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극사실화 개척한 고영훈 화가 | 20대에 한국미술 새 역사 썼던 작가의 도전…사실 같은 그림에 4차원의 사상까지 담았다
입력 : 2014.06.27 11:17:44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선 지난 5월 2일부터 6월 4일까지 극사실주의 회화로 한국 구상의 새 지평을 연 고영훈 화가의 <있음에의 경의>라는 전시가 열렸다. 관객 대부분이 전시실에 걸린 그의 최근작에 열중했지만 복도에 걸린 작품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작가가 초기에 천착했던 ‘This is a stone’ 시리즈의 1979년 작이었다. 1973년에 시리즈를 시작했으니 작품에선 원숙미가 배어나왔다. 4m폭 캔버스를 가득 채운 돌은 깊은 계곡과 가파른 암벽을 품었고 머리엔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운무까지 이고 있었다. 작은 돌이 아니라 그대로 거대한 산이었다. 작가는 “작은 돌 하나에 우주를 담았다. 돌의 작은 홈과 구멍은 사람 사는 집을 형상한다. 희미한 모습으로 아득한 저 멀리의 세계까지 담았다”고 설명했다.
‘돌’ 그림으로 명성 날려
사진으로 찍듯 보이는 것만 그대로 그린다는 점에서 포토리얼리즘으로도 불리는 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는 다를 뿐 아니라 그들을 넘어선 화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가는 1980년대 들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자연만 다루던 데서 나아가 인간의 문명을 상징하는 책들 위에 자연을 상징하는 돌을 얹어 2차원의 일루전 세계에서 3차원 공간을 연출했다.
전시장 안에는 그 개념을 발전시킨 ‘나비’, ‘꽃과 나비’, ‘꽃인지 나비인지’ 등 최근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캔버스는 고서로 벽을 가린 옛날 시골집처럼 한국 고서로 덮은 프레임 위에 서양의 글씨를 덮어씌웠다. 서구화된 우리네 사회를 상징하는 것처럼. 그 위에 오래된 책을 하나하나 콜라주해 화폭은 거대한 서양 사전처럼 보였다.
작가는 그 책 위에 아이리스나 원추리, 수국 등 갖가지 꽃을 그리듯 던지듯 올렸다. 그 꽃을 보고 나비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꽃과 나비가 모이고 흩어지는 모습이 우리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우화화한 듯했다. 극사실화가 2차원 평면을 넘어 3차원 공간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런데 한참 그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책이 움직이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캔버스 프레임이 사각이 아니라 약간은 비정형적으로 생겼다.
“책에 생명을 부여하려고 프레임을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책이 살아서 나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작가의 생각은 공간을 넘어 4차원 시공간으로 나가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유난히 검푸른 날개를 활짝 편 나비 한 마리가 돋보였다. 혼잡한 그 세상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도하고 싶은 작가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시간까지 담은 달항아리 작품
돌과 책과 꽃, 나비와 놀던 작가는 최근 도자기로 넘어와 새로운 철학을 담고 있다. 문외한에겐 보기 좋은 달항아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국립박물관과 간송박물관, 오사카박물관에 있는 도자기의 이미지 사진을 빌려와 내 집에 있는 도자기의 알갱이를 보며 속살을 그려 넣었다”고 설명했다.
2013 달항아리는 공간에 떠 있는 듯했다. ‘해가 비친 달’이라는 제목의 2014년 작 ‘달항아리’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며 음영까지 담았다. 미끈하게 생긴 호에 감탄하며 자세히 보니 달항아리 표면에 구을 때 생긴 반점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긁힌 자국까지 살아 있었다. 굽 부분엔 이리저리 옮기면서 생긴 생채기며 세월의 무게에 살짝 갈라진 금까지 여실했다.
2013년 작 ‘사발’에서 작가는 세월과 공간을 넘어 보는 이의 시각까지 담았다. 오래된 백자 사발은 이가 나가 어느 시골집 부엌 한편에서 천덕꾸러기로 지내다가 햇빛을 본 듯 세월이 덕지덕지 앉았다. 무엇엔가 부딪쳐 이가 나간 자리엔 샐듯 말듯 살짝 간 실금까지 살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는 똑같은 사발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젊은이가 본 사발과 할머니가 본 사발 모습이라고 했다. 아마 그 할머니는 사발처럼 이가 빠진 파파할멈일 터였다.
작가의 철학은 헤겔을 넘고 하이데거를 넘어 동양의 우주관으로 날아간 것이다.
