고령화 사회에서 저출산 문제의 해법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중국 칭화대학 MBA를 졸업하고 남방기금에 근무하는 정주호 과장은 “금융제국이자 관광대국, 외국인 근로자의 천국이라는 홍콩의 세 얼굴이 ‘개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얼굴이다. 외국인에 대해 열려 있고 그들의 기업활동과 근로활동을 보호하고 배려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의 홍콩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
홍콩과 아시아 금융허브 자리를 다투는 싱가포르를 포함해 런던, 뉴욕 등 세계의 금융 중심지들은 모두 관광지로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는 곳이다. 찾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이라는 점에서 관광과 금융은 동전의 양면이고 똑같은 서비스 산업이기 때문이다. 고색창연한 문화유산과 식도락의 짜릿함을 채워주는 산해진미보다도 개방성과 자유라는 무형의 매력이 더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홍콩은 보여준다. 관광객 1000만명 시대를 맞아 관광대국과 함께 금융허브의 꿈도 함께 가다듬어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