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출신인 A씨는 노후에 안정적으로 월세를 받을 수 있는 상가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자기가 들고 있는 현금으로는 마땅한 물건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부동산 중개업자 K씨를 만났다. K씨는 감정가 14억원짜리 상가 건물을 절반 가격에 낙찰 받도록 해주겠다며 5000만원을 내라고 했다. ‘그 정도면 괜찮겠다’는 생각에 A씨는 돈을 건넸다. 그런데 돈을 챙긴 K씨는 응찰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닦았다. A씨가 다그칠 때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던 그는 어느 날 사무실 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중견 유통업체 출신인 H씨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대형 유통업체 출신 C씨와 사업을 해보자고 했다. 각자 다니던 회사에만 납품해도 기본은 유지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동종 업체로 거래를 확장하면 사업이 꽤 괜찮게 될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실제로 초창기엔 일이 잘 풀렸고 사업이 번창했다. 이대로만 가면 대박은 아니더라도 노후가 따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고가 생겼다. C씨를 믿고 통장 관리를 맡겼는데 10억원 가량의 돈이 사라져버렸다. 거래업체에선 물품대금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H씨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천의 얼굴로 다가오는 사기
경기가 위축되기 때문일까. 전국에서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검찰이나 경찰에 접수되는 사기범은 줄잡아 연간 50만명에 달한다. 신고되지 않은 사기도 수두룩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하루 평균 1400여명 이상이 전국 어디선가 사기를 벌이고 있다는 얘기다. 사기의 유형도 다양화되고 있다. 며칠 급전이 필요하다며 빌려갔다가 떼어먹거나 좋은 사업이 있다며 퇴직자들을 갈취하는 전형적인 사기는 물론이고 정부에서 대형 사업을 따냈다거나 신약을 개발했다는 등 그럴듯한 자료를 내세우는 지능형에 이르기까지 천양각색이다. 특히 최근엔 보이스 피싱이나 다단계 판매는 물론이고 폭력까지 동반하는 기업형 사기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전과 3범인 김 모씨는 고위층의 비자금을 조성하는 데 동참하면 정가의 11~40%에 가전제품이나 자동차를 사주겠다며 사람들을 꾀었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IT콘텐츠사 회원으로 가입한 뒤 물품대금의 일부를 선투자하면 가전제품 등의 세금계산서를 이용해 고위층의 비자금을 조성해주고 여기서 나오는 부가세로 몇 개월 내 신청한 제품을 사준다고 했다. 김씨는 전직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글로벌 기업 명의의 위조문서, 거액이 든 가짜 예금통장 등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현혹했다. 이렇게 속아 넘어간 사람이 173명. 90억원이 넘는 돈을 사기친 그는 에쿠스 리무진을 굴리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수원지검 평택지청에 구속됐다.
최근엔 수법이 대담해져 국가나 공공기관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청주의 K씨 등은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교차로나 인터넷 대출카페 등을 통해 대출희망자를 모집했다. 이들은 허위 재직증명서와 허위 소득세원천징수확인서를 발급해주고 근로자 전세자금 명목으로 금융기관에서 3000만원에서 6400만원까지 대출을 받도록 한 뒤 이 가운데 30~50%를 작업비로 챙겼다. 신혼부부 우대제도를 악용해 미혼남녀 8명에겐 허위로 혼인신고를 해 대출을 받도록 했다. 이들은 국민주택기금 대출은 한국주택금융공사가 대출의 90%를 보증하기에 금융기관 확인이 허술하다는 점을 노려 사기를 쳤다.
대구에선 다단계 기법으로 1만6000여명으로부터 1조5000억원대의 자금을 사취해 달아난 조 모씨 등이 검찰에 적발됐다. 이들은 씨엔이라는 다단계회사를 차려놓고 의료기기 임대설치사업 투자금 명목으로 1구좌당 440만원을 내면 8개월 뒤 581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속였다. 이들은 실제 임대사업은 별로 하지 않은 채 후순위 가입자들의 돈을 받아 선순위 가입자들에게 고율로 지급하면서 돈을 긁어모으는 유사수신 행위를 하다가 도주했다.
대검 불법사금융 합동수사본부는 건강식품 방문판매업체로 위장한 (주)○○○바이오를 통해서 모 대학 병원과 공동으로 당뇨병 신약을 개발했다며 380배 폭등할 신약 관련 주식을 사주겠다는 다단계 방식으로 20억원을 받아 가로챈 일당을 구속한 바 있다.
이처럼 사기범들은 피해자들에게 이익을 안겨주겠다고 유혹해 돈을 가로채거나 보이스 피싱처럼 아예 사람들을 홀리게 해서 돈을 가로채기도 한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진짜로 믿게 만들기 때문에 당한다”고 털어놓았다.