“같은 사발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할머니가 본 것은 흐리고 청년이 본 것은 또렷하다. 청년이 본 게 맞나 할머니가 본 게 맞는가. 이쪽도 맞고 저쪽도 맞다. 그저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사발 하나도 이처럼 다양하게 보일 수 있다. 잔상도 그렇게 나타난다. 기억도 현실이고 상상도 현실이다. 꿈꾸는 것도 짧은 순간이지만 현실이다. 서양에선 그걸 초현실로 치부하고 현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동양에선 그것도 현실이다. 하나인데 다르게 보인다. A가 A’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길게 보면 다 바뀐다. 그러나 그게 같은 것이다.”
한국 특유의 사고를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작가는 자신과 아들을 담은 ‘Generation 1, 2, 3’ 이란 작품에선 그 이상을 보여준다. 부자의 공통적인 어떤 것만을 추출해서 담아낸 것. 자신과 아들은 다르지만 일정부분 공유되는 게 있는데 작가는 그것을 원형질이라고 한다. 오래 전부터 이어오던 원형질이 자신을 거쳐 시간차를 두고 아이에게 이어졌다는 것.
“동양에선 합일이라고 한다. 색즉시공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 시간과 공간에 의해 설명되는 인류의 흐름을 담았다.”
항아리 3개의 연작은 공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너무나 또렷이 담았다. ‘세상천지 1, 2, 3’이란 작품에서 작은 단지는 우주처럼 움직인다. 단지 하나가 앞도 보여주고 뒤도 보여주고 안까지 보여준다. 대우주 속의 태양계, 그 한 쪽에 있는 지구도 떠나보면 이렇게 보일까.
제비나비로 작품에 개입했던 작가는 최근 작품에선 그 자신이라고 할 만큼 더 나아갔다. 그만큼 온 정신을 쏟았다는 얘기다.
오른쪽부터 Generation 1, 2, 3. 2014, Acrylic on plaster
과거 현재 미래까지 반영한 캔버스
평면이었던 캔버스는 입체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캔버스 옆면에 기호 같은 글씨를 깨알같이 박아 넣고 그것을 인식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이전까지 나는 실재하는 현실과 대결함으로써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실재한다는 걸 보여주려는 데 목적을 두었다. 환영은 그 하나의 주요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건 환영이 현실이자 실재 그 자체가 되게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캔버스를 인식판으로 삼아 관념 같은 목전에 당장 주어지지 않는 것까지 그리고자 한다.’
캔버스의 앞면뿐 아니라 뒤를 포함한 공간 전체에 과거에서 미래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담겠다는 것이다.
“나는 인식판에 그린다. 그 판이 사람의 한계이다. 보이는 것만 맞다. 또 아는 것만 맞다. 맹목적 추론은 안 할 것이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돌을 그리던 사람이 돌판(인식판)이 됐다”고 했다. 인식판(캔버스)에 자신의 생각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캔버스를 “문명을 담은 모뉴먼트(기념비)이자 로제타스톤 같은 지성의 상징”이라며 자신의 작업을 회상했다.
“옛날에는 닮게 그렸고, 클로즈업하려 했으나 지금은 새로운 존재를 창조해냈다. 자식을 낳듯 어디에도 없는 것을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자신이 아니라 과거부터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하는 자신을 캔버스에 담은 것이다. 그 엄청난 깊이의 생각을 서양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단다.
“우리 문화는 엄청나게 풍부하다. 그게 서구 문명과 함께 가야 한다. 어느 것이 더 낫다는 게 아니라 서로 존중하며 공존해야 한다.”
7세에 붓 잡은 천부적 화가
고영훈 화가의 고향은 바람 많고 돌 많은 제주도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태어난 그는 7살부터 붓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부 활동을 했으니 신동 소리는 수없이 들었을 터였다.
“상을 받게 됐으나 여비가 없어 서울로 가지 못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다행히 중학교 들어와선 상 받으러 서울에 오게 됐고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려 대학까지 가게 됐다. 그런데 당시는 미술 하면 밥 굶을 시기가 아닌가. 집에서 하지 말라고 할 때였다. 그러다 보니 무얼 가지고 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돈도 없이 올라왔다. 거지처럼 올라와 다른 분들의 도움 받아가며 생활했다.”
접시, 2013, Acrylic on plaster, canvas
한국 현대미술의 서두 장식
그렇지만 천부적 소질을 가진 그에게 시운까지 따랐다.
“대학 2학년 때 미술판에 프로로 들어왔다. 73년에 그림이 팔렸으니까….”
그는 특히 우연히도 기성세대의 끝자락이 아니라 새로운 미술운동의 선두에 서게 됐다.
“1970년대 초 청년문화운동이 일었다.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입고 나타났고 군부에 대한 저항의 하나로 고래사냥이 유행할 때다. 당시엔 20대 초반이 문화의 선구자였다. 김창렬, 박서보, 이우환 선생님 등이 현대미술운동 할 때 쫓아다니면서 현대미술 하는 생각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을 일제 압박이나 전쟁의 고통을 직접 겪지 않은 데서 찾았다.
