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통화버튼을 누르니 전화기 너머로 생소한 통화 연결음이 들려온다. 평소에 쉽게 듣기 힘든 ‘각 잡힌’ 이 노래는 해군가였다. 남태평양의 외딴섬, 남아메리카의 오지를 헤치며 원주민들과 살을 맞대고 25년 넘게 자원개발에 힘썼던 ‘정글의 꽃할배’ 권주혁 동원산업 상임고문(전 이건산업 사장)은 통화 연결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권 고문은 ‘해군가’의 느낌이 제대로 풍기는 사람이었다. 훤칠한 키의 은발의 신사는 청량감 넘치는 화법으로 확실히 흡입력을 가진 호인이었다.
20년 넘게 계속된 ‘정글의 법칙’
“처음에는 솔로몬제도가 있는지도 잘 몰랐어요.(웃음) 그저 파푸아뉴기니 근방에 있는 지역인지라 가서 나무 구매를 할 요량으로 출장을 떠난 것이 시작이었죠.”
서울대학교 임산가공학과를 졸업한 권 고문은 1977년 목재회사 이건산업에 입사하며 오지탐험을 시작했다. 입사 후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목재 관련 현지 시장조사를 위해 파푸아뉴기니의 불모로 열대삼림대학 유학생으로 선발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년간의 유학을 마친 후 목재수입을 위해 변방지역을 수소문해 당시에는 지금보다 생소했던 솔로몬제도로 출장을 떠났다. 1978년 영국에서 독립한 솔로몬제도는 1000여 개의 섬들이 퍼져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녀 ‘남태평양의 진주’라 불린다. 지난해 9월 인기 TV프로그램인 <정글의 법칙>에 등장해 원주민들의 생활상이 방영되며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권 고문은 워낙 험한 오지가 많아 관광객도 찾지 않는 솔로몬제도에 입성한 두 번째 한국인이다.
“임야 자원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접하고 솔로몬제도에 들어가 보니 비행기나 배로 접근이 가능한 지역은 영국·일본 회사들이 이미 선점했더라고요. 수도 호니아라에서 서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교통이나 통신이 불편한 초이셀 섬에 들어갔어요.”
제주도의 두 배 크기인 초이셀은 원주민들이 부족생활을 하며 채집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섬이었다. 권 고문은 마을과 마을 사이 유일한 교통수단인 카누를 타고 몇 시간씩 이동하며 낚시 줄을 던져 잡히는 고기로 끼니를 때우며 현지조사에 나섰다. 보통사람 같으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도망칠 만했지만 권 고문의 생각은 오히려 반대였다.
“막상 가보니 단순히 나무 몇 그루 가져다 팔 일이 아니더라고요. 아예 벌목사업을 시작하면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황금알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업을 시작하자고 본사에 강력하게 요청했는데 생각해보면 신입사원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투자하라고 했으니 다들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웃음) 다행히 당시 사장이었던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이 저한테 ‘자신 있냐?’ 묻기에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더니 ‘그럼 해봐라’고 단번에 허락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시작됐죠.”
2주 계획으로 출장을 떠났던 권 고문은 짐을 풀고 원주민들을 차례로 만나며 사업 내용을 설득하고 산림개발, 벌목권을 신청하며 목재 무역과 조림 등 사업 터전을 닦는 데 시간을 보냈다.
당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도 실패했지만 권 고문은 여러 우여곡절들을 겪으며 벌목사업을 정상궤도에 올렸다. 저렴한 값에 질 좋은 목재를 다량으로 확보하며 솔로몬제도의 벌목사업은 이건산업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수익성을 확인한 후에는 판을 더욱 크게 벌였다. 초이셀 섬에서 얻은 수익으로 뉴조지아 섬의 해안가에 여의도 90배에 달하는 부지를 구입해 직접 벌목사업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초이셀의 벌목사업은 이건사업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지 주민 되는 것’ 자원외교의 시작과 끝
2주로 계획된 출장은 20년을 훌쩍 넘기며 1년에 두 차례의 휴가를 제외하고 솔로몬제도에 투신했다.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할 동안 정글에서의 생활에 얼마나 해프닝이 많았을까? 담담한 어투로 대수롭지 않게 들려주는 오지에서의 생활상은 영화가 따로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군이 초이셀 섬의 원주민들을 데려다 강제노역을 시킨 전례가 있던 터라 어떤 마을에 들어서면 ‘당장 이 섬에서 나가라’는 위협을 해오는 통에 상당히 곤란했죠. 말라리아에도 몇 번 걸렸는데 한번은 체중이 20kg 이상 줄더라고요. 고통스럽기는 했는데 걱정할까봐 차마 회사에는 알릴 수가 없었어요.(웃음)”
솔로몬제도 현지인들이 가진 그에 대한 신망은 상당히 두텁다. 그가 털어놓은 비결은 함께 생활하며 쌓은 ‘정’이라고 밝혔다. 일례로 권 고문은 솔로몬제도에 ‘생선구이’를 최초 전파한 전도사다.
