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원자력 발전소 수주 시장이 만개했다.
하지만 한국은 점점 원전 시장에서 ‘좌표’를 잃어가고 있는 모양새다. MB정부 때인 지난 2009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에 한국형 원전 4기(540만kW급)를 판 후 수주 성적이 제로다.
한국형 원전이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 프랑스, 러시아 등 국가 간 경쟁이 어느 때보다 세졌기 때문이다.
세계 경기 침체로 안정적인 자금줄을 꿰찰 수 있는 프로젝트가 점차 귀해지면서 국가 간 빅머니가 오가는 알짜 원전 시장을 따먹으려는 수주 전쟁이 치열해졌다.
내부로 시각을 돌려보면 원전 관리 당국인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자책골’을 넣은 영향이 뼈아프다. 국내에서는 각종 비리와 부실 부품 사태로 인해 ‘원전=복마전’이라는 등식이 형성됐다. 국제적으로도 과연 부실 부품이 투입됐을지 모르는 한국형 원전(APR 1400)이 안전한가라는 논란이 불붙었다. 경쟁국들은 이를 발 빠르게 역이용해 언론 플레이에 나서며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내외 우환이 겹친 한국형 원전, 과연 희망은 있는 것일까.
2030년까지 두 배로 성장하는 원전시장
나라 바깥에서 원전은 대형 인프라스트럭처 수주 시장 가운데 가장 핫한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장 핀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우디아라비아, 베트남 등 지역을 막론하고 수주 대기 물량이 줄줄이 걸렸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현재 국제 원전 시장 수주 규모는 750억 달러 안팎으로 추산된다. 국제적으로 신규 수주 대기 중인 16기에 한국이 최초 수출한 UAE 원전 1기 평균 계약금액(47억 달러)을 곱한 수치다. 이미 수주가 확정돼 건설 중인 원전은 전 세계 14개국의 65기에 달한다.
이 시장이 향후 15년간 ‘곱빼기’로 뛴다. 세계원자력협회(W NA)에 따르면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430기의 원전이 추가로 지어질 예정이다. 현재 가동 중인 전체 원전(435기)에 해당하는 신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WNA는 이렇게 됐을 때 연간 500억~600억 달러 규모의 원전 건설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압둘라 살림 바드리 석유수출국기구(OPEC) 사무국장은 최근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향후 수십 년간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한 원전 증설 추세가 예상된다”며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지역 원전 비중은 현재와 비슷한 6%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이를 잡으려는 기술 보유국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정상들이 앞장서서 원전 먹을거리 발굴에 나서는 모양새다.
일본은 아예 원전 수출에 사활을 걸고 있다. 후쿠시마 사태로 역내 원전 산업이 사실상 ‘붕괴’되며 일본 안에서는 사업 희망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연초 집권 직후부터 아베 신조 총리가 원전 세일즈에 나서며 시장이 있는 곳마다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통의 강자 러시아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국영기업 로스아톰(러시아 원자력공사)에 원자력 사업 권한을 몰아줘 원전 역량을 끌어올리고 있다. 프랑스 역시 자국 업체 아레바를 앞세워 핀란드 등 원전 수주 시장에서 한국과 경합 중이다.
터키서 결정타… 멈춰버린 한국형 원전
한국 원전 행보는 UAE 이후 멈춰버렸다. 한국이 원전 시장에서 밀리고 있다는 불안감은 최근 터키 원전 수주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일본은 저금리 자금 조달 환경을 앞세워 원전 등 대규모 국제 인프라 사업에서 한국을 밀어내려는 욕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아베 일본 총리는 지난 6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한국 컨소시엄을 따돌리고 현지 원전 건설 사업에 최종 합의했다. 한국이 지난 3년여 간 공들인 220억 달러(약 25조원) 규모의 터키 원전 사업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터키 사업은 2023년 가동을 목표로 흑해 연안에 450만㎾급 원전 4기를 건설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한국은 지난 2010년 6월 터키와 원전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협상을 진행했지만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운 일본에 밀려 끝내 탈락했다.
터키 사업에 먹을 게 별로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원전 건설에는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만큼 정부가 사업을 보증해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터키는 정부 보증 없이 사업자가 자체적으로 재원을 조달할 것을 요구했다. 일단 발전소를 건설한 후 20~30년간 전력을 판매한 금액으로 사업비를 회수하라는 얘기다. 최저 전기요금 하한선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문제는 자금력이 풍부한 일본이 이런 ‘악조건’을 감수하고 터키 사업권을 따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일본과 경합할 대규모 인프라 사업에서 한국이 잇따라 고배를 마실 가능성이 농후해진 셈이다.
일본은 조달금리가 낮기 때문에 재원 조건이 열악하거나 전력 판매단가가 낮더라도 손익을 맞추는 게 가능하다. 일본 20년 만기 국채 금리는 1%대 중반으로 한국보다 절반이나 낮다.