“우리는 이성이 없을 때 6·25전쟁을 겪은 세대다. 제2차 세계대전이나 6·25전쟁에 대한 개념이 없이 자란 세대로서 새로운 한국문화를 세웠다. 현대미술운동의 시작이다. 국전은 일제의 끝에서 이어지던 서정성이 남아 있었는데 우리는 서정적 그림에서 벗어나 인식하는 그림을 시작했다. 인식한다는 것은 새로운 철학이었다. ‘인식론’이 생소할 때였다.”
그가 스물두 살 때 그린 그림이 지금까지 대접을 받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 3학년 때 그린 1974년 작품 ‘This is a Stone’이 공론화돼 인정을 받았다. 1973년 작품은 당시엔 공론화 이전이었으나 지금은 공론화됐다.”
그는 그 운동을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시작이며, 과거가 끝나는 것”으로 규정했다.
국전 낙선 뒤 다시는 돌아보지 않아
물론 그도 국전에서 낙선한 추억을 갖고 있다.
“당시 큰 그림을 사주는 곳은 은행뿐이었다. 국전서 대상 받은 것을 주로 사갈 때다. 1972년 국전에 (작품을) 냈다가 떨어져 리어카에 싣고 나왔다. 사람을 그려 넣고 (창조적으로) 배경을 진짜 벽지로 붙였는데 아마 장난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국전에 가나봐라’고 했다. 국전은 아직도 100년 전에서 머물고 있다. 나는 오리지널한 방법으로 그리지만 생각만큼은 첨단을 가고 있다.”
여기서 그가 왜 돌을 집중적으로 그렸는지가 궁금했다. 돌 많은 제주에서부터 그리던 소재였을까.
“대학에 가기 전엔 풍경만 했다. 제주도 사람이라서 무의식적으로 좋아했다. 하늘과 돌, 바람 중에서 하늘이나 바람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돌은 될 것 같아 선택했다. 가장 흔한 소재라서 쓸모도 없는 것 같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인류문명을 지탱한 게 돌 아닌가. 잘만 하면 작품 소재가 될 것 같았다. 황금 보기를 돌처럼 보라고 했지 않았던가.”
극사실화로 ‘있음’의 아름다움 살려
그가 처음 택한 돌은 제주도 것이 아니라 학교 뒷산에 있던 서울 돌이었다. 그 돌을 그는 왜 극사실적으로 그렸고 또 엄청나게 크게 그렸는지 궁금했다.
“돌은 하찮고 애매하지만 가치를 부여하려면 주시해야 한다. 우리 척도로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고, 그 자리에서 가치를 보려고 클로즈업했다. 작은 것과 큰 것은 가치가 다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친절해선 안 되고 아주 잘해야 의미가 있다. 아주 크게 그리니 그냥 보는 돌보다 깊은 의미를 만들게 됐다. 농부도 농사만 지을 때는 아무 의미도 없지만 여기저기서 인터뷰하고 띄워주면 돋보인다. (내 작품은) 존재의 존재가치를 부각시켰고 무생물을 생물화 하려고 했다.”
작게 보면 구체적인 것이 보이지 않지만 크게 보면 좋은 게 점점 더 많이 보인다는 얘기다. 특히 크게 클로즈업하면 ‘상상의 사실’이 더 많아진다고 했다. 현실보다 더 많은 것을 내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람은 클로즈업하지 않았다.
“사람을 클로즈업해서 보면 좋은 것 나쁜 것 다 보여 상쇄되고 남는 게 없다. 반면 사물은 잘못한 게 없으니 클로즈업하면 아름답게 보이고 메시지를 던진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그마한 돌에 우주를 담았다.
“실존주의자들은 안 본 것은 못 믿겠다고 하는데 나는 안 보이는 것도 믿는다. 사실 기억도 안 보인다. 저 산 너머 오막살이가 있는 것도, 돌아가신 어머니도 안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있다고) 믿는다. 헤겔은 허상이라고 했지만 나는 (실재라고) 믿는다.”
남들이 보지 못한 아름다움 찾아내
극사실주의 기법의 그림을 놓고 ‘사진보다 더 사실 같다’고 표현하는데 대해 작가는 이의를 제기한다.
“사진은 회합이며 망점의 조합이다. 물감은 망점이 없다. 무한대다.(다르다) 사진은 평면에 (많은) 점을 찍은 것이지만 그림은 원근과 공간까지 가능하게 한다. 의식을 아무리 세분화해도 원의식과는 다르다. 잘 닮게 그린 것은 닮게 보인 것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게 그린 것은 다른 쪽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보였기 때문일 게다. 이것은 틀리다 나쁘다가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같다. 보는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극사실적으로 그린 게 창작이냐는 시각도 단호하게 배격한다.
