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마주쳤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외모였다. 얇은 노스페이스 재킷은 파란색이라 더 춥게 느껴졌다. 수행원 없이 등장한 그의 손에는 백과사전 두께만한 서류철까지 들려 있었다. 어디를 봐도 백발의 노신사가 26억달러(2013년 9월 기준 포브스 추산, 약 2조8000억원) 재산을 가진 인물이라고 보이지는 않았다. 턱없을 정도로 물가가 비싼 다보스에서 기사가 있는 차량을 렌트해 다니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에게서 전 세계 458위 억만장자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지난 1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열린 스위스 다보스에서 만난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칼라일 공동창업자 겸 회장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그의 이력은 매우 독특하다. 세계 금융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이지만 금융과 큰 연관이 없는 길을 걸어왔다.
억만장자의 흔적 찾기 어려운 평범함
그는 카터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내 정치담당 부보좌관이란 타이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면서 밥줄이 끊기자 변호사 사무실을 여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지만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다 발을 들여놓은 곳이 사모펀드였다. 알고 지내던 금융계 사람들과 손을 잡고 사무실을 열었다.
남들과 같아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는 판단에 금융회사의 사무실을 뉴욕이 아닌 워싱턴에 차렸다. 자신의 정치인맥과 금융을 결합한 새로운 모델로 출발한 칼라일은 이후 쾌속성장을 거듭했고 그는 사모펀드의 대명사가 됐다.
큰 부를 얻은 뒤 돈이 필요한 일에는 지갑을 열었다. 지진으로 보수가 필요해진 워싱턴모뉴먼트 공사비의 절반을 내기도 했고 150억원에 사들인 미국 건국 초기 시집 등을 도서관에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쌓은 명성은 그에게 최고의 네트워크를 가져왔다.
워싱턴에서 어려운 일은 그를 통하면 해결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한다.
“뭐든 물어보라”는 말로 시작된 루벤스타인 회장과의 인터뷰는 마치 누가 누구를 상대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기자에 대한 사전 준비가 철저했는지 막힌다 싶을 때엔 상대에 대한 질문들을 쏟아내 분위기를 바꿨다. 또 어려운 질문들엔 능수능란한 답변과 함께 피해나갔다. 그렇다고 맹탕의 대답만을 내놓는 것도 아니었다. 껄끄러운 질문이라도 한번 받으면 정공법으로 나왔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양극화를 더 부추길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그럼 더 좋은 시스템을 들고 와보라”는 말로 맞받아치는 식이다.
루벤스타인 회장은 “세계엔 여전히 투자 기회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현재까지 신흥시장의 지극히 일부에만 투자했다”고 지적했다. 또 “전체 사모펀드 투자 금액의 85%가 선진국 시장에 투자된 상태”라며 “사모펀드들이 신흥시장에서 더 이상 투자할 곳이 없을 때까지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고 밝혔다.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등으로 신흥국 변동성이 커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곳에서든 위험이 존재하고 기민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중동이 불안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투자를 해왔다”고 전했다.
한국에 끼칠 영향도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양적완화 자체를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테이퍼링의 영향을 말하기는 어렵다”면서도 “그러나 한국에서 걱정하는 것과 같은 충격은 없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테이퍼링 자체가 완만하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란 얘기다.
또 현재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한은에서 내놓은 예상치가 3.8%였고 작년이 2.8%였으니 아마도 그 사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며 “물가도 안정적이고 다른 경제변수들의 흐름도 나쁘지 않아 꽤나 훌륭한 경제상황인 셈”이라고 평했다.
현재 칼라일은 약 1850억달러(2013년 9월 말 기준)의 자산을 관리하는 세계 2위 규모의 사모펀드다. 우리 돈으로 약 200조원에 가까운 돈이다. 회사 공식 소개자료에 따르면 21개국에 34곳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칼라일이 대주주로 있는 기업에 고용된 인원만 61만4000명에 달한다.
