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의 화가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 | 돌아가신 분들이 내 손에 부활하니 기쁘죠
입력 : 2015.03.06 16:13:15
수정 : 2015.03.09 09:57:25
화가 일랑 이종상은 동서양의 경계를 뛰어넘었고 고금의 시간마저 넘나들고 있다. 겸재의 진경을 계승했는가 하면 고구려 벽화까지 현대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마지막 화원의 계보를 이어 영정을 그려온 그는 남들은 하나도 그리기 어려운 화폐를 둘씩이나 그렸고 세계 최초의 독도 화가이기도 하다. 그가 지금 성화에 몰두해 있다.
이종상 화가와 함께 찾은 파주 작업실엔 1천호는 됨직한 성화들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신리성지 성당에 들어갈 순교기록화라고 했다. 2년째 해오고 있지만 할 게 너무 많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화를 그리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나는 화가지만 과학을 공부했기에 예전엔 무신론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딸의 장례식 날 일어난 이적이 나를 가톨릭으로 이끌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잃고 종교에 귀의한 그는 이후 많은 종교적 작품들을 쏟아냈지만 특히 신리성지 성당에 들어갈 성화에 그 어떤 작품보다도 큰 공력을 쏟고 있다.
고산 영정 그린 뒤 순교화 작업
“몇 해 전 고산 윤선도의 영정을 그렸다. 고산의 후손 중엔 화가가 여럿 있는데 이상하게 영정이 없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공제 윤두서는 고산의 증손자다.) 영정을 그릴 때면 나는 신접하는 지경까지 간다. 그렇지 않으면 붓을 들지 않는다. 그게 힘들어 “파묘를 해서 부모의 골상을 보여줄 수 있냐”고까지 했는데도 문중에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래서 고산의 부모와 형의 골상을 바탕으로 3D 컴퓨터를 돌려 고산의 얼굴 형상을 그렸다. 거기에 고산의 인품까지 반영하려고 향 피워놓고 그의 작품을 읽으며 빠져들었다. 영정은 그렇게 고인과 대화를 하면서 그린다. 그렇게 몰두하기에 영정을 그리고 나면 빠져나올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작가병이라고나 할까. 서울대병원 소아과와 산부인과 빼고는 다 간 것 같은데 누구도 무슨 병이라고 짚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살려주시면 ‘제가 그 일(신리성지 성당의 순교화)을 하겠나이다’라며 기도를 하니 나았다.”
신리 성당은 김원 건축가(광장건축환경연구소 대표)에게 부탁해 미술관을 세운 뒤 거기에 걸 벽화를 이 화백에게 의뢰했다. 그는 성화가 갖는 특별한 의미를 설명했다.
“신라는 불교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석굴암 같은 걸작을 남겼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지 200년이 넘은 가톨릭은 어떤 유산을 남겼나. 선배들은 무얼 했냐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성화는 우선 역사성이 있어야 한다. 몇 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둘째로 종교성이 필요하다. 엄밀한 종교적 고증을 거쳐야 한다. 셋째 예술성이 있어야 한다. 넷째 돌아가신 분들을 알아야 한다. 다섯째로 보존성도 필수다.”
보통 화가들이 보수도 받지 않고 그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는 이제 겨우 역사 공부를 끝내고 종교적으로 들어가는 단계라고 했으나 사실 밑그림은 거의 완성했다. 그는 특히 이들 작품에 한국 최고의 보존성을 부여하겠다고 했다.
“고구려 벽화는 물구덩이 속에서 천년이 넘도록 끄떡 없이 버텼다. 나도 (이 순교화를) 물구덩이 속에서도 견딜 수 있게 그리려고 한다. 보존성을 갖추려고 과학기술을 총동원하고 있다.”
그는 성화의 특성을 살리려고 밑그림조차 직접 깎은 종려나무 목필로 그렸다. 작업실엔 ‘일랑 요셉 순교 기록화 종려목필로’라고 적어놓았다.