“본다는 것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소용에 의해, 필요에 의해 보는 밀도와 그걸 해부하려고 보는 밀도는 다르다. (우리는) 숨구멍까지 보고, 미니멈과 맥시멈도 찾아내고, 남들이 안 보던 것까지 찾아낸다. 그런 차이가 대중의 시각과 다르다. 내 그림은 극한으로 가고 있고 내 생각도 그 극한점으로 가고 있다. 화가 중엔 감정적으로 극한으로 간 사람도 있는데 고흐가 대표적이다. 반면 달리나 프로이트는 꿈이 극한으로 갔다. 일반인의 영역보다 더 깊이, 더 높이 간 게 전문가다.”
This is a stone-1979.
세계서 인정받은 그림
일찌감치 프로(?)가 된 그는 전통에 갇힌 국전이란 벽을 깨는 대신 아예 그 벽을 넘어버렸다.
“고향이 제주도라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에 육지를 그리워했다. 서울 와선 눈을 밖으로 돌려 늘 김포공항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일본으로 나가게 됐고 이어 유럽으로 나갔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엔트리가 와 참가한 걸 계기로 유럽 투어를 해 큰 성과를 얻었다. 네덜란드 여왕 시절 베아트리체 대제가 내 그림을 사주고 선물까지 줬다. 지금 선물로 받은 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베아트리체 컬렉션은 매우 유명하다. 고흐나 베르베르, 반 아이크 등도 거기에 속한다.”
고영훈 화가는 특히 프랑스의 자존심이라고 불리는 파리의 프랑수와 미테랑 도서관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설계한 건물이라고 강조했다.
“퐁피두센터 화랑서 공모 설계자가 내 그림을 보고 그렸다. 그러니 그 도서관 설계의 꼭지점에 내가 있는 셈이다.”
그의 작품은 미국, 프랑스 등 세계의 여러 미술관에 소장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어느 순간 해외 활동을 접기로 했다. 출세하는 것보다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외국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시점엔가 돌아보니 내가 서양 가서 그들에게 숙제검사 받는 느낌이 들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조차 세계가 아니라 이탈리아 작가들을 위한 것이고 구색 맞추기로 우리를 끼워 넣는 격이었다. 그래서 내 생태계서 내 냄새를 풍기자고 했다. 이제는 들고 나가기보다는 와서 보라고 한다.”
그는 “그림도 그렇지만 생각까지도 내 냄새를 풍기자고 한다. 그렇다고 국수주의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내 냄새 속에는 서구도 들어 있다. 지금 갓 쓴다고 우리를 알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인정해야 한다. 한국 고서 위를 서양 책을 실크스크린해서 덮은 것도 같이 놓고 존중받고 싶다는 뜻에서다. 이기겠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그들의 존중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생각이나 그림이나 그래야 그들이 인정한다.”
크리스티나 소더비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그의 작품 값은 지금 국내 작가 중 최고 수준이다. 그림값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떨까.
“그림이란 그릇에 무엇을 담았느냐가 중요한데…. 그림의 원가는 그림 그리는데 들어간 물감 값이 아니다. 단칸방 옮겨 다니며, 고난을 겪어가며 쌓은 작가의 정신적 가치를 보아야 한다.”
고영훈 화가의 그림 잘 보는 법
먼저 가까이 다가가라.
이성을 만나려면 다가가 관찰하고 접선해야 하듯이, 다가가서 접선하고 행동하라. 열심히 그리든 보든 하면 또 다른 어떤 것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러면 깊은 것을 공유하게 된다. 참여해야 좀 더 알 수 있다.
예술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옛날 회화는 단순이 그리는 식이었지만 지금 캔버스는 철학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니 잘 그렸다 못 그렸다 선입견으로 판단하지 말고 다가가라. 누드를 볼 때 손을 올리면 도덕의 틀에 갇혀 있다는 증거다.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 높고 낮음은 없다. 각자의 위치가 있을 뿐이다.
고영훈 화가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 <앙테팡당>전에서 극사실주의 작품 ‘돌’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가면서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 지금은 크리스티나 소더비 등에서 인정받을 정도가 됐다. 작품은 프랑스 루네빌 미술관을 비롯해 안시문화원, 네덜란드 베아트리체 컬렉션, 미국 디트로이트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등 여러 곳에 소장돼 있다. 작품 활동 중 잠시 대학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으나 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려면 화가로 성공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화가로 복귀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어느 것이나 인생을 걸면 밥 굶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전시에 대해 “작품인생 전반기를 정리하고 후반기에 할 일을 저질러 봤다”고 했다. 앞으로 5년여에 걸쳐 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주목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