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 청와대 서별관. 청와대 영빈관 옆에 위치한 이 작은 회의실에 재정경제부, 건설교통부, 금융감독위원회, 한국은행의 핵심 수뇌부가 모여들었다. 통상 일주일에 한번 열리는 ‘서별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회의 분위기는 유난히 침울했다고 전해진다. 부동산 투기 광풍이 몰아치면서 자고 나면 집값이 수천만원씩 뛰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세금 위주의 부동산 안정대책은 좀처럼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격노한 대통령이 경제 관료들의 무능을 연일 질타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날 서별관 회의에서 부동산 시장 안정과 관련해 역사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주택정책 주무부처인 건설교통부가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다. 김용덕 당시 건교부 차관(훗날 대통령 경제보좌관, 금융감독위원장 역임)이 “세금 대책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확인되지 않았느냐. 이젠 유동성 대책으로 문제 해결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런 김 차관의 의견에 한국은행이 거들고 나섰다. 당시 한국은행은 넘치는 유동성 때문에 심각한 원화절상 압력을 받고 있었다. 당시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유동성 부문을 조절해야 집값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김 차관의 발언에 맞장구를 쳤다. 결국 금융감독원이 필요한 유동성 대책을 마련해 오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이것이 DTI(총부채상환비율)규제가 탄생한 배경이다. DTI규제는 2006년 ‘3·30대책’에 포함돼 시행에 들어갔다. DTI규제의 핵심은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드는 돈줄을 조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30대책의 ‘약발’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DTI규제를 처음 도입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예외’를 인정해준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집값을 잡은 것은 같은 11월에 발표한 11·15대책이었다.
“11·15대책을 통해서야 DTI규제가 제 역할”
2010년 12월14일 코스피지수가 37개월만에 다시 2000을 돌파했다.
11·15대책의 핵심은 LTV(주택담보비율)와 DTI 강화였다. 은행 보험의 경우 투기지역 LTV 예외 적용 대상을 폐지, 40%로 대폭 강화했다. 비은행 금융기관도 LTV규제를 60~70%에서 50%로 강화했다. 특히 투기지역 6억 원 초과 아파트 신규 구입 대출시 적용되는 DTI규제를 수도권 투기과열지구로 확대 적용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DTI규제가 시행됐지만 ‘쥐구멍’이 너무 많았다. 결국 2006년 겨울 발표된 11·15대책을 통해서야 DTI규제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행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감독당국은 일일보고를 받아가며 일선 창구를 조였고, 그 과정에서 60여 명의 금융기관 임직원이 문책 및 징계를 받기도 했다. 결국 다음 달부터 집값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경제는 7~8개월 허송세월을 해야 했다.”(당시 정부 고위관계자)
한 달여 뒤인 2007년 1월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사에는 국민들에게 정부의 정책 실패를 사과하는 내용이 담겨졌다.
“부동산 문제는 정부의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다시 대책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거듭 다짐드립니다. 반드시 잡겠습니다. 그리고 잡힐 것입니다. 환율 문제는 정부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정부의 시행착오’라는 말로 정책 실패를 사실상 인정했다. 실패의 핵심적인 원인은 유동성 관리였다. 당시 노 대통령은 분노하고 있었다. 각종 세금정책을 쏟아 부어도 잡히지 않던 집값이 유동성 규제(DTI, LTV)를 강화해 실시하자마자 잡히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임기의 절반 이상을 집값 잡는 데 허비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만했다.
“그동안 관료그룹에 속아온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하는 눈치였다. 책임자를 가려내라는 엄명이 떨어졌다.”(당시 청와대 근무 전직 고위관료)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2007년 5월. 청와대에서 비공개 보고회가 열렸다. 보고회라는 용어를 썼지만 사실상 경제부처 장관들이 자아비판을 하는 자리였다.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건설교통부 수뇌부는 선생님 앞에서 야단맞는 학생처럼 대통령 앞에서 통렬하게 자기반성을 하고 ‘앞으로는 제때, 제대로 유동성을 관리하겠다’며 다짐했다.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고위인사의 말에 따르면 일부 고위관료들은 ‘간신히’ 징계를 피할 수 있었다.
현재 시점에서 5년여 전인 2004~2006년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최근 상황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저금리와 거세게 밀려드는 외국인투자자금, 점점 비중을 키워가는 시중 부동자금, 지속적인 원화값 상승 압력, 부동산 시장의 꿈틀거림이 딱 닮은꼴이다.