동서양 넘나드는 화가
이종상은 원래 서양 그림을 배우려고 서울미대에 들어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철학도 미에 대한 교육도 없을 때”다. 그러나 서구 사대주의에 빠져드는 것 같아 눈썹 밀고 동양화로 돌아섰다. 그가 동서양화를 넘나드는 이유다. 이종상은 그렇게 월전 장우성의 서울대 마지막 제자가 됐다. 월전은 그가 2학년 때 과제만 내주고 홍대로 옮겼다. 그는 “예술원 회원이 된 뒤 찾아가니 월전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반겼다”고 전했다.
동양화로 전공을 옮겼지만 그는 남들처럼 사군자나 그리는 데서 머물지 않았다.
“서울대서 영정은 가르치지 않았다. 조사해 보니 순종 어진을 그린 마지막 화원이 살아 계셨다. 이당 김은호 선생을 찾아가니 선생께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우리 집에 서울대생이 왔다”고 반겼다. (이당이 만든) 후소회 제자들이 월사금 내고 배울 때였는데 나에겐 월사금 내지 말고 잠깐잠깐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
한 눈에 그의 자질을 알아본 이당이 제자로 삼은 것이다. 이종상은 후소회 얘기를 통해 한국 영정과 서양 초상화의 차이를 설명했다.
“<논어>에 ‘예술이 뭐냐’고 자하가 물으니 공자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고 했다. 인품이 된 이후에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뜻이다. 후소회란 이름은 거기서 나왔다.”
그의 은사들은 10년 정도 위인데 그분들을 가르친 분들이 월전과 운보(김기창) 현초(이유태)라고 했다. 스승의 스승들 모두가 후소회 출신이란 것. 이당이 그들의 스승이니 일랑은 스승을 넘어 스승의 스승의 스승을 사사한 셈이다.
일랑은 한국 영정기법은 고흐 그림보다 운동감이 훨씬 뛰어나다고 했다.
“대학에서 예용 해부학(미술 해부학)을 배웠다. 예용 해부학에선 인품을 담기 위해 점묘법을 쓴다. 그 점묘법까지 배웠는지라 이당이 내는 과제를 서양 점묘법으로 해 갔더니 선생께서 ‘이런 것은 중국에도 있다’며 ‘인품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물으셨다. 마음속에서 나온다고 하니 그림도 속에서(천의 뒷면에) 그리라고 하셨다. 어진은 피부를 벗겨내고 안윤근과 하악근, 미간근 등을 강조해 인품을 드러내는데 그러려면 그 분의 평소 생각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닮고자 하는 분의 인품이 속에서부터 드러나도록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초상과 영정의 차이다.”
그가 그린 영정이 실제 그런지를 보려고 해남에 다녀왔다. 고산유물전시관에서 고산의 영정을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얼굴이 시시각각 움직이는 듯했다. 떨어져서 볼 땐 무거운 인상이 다가갈수록 온화하게 보였다.
두 가지 돈을 그리다
이당의 영정기법을 전수받은 일랑은 5000원권(율곡)과 5만원권(신사임당)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화폐는 살 날이 많지 않은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그리게 한다. 화폐를 찍었는데 저작권을 가진 화가의 신분에 이상이 생기면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기 때문이다. 1만원권 그린 운보나 1000원권 그린 현초도 얼마 안 돼서 돌아가신 게 대표적이다. 100원짜리 동전의 충무공을 그린 월전은 20여 년 쓰시다 가셨다. 그런데 나는 첫 번째 그린 돈을 40년 가까이 쓰고 있다.”
그는 이당이 율곡과 사임당 모자의 영정을 그렸기에 사실 5000원권은 당연히 이당이 그려야 했다고 밝혔다.
“화폐 그림은 위조 가능성 때문에 정면에서 그린 것은 안 된다. 이당이 율곡을 그렸지만 모자를 함께 그리느라 정면으로 그렸다. 게다가 이당은 와병 중이었다. 그래서 나를 추천했는데 (한은이) 젊어서 안 된다며 다른 교수를 선정했고 그가 찍은 사진을 런던으로 보냈다. 당시엔 국내에선 고액권 찍을 기술이 없어 런던서 찍어왔다. 그렇게 찍어온 첫 번째 5000원권은 완전히 서양인 모습이었다. 난리가 났다. 그래서 다시 찍게 됐고 내가 화가로 선정됐다. 와병 중인 이당을 극비리에 찾아다니며 자문을 받아 완성했다.”
