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乙未年), 양의 해가 밝았다. 푸른 양, 청양(靑羊)의 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들춰보면 십이지(十二支) 중 여덟 번째 띠이자 미년생(未年生)인 양띠는 대체로 생각이 깊고 인정이 많으며 평화를 지향한다. 순수한 본성과 친절한 마음씨 덕분에 행운이 따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무리지어 공동체 생활을 하는 양들처럼 원만한 성격으로 다른 이들과 융화되기도 하고 내 욕심 챙기기보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아량도 지녔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고집을 쉬이 꺾진 않는다는 게 양띠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평이다.
올해는 한 가지가 더해져 푸른 양이다. 예부터 복을 기원하는 귀한 색이자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더해지며 을미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과연 2015년 대한민국 경제계를 이끌 기업의 수장 중 청양의 해를 주름 잡을 CEO는 누구일까. 어느 해보다 쟁쟁한 인물들이 출발선에 섰다.
1943년생 | 老將은 잊혀질 틈이 없다
올해 만 72세가 된 1943년생 기업인들은 세월을 잊은 듯 여전히 왕성한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다. 선두주자는 이명희 신세계 그룹 회장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막내딸인 그녀는 주식 가치만 놓고 보면 단연 한국 최고의 여성부자다. 지난해 11월 24일 기준 1조3916억5500만원에 달한다. 최근 신세계 그룹은 서울 청담동 일대의 신세계 타운 조성과 맥주사업 진출이 주목받고 있다. 청담동을 신세계 브랜드 타운으로 만들어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의 랜드마크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맥주사업은 지난해 11월 28일 서울 반포동에 ‘데블스도어’라는 수제 맥주 전문점을 개장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삼성가가 웬 술장사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허동수 GS칼텍스 회장도 양띠 기업인이다. 지난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8대 회장에 취임하며 그 어느 해보다 바쁜 연말연시를 보내고 있다. 옛 대우전자 시절 탱크주의로 유명세를 탄 배순훈 S&T중공업 회장은 ‘무보수 회장님’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방위산업제품과 자동차부품, 초정밀 공작기계를 생산하는 S&T중공업은 지난해 말 삼성테크윈과 996억원 규모의 K-9 자동변속기 양산사업 관련 계약을 하기도 했다.
자동차업계에선 이유일 쌍용자동차 사장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2009년 2월 청산 위기에 놓였던 쌍용자동차의 공동법정관리인으로 선임돼 처음 경영을 맡은 이 사장은 불과 5년여 만에 쌍용차를 정상 궤도에 올려놨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다시금 쌍용자동차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전체 수출물량의 약 30%를 러시아로 선적하던 쌍용자동차는 유럽과 중국 등 다른 시장을 모색하며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천신일 세중그룹 회장,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도 1943년생 양띠 기업인이다. 한편, 정동섭 동일제지 회장과 심정구 선광 명예회장은 84세(1931년생)의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1955년생 | 한국 경제를 이끄는 힘
애플의 스티브 잡스, MS의 빌 게이츠, 구글의 에릭 슈미츠가 미국을 대표하는 양띠 삼총사(1955년생)라면, 올해 환갑을 맞은 국내 기업인들의 면면은 별들의 전쟁이 떠오른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다. 우선 최근 두산인프라코어가 2007년 인수한 밥캣의 미국 내 상장 가능성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기업경영과 함께 경제4단체 중 하나인 대한상공회의소를 이끌며 정치권과 재계, 민심을 잇는 가교 역할에도 적극적이다. 동갑내기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서울상의 회장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 회장이 넷째 형인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1943년생)과 띠동갑이라면 GS家엔 허명수 GS건설 부회장이 사촌 형인 허동수 GS칼텍스 회장과 띠동갑이다. 허 부회장은 지난해 초 GS건설이 서울 청진동에 준공한 지상 24층, 지하 7층 규모의 사무용 빌딩 ‘그랑서울’로 업계에 화제를 낳았다. 허 부회장이 진두지휘한 1층의 식객촌 덕분인데, 문을 연 지 1년 남짓 된 지금도 주중에 건물 밖까지 줄이 늘어서는 건 예사요, 주말에도 찾는 이들로 북적이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식객촌은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 등장하는 맛집 중 9곳을 입점시킨 맛집촌이다. LS家에는 1955년생 동갑내기 사촌지간이 있다.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막내아들 구자철 예스코 회장과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둘째아들 구자용 E1 회장이 주인공이다. 이 밖에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화재 회장, 김호연 빙그레 회장, 우석형 신도리코 회장도 1955년생이다.
지난해 격동의 한 해를 보낸 식음료·유통업계에는 자타공인 업계의 강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돋보인다. 신 회장은 지난해 “불확실한 경영 환경에서 신사업을 개척하고 글로벌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통찰력이 필요하다”며 세계적인 석학을 초빙해 첫 ‘롯데그룹 CEO 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 자리엔 신 회장을 비롯해 롯데그룹 계열사 대표이사와 임원 등 약 100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선 리타 건터 맥그래스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지속성장을 위한 신사업 발굴과 글로벌 사업 전략’을 주제로 강연했다고 한다. 롯데그룹 내에선 황각규 롯데쇼핑 사장과 송용덕 호텔롯데 대표이사가 1955년생 CEO다.