지난 9월 8일 하노이에서 열린 한·베 경제협력 간담회에 앞서 원전로드쇼 전시장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
원전 부활 해법은 없나
구조적인 금리 차에 대해서 한국으로서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책금융 측면 지원에서 한국은 많은 한계점을 드러냈다. 터키 사례에서 원전 수출 당국이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일본은 터키 사업에서 민관이 똘똘 뭉쳐 ‘실탄’을 만들었다. 일본은 일본국제협력은행(JBIC) 등 정책금융기관 위주로 자금을 조달하고 미쯔비시중공업, 이토추 등 컨소시엄 참여사들이 일정 부분 지분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재원을 맞췄다.
일본 최대 상업은행이자 미쓰비시중공업과 같은 계열인 미쓰비시도쿄UFJ(BTMU)도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방식으로 실탄을 제공했다. BTMU는 2011년 기준 PF 대출규모가 95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2위 PF 큰손이다.
한국형 원전인 APR 1400은 기술적인 측면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모델로 평가된다. 표준적인 원전 용량인 100만kW보다 40만kW나 많은 전력을 생산한다. 수명은 표준형(40년)보다 20년이 더 길고 내진 강도 역시 표준인 진도 6.5보다 1.0 높은 7.5로 올라갔다.
중요한 것은 좋은 기술을 잘 포장해 남들이 사고 싶게 만드는 노련함이다. 정책 금융 및 원전 수출과 함께 묶어 팔 수 있는 패키지 수출 정책을 보강하는 게 필요한 이유다. 일본은 지난 2009년 UAE 원전 사업에서 한국에 고배를 마신 직후 2010년 원전 수출 전담 합자회사인 ‘국제원자력개발주식회사(JINED)’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도쿄, 간사이 등 9개 전력사와 미쓰비시, 히타치, 도시바 등 민간회사가 총출동했다. 이번 일본 터키 원전 수주에서도 JINED가 짠 국가별 수출 전략이 큰 힘이 됐다는 분석이다.
원전은 1기 수출단가가 50억 달러에 달하는 극히 비싼 상품이다. 압도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는 국가도 없다. 100% 원전으로만 승부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국만 특별하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컨대 개발도상국 등에 원전을 수출할 때는 산업단지 건설이나 인프라 노하우 전수 등 압축 성장에 성공한 한국 스토리를 함께 끼워 파는 ‘1+1’ 전략이 필요하다.
내부 리스크 단속도 필수다. 원전 비리 불똥이 원전 수출 전선 전반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신뢰성을 회복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내년 베트남 수주가 분수령
한국형 원전 부활 분수령은 당장 내년 베트남 시장에서 드러난다.
9월초 박근혜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정상회의를 갖고 원전 세일즈에 나섰다. 베트남이 우리에게 원전을 주는 대신 한국은 산업단지 조성사업, 인프라 개발 등에 도움을 주는 조건 등이 논의될 전망이다. 일단 대통령이 나서서 국내 원전을 먹기 좋게 ‘포장’ 해둔 셈이다. 한국은 베트남 제3원전 5, 6호기를 수주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양국 정부는 지난 6월 한·베트남 원전 분과위원회를 열고 5, 6호기 원전 건설부지, 안전성 등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 협약을 체결했다.
예비 조사는 원전 수주를 위한 1단계 수순이다. 베트남에서 원전 건설을 원하는 국가는 우선 현지 정부와 공동으로 18개월간 예비 타당성 조사를 진행한다. 이 조사 결과를 베트남 국회가 승인하면 본 타당성 조사가 시작된다. 이를 통과하면 비로소 최종 원전 공급 수의계약을 맺게 된다.
러시아, 일본 등 원전 경쟁국은 이미 먼저 치고 나갔다. 러시아와 일본은 지난 2011년 각각 베트남 원전 1, 2호기와 3, 4호기 예비타당성 조사를 실시했고 국회 승인을 거쳐 최근 본 타당성 조사를 마무리했다. 한국은 내년 12월께 예비 조사가 마무리된다. 아직 갈 길이 먼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이 5, 6호 원전 예비 조사에 유일하게 참여하고 있는 만큼 한국형 원전 필요성을 강조하기에 유리한 위치다. 한국형 원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예비조사를 내년 말 현지 국회가 승인하면 원전 수주 ‘9부 능선’은 넘을 것으로 관측된다.
변수는 중국, 프랑스 등 원전 경쟁국의 참여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베트남 정부가 러시아 원전 수주에서는 군수 협력, 일본 수주에는 역내 경제 투자 등을 이끌어냈다”며 “자국 정치, 경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국가를 상대로 수의계약을 맺는 전략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본 협상 단계에 이르렀더라도 베트남에 줄 수 있는 경제협력 개발 패키지나 원전 가격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경쟁국에 최종 수주권을 뺏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중국과 프랑스가 베트남 원전 수주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적으로 베트남 시장에서는 한국형 원전 미래를 가늠할 큰 흐름이 결정될 전망이다.
한국이 예비타당성 조사로 다른 나라보다 ‘반 발’ 앞서 있는 상황에서 원전 자체 기술력으로 최종 굳히기에 들어갈 수 있을 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전에 산업개발 지원 패키지를 붙인 한국의 ‘1+1’ 원전 수출 전략이 얼마만큼 약발을 받을 수 있을 지도 검증 가능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