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정상 개최된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 ‘MWC 2022’는 메타버스와 로봇이 주인공이었다. MWC 참가 기업들이 초연결·초고속·초저지연을 표방하는 5G와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등 첨단 기술을 융합해 다양한 메타버스와 로봇을 경쟁적으로 선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메타버스와 로봇은 공상과학(SF)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올해 MWC에선 산업 혁신을 일으키는 기술로 떠올랐다. 동시에 가까운 미래의 모습도 보여줬다는 평가다.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나흘간 열린 MWC는 200개 국가·지역에서 1900여 개 기업과 6만1000여 명이 오프라인으로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MWC에서 포착된 메타버스와 로봇 트렌드를 소개한다.
대만 HTC의 VR 글라스 바이브플로(VIVE Flow).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XR(확장현실) 기술 진화
MWC 참가 기업들의 상당수가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XR(확장현실) 기술 등을 적용한 ‘메타버스’ 서비스를 선보였다. 5G 상용화 첫해인 2019년 MWC에서도 메타버스가 있었다. 다른 점은 3년 전 메타버스가 청사진 수준이었다면 올해는 일상에 침투할 정도로 진화했다는 점이다. 전시장은 최신 메타버스 기기의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애플과 메타(옛 페이스북), 구글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차세대 메타버스 기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가운데, 중국 기업들이 신제품을 공개하며 선공을 날리는 모습이었다.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 오포는 초경량 AR 안경 ‘에어글라스(Air Glass)’를 내놨다. 전용 안경테 위에 AR가 구현되는 렌즈를 한쪽에 붙이면 눈앞에 초록색 텍스트와 도형 등 콘텐츠가 뜬다. 날씨, 스케줄,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프롬포터나 내비게이션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음성 인식을 통한 실시간 번역 기능도 있다. 상대방이 중국어를 말하면 에어글라스 화면에 영어가 뜬다. 오포는 향후 번역 기능을 한국어와 중국어, 중국어와 일본어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무게가 30g으로 역대 AR 디바이스 중 가장 가볍다. 깔끔한 디자인 덕분에 정장에 착용해도 어색하지 않다.
TCL AR 글라스 LEINIAO AR를 착용한 모습.
중국 가전 업체 TCL도 자사의 첫 AR 글라스인 ‘LEINIAO AR’를 내놨다. 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2에서 티저 영상으로 공개한 제품인데 이번 MWC에서 실물을 공개했다. 외관은 안경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무게는 75g이다. 이 AR 글라스를 쓰고 손으로 안경테를 터치하면 날씨·뉴스 등 인터넷 정보가 풀HD급(1080p) 화질로 화면에 뜬다. 또 문자·동영상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고, 사진 촬영, 문서 공유, 가전제품 제어, 자동차 시동 걸기 등 스마트폰보다 더 편리하게 일상의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는 게 TCL 측 설명이다. 한 유럽 매체는 “몇 가지 기술적 한계를 극복해야 하지만 <007> 제임스 본드가 부러워할 안경”이라고 평가했다.
대만 HTC는 MWC에서 기존 고글 형태와 차별화한 ‘VR 글라스’ 인 ‘바이브플로(VIVE Flow)’를 선보였다. 기존 VR 기기가 게임 등 특수 용도였다면 바이브플로는 VR 회의·요가·명상·콘텐츠 관람 등 일상생활에 더 적합하다는 게 HTC 측의 설명이다. 스마트폰과 유선으로 연결된 점은 다소 불편하지만, 배터리 내장형이 아니어서 무게가 189g으로 가벼워 휴대성을 강화했다. 또 자사의 메타버스 플랫폼 ‘바이버스(Viverse)’도 공개했다. 바이버스는 메타의 메타버스 구상처럼 사용자가 아바타로 변신해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면서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게임이나 콘서트, 쇼핑 등을 즐길 수 있다. 메타와 다른 점은 인게이지(Engage), VR챗(VRchat) 등 다른 회사의 메타버스 플랫폼과 연동되는 개방형으로 개발된다는 점이다.
