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은 경기 예측을 반영한다. 그러나 경기 예측이 한 갈래로 통일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마지막 뚜껑이 열릴 때까지 헷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격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늘 오락가락이다. 글로벌 경제위기 때도 그랬다. 세계적인 투자은행(IB) 리먼 브러더스가 2008년 9월15일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을 계기로 세계 경제는 급속히 위기의 암운 속으로 돌진했다.
전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주택 경기를 판단할 수 있는 케이스-쉴러 주택가격지수는 이미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글로벌 경제위기 직전인 2008년 4월, 5월의 케이스-쉴러 주택가격지수의 낙폭은 전년 동기 대비 15.23%, 15.76%에 달했다. 이어 같은 해 6월에는 전년 동기 대비 15.91%, 2006년 7월 최고점에 비해서는 18.8%가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주택 시장의 파국을 내다보는 보고서가 쏟아졌다.
상황이 한창 긴박하게 돌아가던 2008년 5월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놨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모자라 향후 6~24개월 안에 국제 유가가 150~200달러 수준에서 거래될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경제위기의 쇼크를 제대로 감안하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됐던 6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1배럴당 120달러를 육박했다.
현실은 달랐다. 경제위기로 수요가 급감하자 유가는 곤두박질쳤다. 그로부터 7개월 후인 2008년 말 국제 유가는 1배럴당 5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2010년 9월 초 현재 국제 유가도 WTI 기준으로 1배럴당 70달러대에 머물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발발한 지 2년이 흘렀다. 무시무시했던 당시와 분위기가 딴판이다. 각종 경제지표들은 글로벌 경제위기 이전 수준으로 속속 회복 중이거나 이미 회복했다. 실제로 한국에선 대량 부도나 집값을 포함, 부동산 가격 폭락 같은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경쟁자들의 낙오 덕분에 한국 기업과 한국 경제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러나 금값, 채권값 그리고 집값은 여전히 엎치락뒤치락이다. 2년 전 집값과 국제 유가의 전망이 엇갈렸던 것과 비슷하다.
여전히 요동치는 금값, 채권값, 집값
필자가 금값, 채권값 그리고 집값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이유는 다소 복합적이다.
이 지표들은 무엇보다 향후 경기에 대한 대표적인 자산지표로서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한국 경제가 인플레이션으로 갈 것인지, 디플레이션(물가의 지속적인 하락)으로 갈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한국 경제만 디커플링(decoupling: 탈동조화)돼 독자적인 행보를 취할 것인지 판가름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세 가지 가격지표는 그 자체로 글로벌 경제위기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금, 채권, 주택이야말로 2008년 말 이후 가장 주목받는 투자항목이다. 오르면 오르는 대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한국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경제논리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의미마저도 상당 부분 금값, 채권값, 집값에 녹아 있다. 긴말이 필요 없다. 통계는 눈속임이 가능하다지만 숫자 그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글로벌 경제위기 직전인 2년 전 가격과 비교해보면 시사점이 뚜렷해진다.
금 1돈 15만8400원→19만5030원
우선 금값. 순금 1돈(3.75g)당 국내 시세는 2008년 8월 말 15만8400원에서 2010년 8월 말에는 19만5030원으로 튀어 올랐다. 자잘한 등락이 있었지만 위기 이후 금값은 추세적으로 상승세를 유지했다. 세계 경제가 위기를 맞은 것은 비단 이번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금값이 유난히 상승세를 보이는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몇 가지 요인들을 꼽자면 (1)경제가 다시 고꾸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 (2)달러화 약세 가능성(흔히 금은 달러화 약세에 대비한 위험 회피 수단으로 활용된다) (3)안전자산 선호심리 (4)금값의 추가 상승 기대감 등이다. 국제 금 시장에서 중국이 금을 긁어모으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금값 상승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1)더블딥 우려
(2)달러화의 기축통화 기능 약화 (3)주식, 부동산에 대한 불신감 (4)여전히 살아있는 투기 욕구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요인을 덧붙이자면 신흥국 경제의 급부상이다. 사실 금값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속적인 상승 추세를 보여 왔다. 이러한 가격 상승 추세 자체가 달라진 세계 경제 구조를 반영한다. 신흥국 국민들의 소득 증가로 장식품용 금 소비가 늘어나고 있는 데 반해 금 생산량은 2001년에 정점을 찍은 후 차츰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 연 3.82%→연 2.4697%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의 수익률은 2008년 8월 말 연 3.82%에서 2010년 8월 말에는 연 2.4697%로 떨어졌다. 채권 수익률이 떨어졌다는 것은 채권값이 그만큼 올랐다는 뜻이다.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도 2008년 8월 평균 5.90%에서 2010년 8월에는 평균 4.67%로 주저앉았다.
채권값 상승은 최근 자산운용계의 최대 화두다. 남아도는 글로벌 자금이 각국 채권시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8월 말 기준 주요 25개국을 대상으로 10년물 국채 금리를 점검해보니 60%에 해당하는 13개국의 국채 금리가 연 2~3% 수준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이었다면 미국과 스위스나 가능했던 수준이다.
