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년 전. 전 세계 53개국의 경제학자 1000명은 주요 20개국(G20)이 금융거래세를 도입해야 한다는 공동서한을 만들었다. 당시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티모시 가이트너와 빌 게이츠 MS 회장 앞으로 발송된 이 서한에는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대거 서명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장하준 교수, 미국의 3대 천재 경제학자로 불리는 컬럼비아대학교의 제프리 삭스 교수, 그리고 이 서명을 주도한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터키 출신의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들어 있었다.
이들은 G20 내부에서 곤경에 처한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금융에서 얻은 것들을 사회에 되돌리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서한은 EU이 금융거래세(Financial Transaction Tax·일명 FTT)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에는 변형된 토빈세(금융거래세, 외환거래세)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의 배경으로 연결되고 있다.
금융거래세 도입의 선봉에 섰던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MBN 포럼 2013’에 기조연설을 하려고 왔다. 지난해 세계지식포럼에 온 뒤 4개월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이다. 대니 로드릭은 이 자리에서 한국 외환시장 급변의 해법으로 ‘변형된 토빈세 도입’을 제시했다. 우리나라 원화값은 최근 6개월 간 20% 급등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한 통화가 됐다. 그는 ‘시의 적절하고 필요한 조치’라고 한국의 시도를 극찬했다. 금융거래세와 마찬가지로 시장 변동성을 줄이고 금융과 시장에 의한 결정을 정부와 공공권에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하버드대 출신인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니 로드릭 교수가 장하준 교수처럼 국가의 역할을 중요시해 경제학계에서는 ‘좌파’(경제학계에서는 시장의 역할을 강조할 경우 ‘우파’, 국가의 역할을 강조할 경우 ‘좌파’라고 분류한다)라는 지적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송 교수는 “그 누구보다 정교하고 수학적인 입증을 하기 때문에 학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석학”이라고 했다. 선언적 주장을 동원해 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대부분의 국가주의 경제학자들인데 반해, 그는 활발한 연구 활동에서 정교한 입증법 등을 동원해 현실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경제학자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여우와 고슴도치’의 비유를 통해 다른 경제학자들을 꼬집기도 했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고슴도치처럼 시장 자유화(우파)나 정부 주도의 정책(좌파)만이 올바른 해결이라고 믿는 이론주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우처럼 적절하게 두 입장을 섞어가며 현실에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고슴도치형의 이론가 중에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많다는 사실이다.
대니 로드릭은 아직 노벨경제학상을 받지 못했으니 ‘여우’에 속하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터키 출신인 그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터키의 정치·경제적 문제들을 비판하는 글을 자주 올린다. 매우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인 날카로움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그가 MBN 포럼을 통해 한국에 조언한 말들은 김연아의 빙상 점프만큼이나 깔끔했다. 무엇보다 그는 ‘국가의 역할과 비전이 지금 한국 경제위기의 해법’이라고 강조했다.
“밀턴 프리드먼의 유명한 비유가 있습니다. 연필을 제작하는 데 많은 사람이 기여하지만 전체적인 가격 결정과 생산-유통-부가가치 창출 등을 조율하는 것은 시장이라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이 없다면 연필의 생산과 유통은 불가능하며 모든 것은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을 한번 봅시다. 지금 전 세계 연필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시장 메커니즘이 아니라 중국이죠. 멕시코가 흑연 품질은 더 좋고, 독일이 기술력도 더 좋고, 방글라데시가 노동력은 더 싸지만 중국이 국가전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국가는 어떤 일을 해 나가야 할까? 포럼 기조연설과 별도 질의응답을 통해 그가 내놓은 첫 번째 해법은 역시 ‘변형된 토빈세’를 통해 외환 시장을 막으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수출 의존도가 높고 자본시장 개방이 심하기 때문에 외부 변수들이 내부 변수들을 압도하고 있다”며 “이에 따라 자국 경제정책이 제한되기 때문에 토빈세 등으로 대외 위험을 막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복지 지출 확대 등을 내수로 연결시켜 궁극적으로 한국 경제가 해외 수출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융거래세, 외환거래세 등을 통한 자본 이동 제한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 다만 “세금 도입 목적은 중장기적이어야 한다”며 “단기적 원화 강세에 대한 조치로 한국판 토빈세를 도입하는 것은 명분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션을 통해 몇 가지 포인트를 강조했는데, 이는 한국 경제에 대한 적절한 조언이었으며, 한마디로 압권이 아닐 수 없었다.
먼저 ‘세계경제 회복을 위한 신성장 돌파구’ 세션에서는 단기 경기와 관련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포문은 미국의 싱크탱크인 피터슨 경제연구소의 애덤 포슨 소장이 열었다. 그는 ‘금융시장에 대한 과신’ ‘위기에 대한 제도적 대응의 부족’ 등 지난 경제위기의 원인들이 대부분 사라졌다고 봐야 하기 때문에 경기회복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인도의 TV 경제 칼럼니스트인 아난다 나게스와란은 “가격 거품이 형성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정면으로 쏘아붙였다. 그는 “금융시장에서 나오는 낙관론은 실물경제와 연결되지 않고 있다”며 “위기가 돌아오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지금의 ‘스몰버블’은 금방 터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다른 패널들도 선진국의 경기회복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봐야 한다고 경고했다.
대니 로드릭은 이 말들을 종합해서 “역시 선진국들도 믿을 게 못되는 군요. 한국도 선진국만 믿을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수출주도형 경제를 빨리 내수형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재정건전성 지키고 버블 유의해야
담비사 모요가 “미국은 EU와의 교역을 강화할 것이다. 셰일가스 개발 등 내수진작에 더욱 힘을 쓸 것으로도 예상된다며 어느 것 하나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는 한국에는 불리하다” 한국 정부에 대해 이런 변화들을 선제적으로 반영한 정책을 만들 것을 주문한 데 대해 대니 로드릭은 세션 말미에 한국 정부에 대한 종합적인 제언을 했다.
“한국에 조언해 주고 싶은 세 가지 결론이 떠올랐다. 첫째, 세계경제나 선진국들에 기대하지 말라. 그들이 한국에 해줄 수 있는 일들은 거의 없어진 것 같다. 둘째, 재정건전성은 마지막 무기다. 끝까지 지켜라. 셋째, 자산 가격버블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