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의 남북당국회담이 당초 합의됐던 회담일인 6월 12일 바로 전날 오후 7시 5분에 무산됐다.
모처럼의 남북 ‘고위급’ 회담을 준비하느라 막바지 회담 준비에 여념 없던 통일부 당국자들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손을 멈췄다. 광화문 정부청사 부근에서 저녁을 들던 기자들은 오후 7시 35분 연합뉴스가 ‘남북회담 무산’ 1보를 띄운 것을 보고는 바로 밥숟갈을 놓고 기자실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뒤 오후 8시,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북측이 우리 측 수석대표의 격(格)을 문제 삼아 회담 대표단 파견을 보류한다고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북한은 회담 무산 이틀째 되던 13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대변인 담화를 내고 “당국회담을 파탄시킨 괴뢰패당의 도발적 망동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당국회담에 털끝만 한 미련도 가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6월 6일 북측이 조평통 대변인 특별담화를 통해 전격적으로 남북당국회담을 제의한 지 7일째 되던 날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북측은 우리 측이 제시했던 회담 수석대표였던 김남식 통일부 차관의 ‘격’을 문제 삼았다. 자신들은 단장(수석대표)으로 ‘상(相·우리의 장관에 해당)급’인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제시했는데 남측이 고작 ‘차관급’ 인사를 들이밀었다는 것이다.
북측은 남측에서 처음에 수석대표로 나서려던 류길재 통일부 장관 역시 우리 측이 원했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의 대화상대가 될 수 없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에 우리 측은 “현재 남북 관계에 비춰보면 남북문제를 총괄 담당하는 양측의 책임자는 남측 통일부 장관과 북측 통일전선부장”이라며 요구가 결코 무리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되받았다.
북한이 조평통 서기국장을 우리 측 통일부 장관의 맞상대로 생각한 것은 과연 타당한 짝짓기일까? 노동당 당 중앙위 비서이자 통일전선부장인 김양건은 류길재 통일부 장관과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인사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때그때 달라요’ 정도가 될 것 같다.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측은 이제껏 열렸던 남북 장관급 회담에 남측 통일부 장관의 상대로 권호웅, 김령성, 전금진에게 ‘내각 책임참사(특임장관)’의 모자를 씌워서 내보냈다. 북측은 6월 13일 조평통 대변인 담화에서 과거 이들의 직급이 ‘조평통 서기국 제1부국장’이었다고 확인했다. 이어 “이번에는 그래도 남측당국의 체면을 세워주느라고 1부국장도 아닌 국장을 단장으로 했다”고 설명하는 친절함(?)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례가 반드시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남북은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통일부-조평통, 통일부-통전부의 공식적 대화라인은 물론 다양한 층위의 비선접촉을 가졌다. 요는 서로 대화상대로 나선 사람들의 ‘격’보다는 그가 들고 있는 대남·대북메시지에 양측 최고지도자가 얼마만큼 ‘힘’을 실어줬느냐가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남북회담에 당 외곽기구인 조평통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노동당 통일전선부가 공식, 비공식적인 남북회담의 전면에 나선 경우도 상당하다.
우선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 2007년 8월 14일 이관세 당시 통일부 차관이 최승철 당시 통전부 부부장과 개성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 준비접촉을 가졌던 전례가 있다. 통일부 차관과 통전부 부부장이 만나 남북 간 이른바 ‘통-통’ 라인이 가동된 것이다. 13일 조평통 대변인 담화의 논리가 벌써부터 무색해진다.
더구나 김양건 통전부장은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눈앞에 둔 2007년 11월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만복 국정원장 공동 초청에 응해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김 부장은 지난 2009년 8월 말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타계했을 때 조문차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함께 서울을 방문해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과 비공개 개별면담을 가진 적도 있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 1994년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됐던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 때 남북은 수석대표로 이홍구 당시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과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통일전선부장 겸직)이 나섰던 전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