프랑스 통신사 오렌지의 전시부스에서 관람객들이 노트르담 대성당 VR 서비스를 체험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MWC에서 메타버스 기기를 개발 중이라고 처음 밝혔다. 이어 최근 주주총회에서 회사의 미래 사업으로 메타버스를 꼽았다. 삼성전자는 과거 VR 기기를 내놨다가 접었는데, 이번엔 AR 기기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테크 기업들의 메타버스 기기 개발 경쟁이 달아오르면서 칩셋 분야 강자인 미국 퀄컴의 전시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번 MWC에선 자사 칩셋이 탑재된 스마트폰 대신 메타버스 기기들을 대거 전시했다. 퀄컴 관계자는 “퀄컴은 작년 말부터 XR 대신 메타버스를 공식 용어로 쓰기로 했다”며 “앞으로 메타버스 관련 칩셋과 솔루션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메타버스 콘텐츠 수준도 대폭 향상됐다. 메타버스를 떠받치는 5G와 클라우드 기술이 몇 년 사이 진화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통신사 오렌지는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순간이동할 수 있는 VR 서비스를 소개했다. 오렌지 관계자는 “5G와 클라우드가 대량의 이미지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들과 특유의 성스러운 분위기를 그대로 구현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화재 사고로 일부가 소실돼 현재 복원 작업 중이어서 당분간 안에 들어갈 수 없는데 메타버스에선 가능한 셈이다.
스페인 통신사 텔레포이카가 선보인 5G 바텐더 로봇.
에릭슨은 홀로그램 기술로 현실의 나와 똑같은 3D(차원) 이미지를 구현해 화상회의를 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아바타 회의보다 한발 더 나아간 메타버스였다.
SK텔레콤은 메타버스 플랫폼인 ‘이프랜드’의 글로벌 버전과 헤드셋 기기 버전을 선보였다. 이프랜드에 블록체인 기반의 NFT(대체불가능토큰), 마켓 플레이스 등을 추가해 경제 시스템을 갖춰 연내 80개국에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LG유플러스는 K팝 XR 플랫폼인 ‘아이돌라이브’에 NFT를 붙여 동남아시아에 이어 중동지역과 아프리카까지 수출 영토를 넓힐 예정이다. MWC를 주최하는 GSMA(세계이동통신사업자연합회)는 “메타버스는 내년에도 주요 화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5G·AI·사물인터넷의 결합… 지능형 로봇 부상
스마트 로봇도 주목을 받았다. 로봇은 5G가 AI·IoT와 결합하면서 산업 현장에 투입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똑똑해졌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로봇만 존재하는 ‘무인 공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로봇이 또 다른 로봇의 생산 활동을 감시하고, 사람은 이런 로봇들을 메타버스 기술로 원격 제어하는 식이다.
KT의 세계 최초 AI 방역 로봇.
스페인 최대 통신사 텔레포니카는 다양한 물류 로봇을 선보였다. 창고에서 운반 로봇이 상자의 무게와 부피, 크기를 측정해 컨베이어 벨트까지 옮긴다. 로봇 팔이 이 상자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리고 배송지에 따라 분류한다. 소형 드론이 창고 내부를 날아다니며 로봇들의 작업을 실시간으로 감시한다. 로봇 움직임에 이상이 감지되면 공장 밖에서 근무 중인 직원이 메타버스 기기를 착용하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등 원격 수리를 한다. 소형 드론은 배터리 충전이 필요하면 스스로 충전소로 날아간다. 텔레포니카는 고객을 식별하고 5개 국어를 구사하며 간단한 칵테일을 만드는 5G 바텐더 로봇도 전시했다.
KT는 5G망 기반에 AI와 빅데이터, 자율주행 기술이 융합된 방역 로봇을 공개했다. 이 로봇은 엘리베이터를 스스로 타고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공기를 정화하고 바닥을 살균한다.
에릭슨은 2030년 미래 자전거 공장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미래 공장은 컴컴하고 싸늘했다. 로봇만 일하기 때문에 조명과 난방을 끄고 에너지를 절약한다. 주문이 접수되면 로봇들은 고객의 신체정보, 거주지역, 라이프스타일 등 데이터를 분석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운반 로봇이 필요한 부품들을 꺼내오면 로봇 팔이 이를 조립하고 품질 검사를 한다. 이렇게 ‘세상에 하나뿐인 자전거’가 완성되면 공중에서 대기 중인 드론이 픽업해 고객에게 배달한다. 철저히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불량·반품·재고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게 에릭슨의 설명이다.