딱한 사람이 사기를 당한다
B그룹의 L회장은 좀처럼 사람을 신뢰하지 않기로 이름이 높다. 임원이 됐다가 그의 눈에 거슬려 하루아침에 자리를 잃은 이가 부지기수다. 이 그룹에서 3년 이상 임원을 했다면 신뢰를 쌓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남을 잘 믿지 않아서인지 L회장은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런 성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배민수 위즈덤하우스 기획실장은 주요기업의 임원이나 자수성가한 CEO들은 대부분 남을 쉽게 믿지 않는 것 같다고 밝혔다.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변호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사기범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것도 이들이 쉽게 사기를 당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경제력이 약하거나 심약한 사람들일수록 사기범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과거엔 힘이 있었더라도 끈이 떨어지면 사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 변호사는 최근 국내 굴지의 그룹 임원 출신이 사기를 당했다며 자문을 해왔다고 밝혔다. 평소에 잘 알던 사람이 찾아와 그럴 듯한 얘기를 해서 투자금을 넘겨줬다가 꼼짝없이 당했다는 것. 사고 피해자나 그 가족들도 사기를 잘 당하는 케이스다.
그렇지만 진짜 사회적 약자들은 훨씬 더 사기에 노출돼 있다.
부산에선 매주 전단지를 500장씩 붙이면 한 달에 16만원을 주겠다며 노인과 장애인을 끌어들인 사기범 일당이 스마트폰 발급 수수료를 사기해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업무용으로 필요한 스마트폰을 개통하라면서 기계값과 요금을 내주겠다고 노약자들을 꾀었다. 노약자들이 서명하자 이들은 1인당 55만원의 수수료를 받아 챙긴 뒤 잠적했다. 노약자들은 월급이나 요금은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매달 전화요금과 할부금을 물고 있다.
아예 휴대전화 단말기까지 팔아먹고 튄 더 흉악한 사기범들도 있다. 한 사기집단은 휴대전화 개통 1건당 15만원씩을 지급하겠다며 주부들을 아르바이트에 끌어들였다. 돈에 욕심이 난 주부들은 가족 친지의 명의와 통장번호를 모아 넘겨줬다. 이들은 수수료를 챙기고 단말기조차 넘겨주지 않고 팔아먹었다. 또 해당 번호로 물품을 구입하는 등 추가 사기까지 벌였다. 이동전화 가입에 별다른 제약조건이 없다는 허점을 노린 사기다.
사기에 관대한 법원·검찰 책임 커
이렇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가정파탄이 나거나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정경제가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전락하거나 평생 쌓은 것을 하루아침에 날리고 심리적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씨름선수 출신으로 족발집을 경영하는 박광덕 씨도 2년 전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사기를 당한 후유증으로 빚이 누적돼 이혼을 하고 자살까지 시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배우 이하얀도 잘 아는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딸의 등록금과 생활비로 모아놓은 2억원을 날리고 난독증을 겪기도 했던 사연을 털어놓았다.
이처럼 피해자들은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지만 사기범에 대한 처벌은 너무나 관대해 추가 사기를 양산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사기범의 3분의 1이 전과자이고 전과 9범 이상도 10%나 된다는 게 이를 입증한다. 피해자 입장에선 인생을 망치는 피해를 입었는데도 법관들은 돈 몇 푼 해먹었다는 것만 들어 불구속으로 내보내거나 벌금 몇 푼으로 끝내기가 일쑤이다.
이에 대해 김인원 변호사는 “강제로 빼앗긴 게 아니라 속아서 준 것이라며 피해자 과실만큼을 상계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개인 간 사기는 혐의를 입증하기가 어렵고 또 사기를 저지르고도 말만 잘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도 사기를 근절하기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기사건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정부는 지난 2010년 4월 15일 형법을 개정해 공소시효를 7년에서 10년으로 늘린 바 있다. 그렇지만 실제 사기범의 범법 의도를 잠재우기엔 현재의 징벌은 너무나 약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 당시에도 이 문제가 거론됐으나 사법부는 경제사범에 대한 형량을 높인다면서 부도를 낸 기업인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을 뿐 실제 국민에게 큰 피해를 주는 사기범에 대해선 여전히 관대한 편이다. 사법부가 그렇다 보니 검찰이나 경찰도 사회적 인정을 받는 거악(권력형 비리, 대형 경제사건 등) 척결에 관심을 집중할 뿐 작은 악에 대해선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풍조가 대한민국을 사기공화국으로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기공화국
검찰의 범죄분석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선 매년 평균 50만명 정도가 사기를 치다 입건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8년 50만7860명이었던 사기범은 이듬해 56만3602명으로 치솟았다가 2010년엔 47만6759명으로 감소했다.
2010년의 경우 전체 사건에 연루된 인원이 386만명에 달했으니 이 가운데 사기는 13% 정도인 것 같다. 그렇지만 통계로 나타난 사기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피해자들이 신고도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는 사건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검찰 출신의 한 인사는 “전체 사건의 절반 정도가 사기라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일부만 집계된 사기사건의 숫자가 폭행사건보다 훨씬 많은 것은 물론이고 폭행과 상해를 합친 정도의 사건보다 많거나 엇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에서 사기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알 만하다.