국제 투자자금이 신흥국 국채에 몰려들면서 한국 등의 국채 금리가 가파른 하락세를 보였다는 의미다. 한국의 경우 외국인들의 채권투자가 지나쳐 오히려 버블(거품)이 우려된다는 시각도 있다. 언젠가 ‘썰물’처럼 투자자금이 빠져나가면 또 다른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진단이다.
전 세계적인 채권투자 붐 역시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의 국채투자는 더블딥 우려와 그에 따른 디플레이션 대비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경제가 비교적 탄탄하게 굴러가는 신흥국에서는 넘치는 유동성이 채권투자를 부추긴다는 해석이다.
어쩌면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냥 선진국이든 신흥국이든 투자자들이 주식과 부동산을 불안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간단하다.다만 연 2~4%의 국채 수익에도 만족하는 투자자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점은 섬뜩하기도 하다. 투자자들이 그 정도 수익이라도 미리 챙겨놓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현금가치가 높아지는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주식, 부동산보다 국채가 훨씬 낫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물가 상승 압력이 ‘발등의 불’인 형국이다. 하지만 선진국 경제가 디플레이션 함정에 빠지면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도 시차가 있을지언정 영영 그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다.
잠실주공5단지 119㎡ 12억4000만원→12억8000만원
마지막으로 집값이다. 한국의 집값이야말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드라마틱한 움직임을 보였다. 롤러코스터에 비유할 만하다.
국민은행 주택매매가격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집값도 글로벌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2008년 8월 전국의 전체 주택매매가격지수는 104.1이었지만 2010년 8월에는 102.3으로 떨어졌다. 범위를 서울지역의 아파트로 좁히면 하락폭은 더욱 가파르다. 같은 기간 서울지역 아파트는 106.1에서 101.7로 하락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 집값도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아 한동안 주춤했다.
그러나 금세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 때의 국민적 경험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외부 충격으로 떨어진 집값은 조만간 다시 튀어 오른다’는 공감대 말이다. 결국 집값이 정점을 찍은 것은 2009년 9월이었다. 이때 주택매매가격지수는 전국 주택 100.7이었고, 서울 아파트 102.2였다.
이후 통계상 한국의 집값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특히 수도권은 지난 3월 중순 이후 연속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집값에 일률적인 잣대를 댈 수는 없다.
글로벌 경제위기 전과 비교해보면 엇비슷하거나 심지어 가격이 오른 곳이 적지 않다. 재건축아파트 시세의 바로미터로 활용되는 잠실주공5단지 공급면적 119㎡(36평형) 아파트가 그런 경우다. 이 아파트값은 2008년 8월에는 12억4000만원(평균 실거래가 기준)이었으나 2010년 7월에는 12억8000만원으로 소폭이나마 상승했다.
어쨌든 집값이 떨어지자 지난 8월29일 한국 정부는 이른바 ‘8•29 부동산 대책’을 내놨다. 이로써 주택 시장을 선도하는 서울 강남3구(강남•서초•송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내년 3월까지 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해제됐다. 정부 측 논리는 DTI 규제를 풀어 실수요자의 불편함을 줄여주고 주택 거래를 활성화하겠다는 것이다. 수요 확대 정책이니만큼 사실상 집값 상승을 유도하는 정책이다. 전 고점(2009년 9월)에 비해 하락폭이 2%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시장 대책이 나온 만큼 이를 경제적 잣대로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정부 스스로 인정하듯이 디플레이션 및 금융 부실을 걱정할 만한 단계는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의사결정이라고 보는 게 솔직할 것이다.
혼란스러운 경기신호
금값, 채권값 그리고 집값 움직임이 주는 신호는 혼란스럽다. 예컨대 채권 매입 붐은 디플레이션 기대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금값 상승 하나만 놓고 본다면 과잉 유동성에 따른 글로벌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집값은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경기 움직임과 거꾸로 가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한국 집값만 떼어놓고 보면 글로벌 경제위기 후에는 ‘주가 상승’, ‘실물경제 회복’, ‘부동산 가격 상승’의 사이클 자체가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금값, 채권값 그리고 집값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대표적인 자산지표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흐트러져 제각각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관된 흐름이 나타날 것이다.
앞으로 채권 매입 붐이 주춤해지고, 금값이 계속 오른다면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할 것이다. 중장기적인 투자 관심을 주식, 부동산 쪽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반대로 금값 상승세가 서서히 꺾이면서 채권 매입 붐이 더욱 거세어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선진국에서 비롯된 디플레이션의 여파가 시차를 두고 한국 등 신흥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전혀 다른 전개 방향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외부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든 한국의 집값이 독자적인 상승 또는 하락행진을 할 수도 있다. 세계 경제와의 잠정적인 디커플링이 이뤄지는 것이다.성장뿐 아니다. 환율이나 정책 금리 움직임도 금값, 채권값, 집값 동향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브로큰 윙(Broken Wing)’이란 말이 있다. 위기에 빠진 경제가 단기 부양책에 힘입어 반짝 회복세를 보이다가 ‘꺾인 날개’처럼 다시 고꾸라지는 현상을 뜻한다. 오른쪽이 처져 있는 ‘W’자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할지 여부에 따라 국가•기업•개인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글로벌 경제위기 2년이 흘렀지만 ‘브로큰 윙’의 공포는 여전하다. 아직도 결판나지 않은 것이다. 기회는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