사회불평등 해법은 기부가 아닌 교육
칼라일그룹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지난 외환위기 이후다. 한미은행을 사들였고 수년 뒤에 이를 미국 시티그룹에 되팔면서다. 당시 칼라일그룹이 벌어들인 차익이 7000억원에 달했다. 계약을 주도했던 김병주 당시 한국지사 대표는 이후 독립해 MBK파트너스를 세웠다.
그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10억달러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금액”이었다면서 “이제는 자산규모가 5000억달러라도 황당한 추정이 아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칼라일이 요즘 주력하는 곳은 아시아다. 그는 1600명에 달하는 칼라일그룹 직원 중 15%가 중국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루벤스타인 회장은 특히 아시아가 과거엔 투자대상이었으나 최근에는 투자자금 유치 측면에서도 중요해졌다고 전했다. 그는 “여전히 투자자 대부분이 선진국이지만 아시아 국부 펀드들이 중요한 고객이자 경쟁상대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억만장자라지만 루벤스타인 회장은 입버릇처럼 지금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루벤스타인 회장은 “아담 스미스가 자본주의를 창조(invent)했을 때 그 역시도 완벽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자본주의도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 우리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을 만들어낸 현 시스템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시스템에서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매우 평범한(very modest) 집안에서 태어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올라 선 것은 자본주의와 현 시스템의 강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이 시스템의 장점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단점을 고쳐나가는 것이 해답이라고 믿는다.
현 시스템의 문제 개선을 위한 방식으로 그가 택한 것은 ‘기부’다. 실제로 그는 이미 ‘기부서약(giving pledge)’을 마쳤다. 워런 버핏 버크셔 헤서웨이 회장과 빌 게이츠 MS 창업자 등이 시작한 기부서약은 재산의 절반을 기부로 내놓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는 “자수성가한 많은 부자들 중 상당수가 기부 등을 통해 사회에 부를 환원하고 있다. 돈을 무덤까지 갖고 들어갈 수 없음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기부가 현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해줄 것이란 생각은 버리라고 주문한다. “현재 미국 내 기부는 GDP의 2%가량이다”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이는 전체 경제규모에 비해 매우 적은 것”이라고 전했다. 구글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어디에 기부를 했다는 식의 얘기들이다. 최근 크로니클오브필란트로피가 밝힌 지난해 기부 상위자 순위에서 21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13년 그는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JFK행위예술센터에 5000만달러를 기부한 것을 비롯해 컬럼비아대학 근위축성측생경화증(ALS·루게릭병) 의료센터에 1000만달러, 모교인 듀크대학에도 1000만달러,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 500만달러 등을 내놨다.
그는 “특히 기부 중에서도 교육관련 기부를 많이 하고 있다”며 현 시스템의 문제인 양극화 등을 해소하는 최고의 해법이 교육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돈 더 벌 수 있다
“양극화 등의 가장 큰 문제는 기회 박탈이다. 내가 누려온 이 시스템의 장점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많고 기부도 많이 한다. 사모펀드라고 하면 돈만 버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금융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다. 돈이 필요한 곳에 잘 쓰일 수 있게 돕는 것도 금융의 역할이라고 여긴다. 기부와 관련해 원칙이 있다면 뭔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곳에 주로 한다는 점이다.”
루벤스타인 회장이 말하는 자신의 기부 철학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기부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이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 때문에 칼라일에서는 직원이 기부를 할 경우에 동일한 금액만큼을 회사에서도 내는 매칭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요즘에 대학생들이 취직 등을 걱정하다보니 ‘기술적인’ 학문에만 매달린다고 염려했다. 많은 학생들이 특정분야에만 몰린다는 것. 그는 “요즘 교육계가 과학, 수학 등에 너무 강조를 하고 있다”며 “인문학 등을 더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운 그는 “H=MC”라는 말로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인문학(humanities)을 공부하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more cash)”는 얘기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장으로 치자면 사모펀드 등 금융기관이 최고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연봉 때문에 ‘돈잔치’를 벌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교사들의 저임금과 비교하면서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연봉이 많기로는 전 세계 수위에 드는 루벤스타인 회장은 그러나 “현 시스템은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라고 응수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출장지에서 보내는 그는 때를 가리지 않고 직원들에게 전화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칼라일그룹의 한 직원은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와 밤에도 편하게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