세계 첫 번째 독도 화가
일랑은 대학 졸업 직후 국전 추천작가가 됐고 30대 초반엔 이미 국전 심사위원에 올랐다. 그런 그가 화가로선 처음으로 독도로 들어갔고 최초의 독도운동가가 됐다. “독도를 그리기로 결정한 뒤 혹시 진경산수를 그린 겸재가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당시 최순우 국립박물관장을 찾아가 다른 작가가 그린 게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최 관장은 “없을 것”이라면서 학예사들을 동원해 3개월 동안 박물관을 뒤졌다. 한국엔 독도 작가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치안본부에 독도 입도 신청을 했다. 허가를 받고 나니 일본을 조사하지 않은 게 걸렸다. 다시 최 관장을 찾아가 일본서 다케시마 그린 판화 같은 게 있는지 조사해달라고 했다. 단순히 그림 하나 그리려는 게 아니라 지도의 어버이 격인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렇게 이종상은 최초의 독도화가가 됐고 1977년 ‘독도 진경전’을 열었다.
“전시회에 ‘진경전’이란 이름을 붙이니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다. 왜 개인전에 케케묵은 조선시대 진경을 붙이냐는 것이었다. 개인전 하면서 학술발표란 생각은 하지 못할 때였다. 그림의 주제도 없어 ‘무제’라고 하거나 그저 ‘여인’이나 ‘산’, ‘인물’, ‘정물’ 같은 걸 달 때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대선배이자 스승이기도 한 분에게 반론을 폈다. ‘겸재의 작품은 양식이 돼서 박물관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 분의 생각은 우리가 영원히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것 같다.”
당시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5년 뒤 가수 정광태가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뒤 그의 주가도 치솟았다. 그 인연으로 지금도 정광태 씨와는 자주 만난다고 했다. 그는 독도를 그린 데서 그치지 않고 이를 문화운동으로 이어갔다. 정부가 세계에 뿌린 책에도 그의 그림 ‘Dokdo’가 들어갔다. 당시 북한 영웅작가이던 선우영 씨까지 불러 함께 독도운동을 했다.
북한도 인정한 벽화 전문가
이종상은 고구려 벽화를 연구한 세계적 벽화 전문가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고구려 정신을 연구했다. 극단적 분단시대라 함부로 그곳 연구를 하지 못할 때였다. 우리 문화의 원류는 그곳에 있었지만 공부는커녕 연구도 마음대로 못했다. 교과서에 수렵도 쌍영총이 나오지만 누구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1960년대에 그걸 예찬했다. 한국민족문화논총에 <고대벽화의 사적고찰과 신벽화의 재료 및 기법에 관한 연구>란 제목으로 논문도 썼다. 고구려 문화유산의 대부분은 중국에 있고 나머지는 북한에 있어서 제대로 연구조차 할 수 없을 때였으나 고구려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는 북쪽을 연구하면 잡혀가기 일쑤였다고 했다. “남들은 돈 준다고 해도 안했다. 나도 남영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거기서 무혐의 처분을 받자 이후엔 자유롭게 고구려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 했다.”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자 그는 재빨리 중국으로 들어가 그곳의 고구려 고분 대부분을 조사했다. 그뿐 아니라 알타미라를 포함해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세계의 동굴벽화를 모두 연구했다. 둔황 벽화를 연구한 뒤 둔황벽화보존회까지 만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다른 지역 동굴벽화와 고구려 벽화의 차이를 발견했다. 다른 곳의 벽화는 대부분 매우 건조한 곳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졌지만 고구려 벽화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동굴에서 수천 년을 버텨낼 수 있는 독자 기법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선조들의 기법이 뛰어나다는 것. 그걸 알기에 그는 ‘고구려 문화 지키기’ 운동과 ‘독도문화 심기’ 운동을 이끌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나서기 훨씬 전부터다. 지금 거기엔 원로 화가 60여 명이 문화의병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예술원 회원도 있다. 그래서인지 북한도 그를 주시했다.