에릭슨의 2030년 미래 바이크 공장에서 품질 검사 중인 로봇.
노키아는 1년 중의 절반은 어둠이 깔리고 영하 30℃까지 떨어지는 핀란드의 한 광산에서 무인 트럭을 운전하는 사례를 소개했다. 또 5G 특화망을 활용해 대형 물류 창고에서 오차범위 30㎝ 이내로 지정된 위치에 제품을 운반하는 로봇도 선보였다.
중국 샤오미는 사족 보행 로봇 ‘사이버도그’를 전시했다. 현대자동차가 인수한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개 ‘스폿’을 본떠 만들었다. 샤오미의 사족 보행 로봇은 총 11개의 센서를 탑재했다. 그럼에도 스폿에 비해 움직임이 투박하지만 약 180만원이란 가격을 감안하면 가성비는 나쁘지 않다는 평가가 나왔다. GSMA 관계자는 “올해 5G에 연결되는 기기는 10억 개에 달할 전망”이라며 “5G 기반의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무인 지능형 공장을 구축하는 기업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아너가 공개한 플래그십 스마트폰 매직4프로.
▶삼성·애플 추격 나선 중국… 신제품 쏟아내며 유럽 공략
미국의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업체들은 MWC에서 신제품을 대거 공개하며 유럽 시장 공략에 나섰다. MWC는 전통적으로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새로운 폼팩터(기기 형태)와 기술력을 과시하는 무대로 여겨졌다. 다만 코로나 이후 삼성전자와 애플이 각사의 전략에 따라 MWC와 상관없이 신제품 스마트폰을 공개하는 데다, LG전자는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올해 MWC는 중국 제조사의 독무대가 됐다.
화웨이에서 분사한 아너는 카메라 기능을 대폭 강화한 플래그십 스마트폰 ‘매직4’ 시리즈를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스마트폰 뒷면 중앙에 원 형태로 5000만 화소 광각 메인 카메라와 5000만 화소 초광각 카메라, 6400만 화소 망원 카메라 등 트리플 카메라를 배치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S22 시리즈처럼 퀄컴의 스냅드래곤8 1세대(Gen1) 칩셋을 탑재했다. 아너는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자사의 ‘매직4프로’와 애플의 최신 폰인 ‘아이폰13프로’로 같은 장면을 찍은 뒤 ‘둘 중 어느 쪽이 더 낫느냐’는 질문을 던질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너는 작년 4분기 중국 시장 출하량이 비보, 오포, 샤오미 등을 제치고 애플에 이은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매직4 시리즈는 해외 진출을 위한 전략 제품으로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아너는 MWC 직전에 삼성전자를 겨냥한 폴더블폰 ‘매직V’도 내놨다. 아너는 스마트폰 이외에 체온을 측정할 수 있는 무선 이어폰 ‘이어버즈3 프로’도 함께 선보였다.
샤오미의 사족 보행 로봇.
오포는 롤러블폰 시제품을 내놨다. 롤러블폰은 디스플레이가 6.8인치에서 최대 10인치로 늘어난다. 오포는 또 책처럼 안쪽으로도(인폴딩), 바깥쪽으로도(아웃폴딩) 접히는 ‘콘셉트폰’도 내놨다. 어떤 방향에서도 180° 접힌다는 점에선 새로운 폼팩터로 주목을 받았지만 힌지 등 내구성 면에서 완성도가 높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초고속 충전 기술에 대해선 호평이 나왔다.
오포는 스마트폰 배터리를 기존 업계 평균인 800회의 2배에 해당하는 1600회를 충전해도 최대 용량의 80%를 유지하는 기술을 공개했다. 9분 만에 4500㎃h(밀리암페어시) 대용량 배터리를 100% 완충하는 초고속 충전 기술도 선보였다.
통신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애플과 비슷한 성능이면서 중저가라는 가성비로 유럽을 공략한다는 중국 업체들의 공통 전략”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