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문 앞에서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은 건 바로 이날의 인터뷰이, 유빈(32)이었다.
유빈의 2020년은 시작부터 드라마틱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걸그룹 원더걸스가 지난 2017년 10년 역사에 마침표를 찍으며 공식 해체한 뒤, 3년간 ‘친정’ JYP엔터테인먼트(이하 JYP)의 대표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한 그는 올해 초, 장장 13년간 몸 담았던 소속사와 아름다운 이별을 택해 가요계를 뜨겁게 달궜다. 3년 전 원더걸스 멤버 선미, 예은이 JYP를 떠날 때도 소속사에 잔류하고 솔로 가수로 나서 활동한 만큼 JYP를 떠나는 유빈의 결정을 예의주시하는 시선이 많았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만인 지난 2월, 유빈은 1인 기획사 르엔터테인먼트(rrr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소속사 대표 아티스트로 새 출발을 선언했다. 인터뷰에 앞서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주고받은 명함 속 ‘르엔터테인먼트 CEO/아티스트’로 적힌 그의 직함이 눈에 들어왔다.
새 소속사에서 선보이는 첫 번째 행보는 그의 4번째 싱글 앨범 <넵넵(ME TIME)>이다. 유빈은 앨범 발매를 코앞에 두고 “설레기도 하고, 감회가 남다르다”며 눈을 반짝였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손길이 닿은 게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감회가 남달라요. 성적에 대한 기대나 목표치는 안 두려고 하고 있어요. 최대한 자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즐기자는 마음이고, 제 목표는 꾸준히 계속 하자는 거니까 즐겁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대형 기획사 떠나 혼자 힘으로 앨범 제작
기실 원더걸스가 ‘온실 속 화초’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대형 기획사라는 큰 울타리를 떠나 오롯이 자기만의 보금자리에서 혼자 힘으로 만든 앨범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를 터다.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되면서, ‘아 그동안 내가 정말 좋은 회사, 큰 회사, 체계적인 시스템 안에서 많은 걸 도움 받았구나’ 체감을 많이 했어요. 하나하나 배워가는 지금의 과정이 힘들기도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고요, 좋은 분들 만난 덕분에 조언도 많이 얻었어요.”
기존 소속사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소속사를 세우기까지 고민도 적지 않았다고. 유빈은 “다른 회사에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물론 했었다. 하지만 워낙 JYP가 좋은 회사이기도 했고, 다른 회사도 좋겠지만 회사에 속한 아티스트로 해나간다는 점에선 왠지 비슷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유빈은 스스로 “안주하는 느낌”을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지금 이렇게 회사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도, 계속 안전한 곳에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니까 제가 안주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두렵지만 힘들어도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저지른거죠.(웃음) 당연히 다른 회사에 가서 좋은 케어도 받고 싶고 마음 편히 있고도 싶지만, 지금 아니면 못 할 것 같았어요.”
스스로 도전정신이 강하다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걸 좋아한다”는 유빈은 “회사의 소소한 일들을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다. 매일 재무재표가 올라오는 걸 보는 것도 신기하다”고 재잘거렸다.
소속 아티스트의 삶을 벗어난 현재의 만족도는 ‘매우높음’이다. 유빈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의사결정 과정에 내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장점이 있고, 전에는 몰랐던 부분을 알아간다는 점에서 스스로 발전하는 느낌에 셀프 만족감이 높다”며 웃어 보였다. 철저한 홀로서기지만 그렇다고 기존 소속팀인 원더걸스나 걸그룹 이미지를 벗어나겠다는 건 아니라고.
“많은 분들이 유빈을 떠올릴 때 원더걸스를 많이 떠올려주시니까, 그 이미지와의 굿바이는 아니에요. 약간 뭐랄까… 부모님 곁을 떠나 처음으로 자취하는 느낌의 홀로서기? 그런 느낌이 맞는 것 같아요.”
사명 르엔터테인먼트의 영문명 속 rrr은 ‘real recognize real’의 약자로,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는 의미다. “회사 이름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 이니셜로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나만의 회사인 느낌이 싫었거든요. 모두가 같이 노는 동아리 같은 회사였으면 좋겠는데, 제 이니셜이 들어가버리면 왠지 내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 싫었죠.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평소 좋아하던 힙합 랩 구절 ‘real recognize real’이 떠올랐어요. 진짜(멋진 사람)를 찾고 서로가 진짜인 것을 알고, 찾아가는 게 좋겠다는 의미를 담게 됐는데, 이걸 다 쓰자니 너무 길고. 그러다 또 찾아보니 혀를 굴려 발음하는 ‘르’가 있더라고요. 여러 후보군 중 르엔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는 의견이 많아 결정하게 됐어요.”