최근 부동산 시장 5년여 전과 닮은꼴
지난 2004~2006년으로 되돌아가보자. 광의의 유동성 지표인 M2의 월별 전년 동기대비 증가율은 카드대란 직후인 2004년 1월 저점(2.4%)을 기록한 이후 추세적으로 상승했다. 국내적으로 금융 완화 기조가 지속된 가운데 외국인 자금이 대거 유입됐다. 이런 가운데 2004년 경상수지는 281억7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해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외국인의 국내 증권투자, 직접투자 자금 유입 등으로 인해 자본수지도 약 80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당시 가계는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을 이용해 주택 구입에 열을 올렸다. 집값은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는 불패신화에 금융기관의 과도한 대출관행이 주택 투자를 부추겼다. 국민은행의 전국 주택매매가격 지수(2008년 12월=100)는 2004년부터 3년간 무려 12.75나 치솟았다.
지금 상황도 그때와 비슷하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가 금리인하 경쟁을 벌인 탓에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 금리는 오히려 5년 전보다 낮은 상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초저금리 기조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시중부동자금이 최근 크게 불어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 정기예금 잔액에서 6개월 미만의 단기예금 비중이 2009년 말 12.9%에서 2010년 8월 말 16.1%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런 단기예금들은 만기를 채우면 얼마든지 부동산 등 자산에 투자될 수 있다. 또 2011년까지 보금자리주택, 위례신도시, 4대강 정비사업 등으로 40조원 정도의 토지보상금이 지급될 예정이다.
특히 앞으로 외국자본 유입에 따른 유동성 증가가 예상보다 빠르게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2009년 초부터 1조7500억 달러 규모의 채권을 사들인 미국은 2011년 6월 말까지 6000억 달러 규모의 돈을 추가로 푸는 2차 양적 완화 조치에 나서게 된다. 전 세계적인 유동성 과잉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5년여 전과 최근 상황을 비교해보면 유동성 확대에 따른 자산버블과 같은 문제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며 “당시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가격 상승은 해외 유동성 증가 요인이 상당이 컸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2011년 중에는 미국의 양적 완화 조치로 상당한 양의 유동성이 들어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4~2006년의 주가, 원화값 움직임을 보여주는 추세 그래프를 압축하면 2009년 이후와 엇비슷하다. 소름끼치는 대목이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경기가 급속히 회복되는 국면에서 5년여 전과 유사한 유동성 과잉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경제연구부장은 “아직까지 통화증가율(M2)의 증가세는 그다지 높지 않다”면서도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금리를 상당히 낮추고 돈을 풀어놓은 상태라서 유동성은 많다고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김 연구부장은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은행과 정부가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유동성을 대거 공급한 이후 2009년 M2 증가율, 단기부동자금 증가율이 급증했기 때문에 최근의 M2 증가율 수치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부동산 시장에서도 미묘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내년 하반기 이후 자산버블의 ‘불길’이 부동산 시장으로 옮겨 붙을 수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김소영 교수는 “유동성 확대에 따른 효과가 주식시장을 먼저 거치고 부동산 쪽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말했다.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의 움직임도 닮은꼴이다. 심지어 움직임은 5년여 전보다 최근이 훨씬 크다.
주식시장 거친 후 부동산 시장으로 넘어갈 듯
지난 2003년부터 오름세를 탄 코스피는 4년 만에 4배가량 폭등했다. 2003년 500대였던 코스피는 2005년 초에 1000선을 돌파했고, 2008년에는 2000선을 찍었다.
2008년 9월 글로벌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 코스피는 최근 들어 5년여 전 상황과 오버랩된다. 900선마저 무너졌던 한국 주식시장은 37개월 만에 2000선 돌파했다.
환율도 심상치 않다. 2001년 달러당 1300원대에 머물렀던 원화값은 2004년부터 빠른 속도로 오름세를 타더니 2007년에는 달러당 900원선을 위협했다. 최근 원화값도 추세적으로는 지속적인 절상 압력을 받고 있다. 2009년 2월 1500원대로 주저앉았던 원화값은 이제 1100원선을 위협하고 있다.
사실 2004~2006년은 글로벌 경제 차원에서도 유동성 과잉의 고통을 겪었던 시기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2001년 IT버블 붕괴와 9·11테러 사태에 따른 심각한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가파르게 떨어뜨렸다. 2000년 6.5%에 달했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기준금리를 불과 3년 만에 1%로 끌어내렸다.
