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패션위크를 운영하는 서울시 산하 서울디자인재단은 올 가을 행사부터 총감독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패션전문가를 총감독으로 선임해 행사 전체의 기획과 운영을 총괄하게 한다는 것. 2년 임기의 초대 총감독에는 정구호 패션디자이너(53)가 위촉됐다. 새로운 변화를 이끌 정구호 총감독을 만났다.
정구호 총감독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책임질 일이 많은 자리여서 고민을 많이 했고 여러 차례 수락을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패션위크 일이 누가 하든 해야 하고, 또 잘해야 하는 동시에 무엇보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일이기에 맡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정 총감독은 서울패션위크를 이끌 인물로 일찌감치 거론돼 왔다. 그의 이력이 본인의 이름을 딴 ‘구호’여성복을 만든 데 그치지 않고, ‘쌈지’대표이사와 국내 굴지의 패션 대기업 제일모직에서 10년째 여성복 사업부를 맡아오면서 전문 경영분야에까지 걸쳐 있어서다. 제일모직 재직 시절 회사 지원을 받아 뉴욕 패션위크와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진출해 세계적 수준의 패션 무대를 경험해본 것도 그가 지닌 장점이다.
정 총감독은 자리 수락 후 첫 작업으로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할 디자이너 선정 작업에 변화의 칼을 댔다. 기존과는 다른 심사기준을 적용키로 한 것. 그동안 서울컬렉션은 정량평가 70%와 정성평가 30%로 디자이너 심사를 진행, 디자인 능력보다는 매출 실적이 심사의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정 총감독은 정량평가를 40%로 대폭 낮추고 대신 정성평가를 60% 비율로 변경했다.
새로운 참가기준이 신진을 뽑는 제너레이션 넥스트의 참가기준(정량평가 30%와 정성평가 70%)과 큰 차이가 없어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는 이에 대해 “디자인 감각이나 창의성, 가능성을 충분히 갖췄지만 아직까지 발전을 못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더 많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며 “정성평가 비중이 늘어난 만큼 심사위원은 해외 심사위원 3명을 비롯해 패션계 최고의 권위와 심미안을 갖춘 10명으로 구성해 공정한 심사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정구호 총감독의 빠르고 과감한 행보에 패션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원로·중진 디자이너들이 속해 있는 연륜 있는 디자이너 단체들이 건재함에도 미리 의견을 수렴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아 여기저기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는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디자이너들과 계속 소통하겠지만 변화를 위한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비난들은 감수해나갈 각오입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심사기준 변경과 함께 참가자격을 한층 복잡하고 까다롭게 만들고 참가비도 대폭 인상하는 파격적 조치를 단행했다. 참가자격에 ‘디자이너가 사업자의 대표이거나 공동대표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항목을 포함시켰고, 참가비는 그동안 실제 비용의 10분의 1 수준(250만원)을 냈던 데서 실비의 3분의 1수준으로 올렸다. 정 총감독은 “참가자격 조건에 사업자 대표 항목을 넣은 것은 어려운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디자인과 사업을 이끌어가는 디자이너를 지원해 자생력을 키우겠다는 의미”라며 “참가비 인상은 서울패션위크가 서울시에서 지원을 해주는 만큼 디자이너도 본인 몫을 책임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조치이며 그래야 이 행사를 더 전문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서울패션위크에선 뉴욕패션위크를 벤치마킹해 ‘디자이너 어워드’를 신설했다. 서울컬렉션과 신진디자이너 행사인 제너레이션 넥스트에 참가한 디자이너 중 심사점수 최고 득점을 받은 사람에게 각 ‘올해의 디자이너’, ‘올해의 신진디자이너’상을 수여할 예정이다.
2015FW STEVE J YONI P
한국적 문화와 창의성 배어 있는 디자인 나와야
세계 패션계에서 ‘코리아 커넥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의 글로벌 인재들이 해외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급 글로벌 디자이너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정 감독은 한국적 문화를 녹여내고 한국만의 창의성이 배어 있는 디자인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나와야 된다고 강조한다.
정구호 총감독은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면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가 들어간 창의적 디자인이 관건입니다. 창의성은 어려운 문제지만 이것을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나라가 패션 디자인 강국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고 강조한다.
한국적인 디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자국의 문화유산과 전통예술을 녹여내는 디자이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국의 문화를 녹여내지 않는 디자이너가 훌륭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디자이너의 성향이자 선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국의 디자이너라고 해서 한국적 디자인의 모티브에 반드시 영향을 받을 필요나 책임은 없는 것이지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수도 없이 많은 디자인들이 만들어지고 또 사장되는 경쟁 속에서의 차별성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디자이너 내면에 자리한 독특한 차별성이 자국 문화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것임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패션디자인은 불가피하게 세일즈(영업)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순수예술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정 총감독은 세일즈가 이루어지지 않는 디자인은 그 어떤 좋은 디자인이라도 디자인 기능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고 강조한다. 패션은 소비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업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미학적으로 훌륭한 디자인이라고 해도 대중과의 소통인 세일즈가 충분히 돼야 하는 숙제가 있다는 것. 그는 “사실 디자인업을 한다는 것은 실제 비즈니스로써, 뭔가를 생산하고 영업을 하고 이윤을 내고 그것을 다시 생산에 투자해야 하는 끝없는 순환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심미성과 상품성 사이의 균형이 중요한 것입니다”고 말했다.
패션은 공(公) 인테리어·요리는 사(私)
정구호 총감독처럼 다재다능한 사람도 드물다. 어릴 적부터 일찌감치 미술에 재능을 보였지만 ‘환쟁이는 안 된다’는 보수적인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어 미국서 경영학을 전공하겠다며 유학을 떠나 광고미술을 공부했다. 이후 옷에 대한 관심이 생겨 뉴욕의 유명 패션스쿨인 파슨스를 다녔다. 그 와중에 뉴욕서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한 그는 체계적인 공부를 위해 유명 요리학교인 르꼬르동블루(시드니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는 “저에게 옷은 공(公)이고 음식은 사(私)입니다. 원래부터 옷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되다보니 힘들게 된 거죠. 그래서 쉴 때에는 다른 관심사인 음식과 인테리어에 빠져 지내는 겁니다. 저는 즐기는 건데 무언가 할 때는 외곬수로 빠지는 성향이 있어 남들 눈에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고 전했다. 그에게 옷을 제외한 다른 활동들은 휴식이고 힐링인 셈이다. 실제 그는 제일모직을 나온 이후 현대무용극인 ‘단’, ‘묵향’ 등을 연출하면서 문화적 외도(?)를 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2015FW ORDINARY PEOPLE
총감독이 아닌 패션디자이너 ‘정구호’에게 옷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그는 “제가 추구하는 스타일을 굳이 한마디로 말한다면 저는 구조적인 옷을 좋아합니다. 색깔, 디테일, 장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옷이 갖고 있는 구조가 중요합니다. 인테리어보다 건축, 즉 뼈대가 중요하듯이 구조적인 강점을 갖고 있는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같은 경우 옷의 패턴연구가 1순위이고 패턴을 연구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합니다”고 설명했다. 한편 정구호 총감독은 얼마 전 휠라코리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기도 했다. 그는 “휠라가 히스토리와 확고한 정체성을 지닌 잠재력 있는 브랜드라 리뉴얼 작업을 거치면 신선한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며 “추동 시즌부터 새로운 휠라를 기대해달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김지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