최근 1년여 만에 100만원의 주가를 회복하며 다시금 황제주로 떠오른 오리온 그룹의 담철곤 회장도 양띠 기업인이다. 과자업계에선 해태제과가 내놓은 ‘허니버터칩’의 돌풍이 무섭다지만 국내 생감자칩 시장은 ‘포카칩’이 약 41%의 시장 점유율을 보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스윙칩’과 ‘눈을 감자’를 포함하면 생감자칩 시장의 약 61%가 오리온이다. 기업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량 삼양홀딩스 부회장, 장인수 오비맥주 부회장, 이해선 CJ제일제당 대표, 박성칠 동원F&B 대표도 양띠 기업인이다. 치킨 브랜드 BBQ로 유명한 윤홍근 제네시스BBQ 회장과 양희권 페리카나 회장도 동갑내기다.
세계 1위 명품 핸드백 제조업자개발생산(ODM)업체 시몬느를 이끌고 있는 박은관 회장도 올해가 기대되는 양띠 CEO다. 시몬느는 글로벌 명품 핸드백시장의 얼굴 없는 세계 챔피언이다. 버버리, 지방시, 마이클코어스, DKNY, 랄프로렌 등의 명품백이 시몬느에서 생산된다. 올해 박 회장은 자체 브랜드를 내놓을 계획이다. 부인의 생일인 9월 14일에서 영감을 얻어 브랜드명을 ‘0914’라 명명했다.
재계 서열 1위의 삼성그룹에선 김창수 삼성생명 사장이 주목받고 있다. 1982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지난 2011년부터 삼성화재 사장을 역임했고 지난해 취임 후 첫 해를 보냈다. 김 사장은 지난해 3분기에 보험업계 CEO 가운데 가장 많은 급여(총 8억5300만원)를 받기도 했다. 이상훈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사장)과 장원기 중국삼성 사장이 동갑이다. 그 밖에 주요 대기업의 CEO진을 살펴보면 LG그룹에는 LG디스플레이의 한상범 사장과 최근 사장으로 승진한 여상덕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동갑이다. 정진행 현대자동차 사장, 김영태 SK 사장, 석태수 한진해운 사장, 고재호 대우조선해양 사장, 이석동 현대상선 대표, 윤준모 현대위아 사장, 김위철 현대엔지니어링 사장, 전병일 대우인터내셔널 사장, 서충일 STX 사장 등이 1955년생이다. 그런가 하면 그동안 그룹 회장의 법정구속 등 우여곡절이 많았던 한화그룹 내에선 김창범 한화케미칼 사장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삼성 토탈 등 삼성의 방위산업부문과 석유화학사업부문 인수 작업을 주도하는 주체가 한화케미칼이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지난해 6월 한화L&C(현 한화첨단소재) 건재부문의 성공적 매각을 통해 사업구조를 재편했고, 한화첨단소재의 변화와 혁신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재계 일각에선 김승연 회장의 경영 복귀에 김 사장이 첨병역할을 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1967년생 | 도전과 패기 Forever
올해로 40대 후반에 접어든 1967년생(만 48세) 양띠 기업인 중에는 유독 IT분야를 이끌고 있는 스타 CEO가 많다. 우선 네이버 신화의 주인공 이해진 NHN 이사회 의장이 눈에 띈다. 네이버는 지난 12월 중순 모바일 메신저 ‘라인’이 ‘라인페이’로 일본의 모바일 결제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일본에서 성과를 내면 알리바바의 알리페이, 페이팔 등과 글로벌 경쟁을 펼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말 넥슨과 기업결합에 나선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넥슨의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에 좌불안석이다. 지난 10월 넥슨코리아가 엔씨소프트의 지분을 추가로 취득하면서 갈등관계는 시작됐다. 당시 넥슨코리아는 엔씨소프트 주식 8만8806주(0.4%)를 추가로 사들이며 엔씨소프트 최대주주(15.08%)로 올라섰고, 곧바로 엔씨소프트와의 기업결합을 신고했다.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타사 주식 15%(상장사에 해당)를 취득하면 공정위에 신고하고 기업결합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넥슨의 추가 지분 매입은 공정위의 기업 결합 승인까지 계산된 결정이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택진 대표도 보도자료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올해 김 대표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IT업계에선 최세훈 다음카카오 공동대표이사와 서수길 아프리카TV 대표, 조너선 아이브 애플 디자인총괄 수석부사장이 1967년생이다. 이 밖에 채양선 아모레퍼시픽 마케팅총괄 부사장과 정욱준 제일모직 준지 상무가 주목받는 양띠 임원이다.
1979년생 | 스포트라이트 받는 재벌가
만 36세, 30대 중반이 된 재벌가 3~4세 중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아들 박서원 오리콤 최고광고제작책임자(COO)가 아버지와 함께 양띠 기업인이다. 광고회사 빅앤트인터내셔널을 이끌며 업계에 회자되던 박 대표는 지난해 두산 계열 오리콤의 CCO를 겸임하며 화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