“함께 식사자리를 가지면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아 시냇물에 씻어서 코코넛 물에 섞어 대충 끓여 제게 자주 대접했어요. 100년 넘게 내려온 요리법이라는데 먹어보니 제 입맛에는 사실 비리더라고요. 하루 날을 잡아 장작불을 피우고 내장을 제거해 익혀먹는 한국식 생선구이를 해줬더니 상당히 좋아하더라고요. 지금도 많이들 먹을 겁니다.(웃음)”
현지 원주민들과의 스킨십에 강한 그는 자연보전을 위해 임야 조성에도 힘썼다. 베어낸 이상의 나무를 심고 가꾸며 자연훼손을 최소화하는 한편 원주민과 솔로몬제도의 재정에도 기여해 현지화와 ‘윈-윈’ 전략을 통해 장기적인 사업비전을 제시했다. 회사 차원에서 의료시설이 부족한 지역에 병원을 지어주는 등 봉사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권 고문은 현지 국회진출을 심각하게 제의받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공로를 인정받은 권 고문은 오는 4월 21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수여하는 대영제국 훈장(OBE)을 받게 된다. 이전 수상자로는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국내에서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있다. 산림과 어업 분야에 종사하면서 남태평양 영연방 국가들의 자원 개발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솔로몬제도의 수상과 총독 그리고 현지인들의 강력한 추천 결과라고 하니 현지에서의 권 고문의 신망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1970년대부터 세계의 목재자원 확보에 나섰던 권 고문은 이제 동원산업으로 자리를 옮겨 전 세계 바다를 대상으로 해양자원의 확보에 나서고 있다. 점점 치열해지는 글로벌 자원확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뛰고 있다는 그는 특히 해양자원의 보고인 남태평양 해양자원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고 했다.
자원외교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기에 민간사절단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해외자원 전문가로 인정받는 권 고문은 최근 몇 년간 정부의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정부주도로 자원외교를 추진하고 있으나 번번이 실패했어요. 특히 중국에게 여러 번 밀리고 있어요. 특히 2009년에만도 큰 규모의 자원확보 경쟁에서 여러 번 중국에 패배했죠. 해양자원에 있어서도 세계 해양자원의 보고인 남태평양 등에서 중국과의 경쟁은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중국은 값싼 공산품을 수출하던 나라에서 자본 수출국으로 급속히 변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중국과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므로 중국의 장점을 능가하도록 우리의 부족한 점을 보강해야 합니다.”
공격적으로 자원확보에 나서고 있는 중국과의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한 권 고문은 해외 자원개발의 주체는 철저히 민간 기업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원개발은 민간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정부의 고위직 공무원들이 외국의 고위층을 만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악수하는 사진 찍어서 가시적인 성과만을 홍보해서는 어렵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개발해야 하는 속성을 지닌 자원은 현지인 이상으로 능통하고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성공할 수 있는 만큼 지속적인 비전을 갖춘 민간 기업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학으로 인정받은 ‘전쟁학 전문가’
200개국 전쟁 기념지 방문이 목표
탁월한 추진력으로 해외 목재자원 개발에 성공 하면서 반평생을 보낸 권 고문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헨더슨 비행장>, <베시오 비행장>, <나잡 비행장>, <한국공군과 한국전쟁>, <기갑전으로 본 한국전쟁> 등 군사 관련 저서를 10여 권이나 가지고 있는 ‘전쟁학 전문가’다.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학원>이라는 월간지에 ‘피에 젖은 과달카날’이라는 전쟁 특집기사를 접하게 됐어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을 기록한 기사였는데 그때부터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됐습니다. 헨더슨 비행장, 테나루 강 이런 이야기가 흥미로웠는데 회사 일 때문에 헨더슨 비행장에 도착하니 마음이 설레서 이제는 죽어도 좋겠다 싶더라고요.(웃음)”
전쟁이야기가 나오자 권 고문의 눈이 더 빛나기 시작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사관학교 입학을 꿈꿨지만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권 고문은 입시와 여러 훈련 일정들이 주일에 치러지는 탓에 꿈을 접었다고 했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한 이후 학군단(ROTC)도 마찬가지였다.
“사관학교를 포기하고 학군단에 들어갔는데 주말에 교육이 계속 이뤄지더라고요. 회사 입사 시험들이 주일에 이뤄졌어요. 그런데 특이하게 이건산업은 그렇지 않았어요. 운명이다 싶었죠.”
권 고문이 전쟁학 전문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솔로몬제도에서의 주재원 생활에 있었다. TV도 없고 딱히 즐길 거리가 없었던 환경에서 그는 해가 지고 일을 멈추면 열정적인 학생으로 변했다. 원서 3500여 권을 포함해 5000여 권의 군사 서적을 수집하며 전쟁현장을 방문해가며 열정을 쏟았다. 필요한 경우 인터뷰를 위해 사람들을 만났다.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 2000명이 징용된 사실을 국내에서 최초로 밝혀낸 것도 그였다.
“우연찮게 영국 중앙은행 총재와 자리를 하게 됐는데 그가 미국 해병대 노병을 만났을 때 포로 심문을 하다보니 한국인이 제법 나오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날부터 미국 해병대 사령부에 편지를 보내고 일본군 지위관도 수배해가며 취재하고 문서를 확보한 끝에 알게 됐어요.”
2010년 이건산업 사장 자리를 내려놓으며 권 고문은 전 세계 전쟁 현장을 답사하며 학업에 열중할 계획을 짜놨다고 했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지금까지 95개국을 돌며 전쟁 현장, 식물관 등을 답사한 그는 잠시 멈추었지만 은퇴 후 200개국을 채우는 것이 목표이며 90대에도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은 꿈이라고 했다. 20~30대를 넘어서는 열정으로 끊임없는 목표를 수립하고 도전하는 모습은 가히 젊은 세대의 귀감이 될 만한 풍모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그에게 젊은 세대를 위해 한마디를 부탁했다.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힐링 서적들은 우리 젊은이들의 힘든 입장을 위로하고 다독거릴 수는 있지만 인생의 거친 세파를 극복하려는 각오와 결심을 하게 만드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환경적으로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유약한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내겠다는 의지와 ‘손에 흙 묻힐 각오’만 있다면 성공은 도처에 있습니다. 힘내세요!(웃음)” .
[박지훈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