그런데도 사법당국의 사기사범 처벌은 관대하기 짝이 없다. 현재 사기사건 가운데 절반 정도를 경찰에서 처리하고 나머지 절반을 검찰이 처리하고 있다. 2010년 검찰에서 입건한 사기사건은 9만4133건으로 전체 사기사건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데 그나마 구속은 3194건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모두 불구속으로 처리됐다. 불구속 사건 중 검사가 영장을 기각한 게 191건, 판사가 영장을 기각한 게 372건이나 된다.
피해자들은 경제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정파탄이 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허다한데 사법당국은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기는 직업으로 바뀌는 추세다.
2010년 검거된 사기범 가운데 단독범은 76.1%이고 23.9%는 공범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 5명 이상이 공모해 범행을 계획한 것만도 2036건이나 된다. 사기를 밥벌이로 삼는 셈이다. 실제 사기범 가운데 초범은 10.3%에 불과했고 전과자가 32%나 됐다. 특히 9범 이상이 10%에 육박해 사기의 재미를 본 사람은 손을 떼지 못하고 거의 직업으로 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재범자 가운데 3년 이내에 같은 종류의 사기를 치다가 검거된 경우가 3만3582명에 달한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재범자 중 다른 종류의 사기를 치다가 검거된 경우는 3만6457명이었다. 사기범의 공범은 직장동료가 가장 많았고 동네 친구나 친인척이 그 뒤를 이었다. 역시 사기가 직업이 되고 있다는 또 다른 반증이다. 그렇다면 누가 사기를 당할까. 피해자나 가해자의 관계가 밝혀진 사기 가운데 가장 많은 게 거래 상대방이고 다음으로 국가였다. 또 지인이나 고용자, 친구, 이웃, 애인 등도 피해를 많이 당하는 경우로 집계됐다.
사기범의 연령은 40대가 29.8%로 가장 많았고 30대가 21.1%, 50대가 17.9%였다. 특히 71세 이상이 0.84%, 소년범이 2% 등으로 나타나 사기를 치는 데엔 나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도 여성이 20.7%나 차지해 남자만 사기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무직자나 직업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사기가 많았지만 주부나 학생은 물론이고 종교인이나 의사 변호사 교수도 사기를 친 것으로 나타났다. 피고용자 가운데는 운전자나 일용직 근로자의 사기가 많았고 공기업이나 금융기관 임직원의 사기도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김인원 변호사의 사기 당하지 않는 법첫째 조금이라도 의심 가면 상의하라.
사기범은 대부분 ‘너만 알아야 한다’고 한다. 비밀이 새면 정보 가치가 손상된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만 이익을 얻으려 하면 당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주위 사람과 상의하라. 특히 변호사와 상의하라. 지금은 변호사가 넘쳐 상담에는 돈도 거의 들지 않는다. 비슷한 사람들과 상의해봤자 헛수고다. 반드시 전문가와 상의하라.
둘째 은행이자보다 많이 준다면 무조건 의심하라.
이익이 되는 것을 왜 남에게 권유하겠는가. 자기가 그 이익을 챙기면 될 것을. 세상엔 공짜가 없다. 더 준다는 데 함정이 있다.
셋째 시간을 갖고 생각하라.
사기범 가운데는 친구가 많다. 고교 동창이 갑자기 전화를 해 교통사고를 당했다느니 등의 이유로 돈 얘기를 하면 사기일 가능성이 크다. 급하다고 해도 시간 여유를 갖고 생각하라. 보이스피싱도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럴수록 다른 사람과 상의하라.
넷째 대기업·군·교사 출신은 더욱 주의하라.
갑이었던 사람은 사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자기가 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남이 감히 자기를 속이리라 생각하지 못한다. 그게 함정이다.
다섯째 변호사조차 믿지 마라.
변호사 업계에도 불문율이 있다. 변호사끼리 돈거래 하지 말고 의뢰인에게도 돈 꿔주지 마라는 것이다. 변호사도 사기치고 의뢰인도 사기를 친다. 급하다고 하지만 절대 급하지 않다.
여섯째 가족끼리도 돈을 빌려주지 마라.
가족 간의 사기는 한계를 넘어선 경우에서 많이 생긴다. 힘들 때 주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다. 차라리 망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단칸방이라도 얻어줄 생각을 하라. 그래야 고마워한다. 급전 빌리는 사람은 대부분 금방 된다고 한다. 그러나 금방 될 것 같으면 돈 빌리러 오지도 않는다. 1000만원을 빌려달라면 차라리 그냥 쓰라고 100만원을 줘라.
일곱째 동업하지 마라.
돈 투자하고 영업망을 투자하는 사람 사이에 동업이 잘 이뤄진다. 처음엔 마음에 맞아서 하지만 사소한 것으로 분쟁을 일으킨다. 영업이 잘 되면 영업망을 가진 사람이 빼돌린다. 그것을 견제하면 귀찮아하고, 고소 등 여러 방법으로 내보내려 한다. 동업은 상대가 더 가져가더라도 참을 수 있다고 생각될 때에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