“1999년 8월 말 아태평화위원장이 나를 초청했다. 서울대 교수로는 처음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이 강서대묘 등 북한 내 고구려 고분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서두르는 중이었다. 그 전에 일본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그들은 연구한다며 유물만 계속 가져가고 아무 해답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내가 고구려 벽화 재료기법을 연구한 걸 알았던 것 같다.”
이종상은 돌아와서 북한이 필요로 했던 것들을 당국에 전했지만 공무원들이 묵살해버려 관계가 이어지질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어쨌든 이종상은 ‘원형상’ 시리즈로 우리 고유의 정신을 표현해왔다.
1997년엔 프랑스 루브르궁 초청 전시회에서 프랑스의 강화도 침략을 비판한 「源形象 97061-마리산」이란 대형 설치작품으로 프랑스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높이 6m에 가로 71.3m나 되는 이 작품은 미테랑 전 대통령까지 와서 관람했을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2008년엔 전남 벌교 태백산맥문학관에 높이 8m, 가로 81m나 되는 세계 최대 옹석 벽화인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을 세우기도 했다.
이종상과 고 이병철 회장
어진을 그린 마지막 화원의 맥을 이은 이종상은 율곡이나 사임당, 고산은 물론이고 광개토대왕, 우륵, 원효대사, 김홍도, 장보고(이상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등 많은 영정 작품을 남겼다. 그 인연으로 <서편제>에선 빛을 보지 못한 임권택 감독을 도와 오원 장승업을 다룬 영화 <취화선>으로 칸느에서 감독상을 받게 했다.
그렇지만 진짜 큰 인연은 삼성그룹을 창업한 호암 이병철과의 사이에 이어졌다고 했다.
“스물일곱 살 때 이병철 씨 앞에서 ‘경영과 예술’을 주제로 강의를 했다. 이병철 씨는 “혼자 듣기 아깝데이…”라며 전경련 강의로 불렀다. 당시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 대그룹 오너 열두 분이 모였다.”
그를 아낀 이 회장은 그에게 많은 작품을 맡겼다. 태평로 옛 삼성본관 로비에 붙은 국내 최대 암각대벽화인 「長生」(5m×52m ; 1983)도 그의 작품이다.
“삼성본관 작업을 할 때 이병철 회장께서 식사나 하자고 부르셔서 올라갔다. 이 회장께서 부르셨으니 대단한 음식이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국수를 말아줬다. 아마 이 회장과 한 자리에서 국수 먹은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이 회장은 그만큼 소박하셨다. 그래서 더욱 훌륭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호암이 해준 얘기 한 토막을 전했다.
“이 회장께서 “사람들은 나를 보면 돈 많이 벌었다는데 나는 돈을 번 적은 단 한 번도 없네. 단지 좋은 인재들을 모았을 뿐이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더욱 그분을 존경하게 됐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됐다. 나를 한은에 추천한 이당 선생도 “너는 화폐를 그렸으니 돈을 돌보듯 하라”고 하셨는데 두 분 생각이 통하는 것 같다.”
불암산 기슭에 살던 그는 화폐 그림을 그린 뒤 돈 벌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대작을 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종상 화가 충남 예산생으로 대전고, 서울대 미대를 나왔고 동국대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과학자인 선친은 한 때 ‘삼천리 전구’를 만들 정도로 사업가로서도 앞서 나갔으나 해방 직후 북한의 단전으로 파탄을 맞았다. 워낙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부친의 작고와 한국전쟁의 고난 속에 낙향해 엿장수까지 하며 살았지만 그림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자질을 아낀 모친의 정성으로 대학에 진학한 그는 대학 졸업 직후 국선 추천작가가 됐고 30대에 심사위원까지 올랐다. 서울대 교수,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장, 서울대 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예술원 회원이며 서울대 명예교수, 상명대 석좌교수로서 한국벽화연구소장 등을 맡고 있다. 국내 주요 미술관은 물론이고 대법원 청사 등 다수의 대형 건물에 그의 작품이 걸려 있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