미국·일본·유로지역 등 선진국의 경우 1990년 이후 명목 GDP 대비 통화량이 기존 추세선에서 20% 이상 초과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정상적인 수준보다 20% 이상 시중자금이 많이 풀렸다는 의미다. 효과는 뚜렷했다. 추락했던 경제성장률이 완연한 회복세를 탔다.
하지만 돈 풀기 경쟁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집값을 중심으로 자산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2000~2005년 연평균 주택가격은 미국이 6.4% 급등했고 영국은 9.9%나 수직 상승했다. 고삐 풀린 과잉유동성은 주택시장에 심각한 거품을 만들어냈고, 금융기관의 무모한 대출·투자관행이 가세하면서 2008년 9월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촉발시켰다. 유동성 과잉의 교훈은 간단명료하다. 유동성에 대한 정책 당국의 ‘때늦은 소극적인 대응’이 참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상당수 전문가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정부를 바라보고 있다. 유동성 과잉에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까지 5년여 전과 닮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전문가들은 ▲외화유출입 규제 장치의 조속한 도입 ▲금리조정 이외 다양한 유동성 조절장치 개발 ▲보다 신중한 부동산 정책 등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발등에 불은 외화유출입 규제 장치다. 미국이 국제금융시장에 달러를 대규모로 풀어내면서 나타날 해외자금의 국내 유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만기가 짧은 투자 상품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가 언제든지 빠져나갈 태세를 갖추고 있는 외국인 단기투기자금이 최근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정책 대응 속도가 주변국에 비해 크게 뒤처지고 있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태국, 브라질 등은 일치감치 외국자본 유출입 규제에 나선 상태며 중국도 추가 조치를 내놓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들 국가에 흘러들었을 글로벌 투자자금까지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다.
황인성 삼성경제연구소 박사는 “지난해 서울 G20정상회의에서 외국자본의 급격한 유입을 막는 장치들이 합의됐는데, 외국자본이 대거 유입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자산거품”이라며 “유동성이 커지면서 자산거품이 생기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해외증권투자 역차별 폐지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2007년 1월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는 해외투자 활성화를 위한 정책 패키지를 발표했다. 당시는 경상수지, 자본수지 쌍둥이 흑자에 따라 원화 강세가 지속되던 상황이었다. 정부는 넘치는 달러를 밖으로 퍼내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우선 해외주식투자에서 발생한 양도차익 분배금에 대한 한시적(3년) 비과세와 해외부동산 투자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이런 세제 혜택에 그해 6월부터 각종 해외펀드가 붐을 이뤘다. 투자목적 해외부동산 취득 한도도 100만 달러에서 300만 달러로 상향 조정됐다. 정부 신고 사항이었던 자산운용사의 해외부동산 투자목적 특수목적기구(SPV) 설립을 은행 신고로 완화시켜줬다.
후유증도 적지 않았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상당한 손실을 입은 게 사실이다. 2008년 9월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대부분의 해외펀드가 원금을 까먹기 시작했다. 한때 붐을 이뤘던 해외부동산 투자도 2년 만에 5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해외투자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전직 경제부처 장관은 “한번 혼이 났다고 해외투자를 배타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넘치는 유동성을 해외로 유출시켜 관리한다는 측면에서도 해외투자 활성화가 필요하지만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시킨다는 차원에서도 해외투자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유동성 정책의 핵심은 타이밍
다만 부동산 거품 문제에 대해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황인성 박사는 “가격뿐 아니라 거래 등 시장 전체가 위축된 상황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장 참가자들이 향후 부동산 경기 위축을 우려하고 있다”며 “선제적인 대응이 지나치면 난리가 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한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이미 부동산 거품 조짐은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며 “선제적인 대응책 마련을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전셋값 상승이 서울 강남 등을 넘어서 수도권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전셋값의 추세적인 상승이 주택 매매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유동성 정책의 핵심은 타이밍(Timing)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번번이 그 타이밍을 놓쳐왔다. 5년여 전에도 그랬다.
사실 유동성 관리대책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풀린 돈을 거둬들이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넘쳐나는 유동성의 과실은 단기적으로는 아주 달콤한 법이다. 그 맛을 칼같이 끊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중에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를 감안하면 취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끊어야 할 것은 끊어야 한다. 알고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되풀이되는 실수는 죄악이 되기도 한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경제부처 장관은 “5년여 전인 2004~2006년과 요즘 상황은 다른 점도 있지만 유동성, 물가 측면에서는 엇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을 정부도 잘 알고 있다”며 “미리 대비할 수 있는 부분은 대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