완벽하게 새로운 출발선에 선 유빈이 내놓은 신곡 ‘넵넵’은 ‘네’라고 하기엔 왠지 눈치가 보이는 사람들, 이른바 ‘넵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위로 송이다. 마림바 소스로 시작하는 테마와 훅(HOOK) 부분 피아노 테마들이 귀를 사로잡고, 구간마다 장르적인 다양성이 엿보이는 이지리스닝 힙합 곡이다.
‘넵넵’은 2018년 6월 솔로 데뷔 앨범 <도시여자>와 타이틀곡 ‘숙녀’를 선보인 데 이어 ‘땡큐 쏘 머치(Thank U Soooo Much)’, ‘무성영화’까지 이어진 유빈의 솔로곡과 장르적으로 결이 다른 느낌이지만 유빈은 “곡마다 현재의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곡이었다”며 이번 ‘넵넵’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그동안의 접근 방식과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그 때 당시 좋아하는 장르, 음악, 콘셉트를 늘 느끼려 했었고, ‘숙녀’나 ‘무성영화’ 그리고 이번 ‘넵넵’도 현재 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곡인 것 같아요. 가사도 그런 부분을 많이 표현하려 노력했어요. 요즘 카톡으로 넵넵을 많이 하는 걸 느끼고 있는데, 퇴근할 때의 기쁨이나 자유의 기쁨이랄까요? 현재 저를 가장 잘 표현하고, 제가 공감하는 내용을 담은 곡이에요.”
▶트렌디한 느낌의 새 노래로 대중과 공감
기존 발표곡들이 레트로 이미지가 강했던 데 반해 ‘넵넵’이 트렌디한 느낌이 전면에 내세워진 데 대해서는 “이젠 레트로가 트렌디 같다. 뉴트로라는 말도 있듯이, 약간 탑골 느낌 나는 것들도 트렌디하게 받아주시는 시대가 됐다”면서 “앞으로도 레트로나 트렌디로 선을 긋고 싶지 않고 그때마다 대중과 공유하고 싶은 감성을 표현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넵넵’은 곡의 부제 ‘미 타임(ME TIME)’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의미를 보다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me time’은 자기만의 시간, 오직 자기만을 위한 휴식시간 혹은 발전의 시간을 내포한 단어예요. “넵넵” 하면서 회사에서 서로 같이 소통하고 있지만 누구나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드디어 내 시간이다, 자유다’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싶어서 부제로 세우게 됐죠.”
CEO가 됐지만 유빈 스스로도 ‘넵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도 했다. 그는 “지금도 (‘넵병’이)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엔 모르다 최근 깨달았죠. 전에는 ‘넵’이라는 말을 잘 안 썼던 것 같은데, 요즘은 회사 단톡방에서 제가 진짜 ‘넵’을 많이 쓰고 있구나 하는 걸 느껴요. 나도 넵병이 있구나 싶었죠. 예전엔 ‘넹’ ‘네~’ ‘넴’ 이런 표현을 많이 썼는데 지금은 ‘넵’을 참 많이 쓰고 있죠. 아주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죠 하하.”
뮤직비디오는 전에 없이 발랄하고 컬러풀하다. 지난 10여 년 활동 과정에서 ‘걸크러시’ 이미지가 강했던 유빈이지만 이번 ‘넵넵’ 뮤직비디오에선 그 어느 때보다 귀여운 여인으로 변신했다. 이 같은 반응에 유빈은 “귀엽다는 말은 데뷔 이후 처음 들어봤다”며 눈을 반짝였다.
“걸크러시도 봐주시는 분들이 붙여주신 수식어였는데, 이번에도 보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저를 표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시엔 아무래도 ‘언프리티 랩스타’에서의 멋있는 모습 때문에 걸크러시라고 해주셨는데, 이번 노래는 재미있고 자유분방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담았으니까, 걸크러시를 지우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또 다른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서른세 살에 귀엽다는 말을 듣기 어려운데 처음 들었네요(웃음).”
원더걸스 멤버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멤버들은 다들 ‘저 같다’고 얘기해줬어요. ‘유빈 언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인 것 같다’ ‘정말 유빈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멋있다는 응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원더걸스 멤버들 “유빈스럽다” 반응
박진영(JYP)의 코멘트는 아직 받지 못했단다. 유빈은 “뭔가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학생의 욕구랄까요? 이번엔 왠지 짠 하고 보여드리고 싶어서 완곡을 들려드리진 않았어요. 그동안 많은 피드백을 해주셨기 때문에 저도 스스로 앨범을 낼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박진영은 홀로 날아오를 유빈에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유빈으로서 그런 박진영은 그저 감사할 뿐이다.
“PD님께는 정말 감사하죠.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게 PD님 덕분이니까요. 아티스트로서 회사를 꾸리는 것 자체도, 곡을 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걸 옆에서 계속 가르쳐주셔서 할 수 있었고, 가사에 ‘유기농집밥’도 나오는데, (JYP 구내식당에서) 유기농 식단을 맛있게 먹어서 건강하고요.(웃음)”
홀로서기라는 결심을 밝혔을 때, 박진영의 반응은 어땠을까. 유빈은 “큰 용기라고 해주셨다. 쉬운 일이 아닌데, 정말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아티스트로서 나가서 회사를 설립한 사람이 몇 명 없었다 보니 신기하다고도 해주셨어요. 걱정도 많이 해주셨고, 모르는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고 해주셨죠. 저는 좋은 멘토가 있는 행운아예요.”
현 소속사에는 원더걸스 여정을 같이한 혜림도 함께한다. 혜림은 유빈 영입 1호 아티스트다.
“제가 먼저 혜림이에게 제안했어요. 혜림이는 다른 회사에 가도 케어 받을 수 있는 친구지만, 다른 회사에서 잘 해줄지언정 저만큼 혜림이를 잘 아는 곳은 없을 것 같다는 혼자만의 자신감에 혜림이에게 얘기를 했는데,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좀 더 고민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는데, 꼭 24시간 뒤에 함께하겠다고 답을 주더라고요. 고마웠죠.”
유빈은 ‘원더걸스 혜림’으로 활동하느라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혜림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겠다고 했다. 그는 “사실 혜림이는 원더걸스로서 팀에 충실했기 때문에 본인 색을 많이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미안함이 크다”며 “내가 잘 보여주고 싶어서 영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솔로 아티스트 유빈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가수 유빈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원더걸스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종의 ‘황금기’다. 유빈은 “운이 좋았던 것이다. 다른 회사에 있다가 ‘텔미’ 때 원더걸스에 합류하게 된 것도 행운이었고, 이후 미국 진출도, 솔로 활동도, 다양한 걸 해볼 수 있었던 것도, 모든 게 복”이라고 했다.
“원더걸스가 빛날 수 있었던 건, PD님이 좋은 곡을 써주시고, 회사의 좋은 분들이 서포트해주시고, 재능 있는 멤버들을 만난 덕분이죠. 모든 게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2009년, 당시 K팝 불모지였던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는 ‘노바디’로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HOT 100’에 76위로 진입하며 K팝 역사에 한 획을 긋기도 했다. 지금은 K팝 아이돌 그룹의 해외 진출은 일반적인 행보지만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기를 떠올리면 남다른 소회도 있을 터.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처음엔 ‘아 우리가 고생을 했지’라는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그냥 K팝이 발전하는 과정에서의 당연한 흐름이더라고요. 인터넷이 발전하고 글로벌화된 흐름에서 K팝이 이렇게 성장한 것이지, 그때 우리가 열심히 해서, 우리가 (길을) 닦아놔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은 때가 되어 알려진 거죠. 예전엔 잠깐 착각했었어요 (웃음).”
2020년, 지금 이 시기를 훗날 바라보면 어떤 마음이 들까. 유빈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그때 참 고군분투했지, 발로 열심히 뛰었지 할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회사를 설립하는 게 막연한 꿈이었는데, 솔직히 이렇게 빨리, 서른세 살에 차리게 될 줄은 몰랐다”며 눈을 반짝인 유빈. CEO로서의 향후 비전은 “분야·장르 가리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며 시너지를 내는 회사를 꿈꾼다”고 했다.
언젠가 그 자신이 걸어왔던 길처럼 “걸그룹을 키우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너무 멋진 그룹이 많잖아요. 마마무도 너무 멋있고, (여자)아이들도 멋있고. 요즘은 오마이걸이 너무 좋아 제가 덕질을 하고 있는데 (웃음), 걸그룹을 (제작)해보고 싶기는 해요. 멤버 개개인의 개성이 뚜렷한 팀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꼭 만들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