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파트를 분양 받으려는 재건축 단지 조합원에게 2년간 실거주 의무를 부과하는 규제가 지난달 백지화됐다. 정부가 6·17 대책을 통해 해당 규제 방안을 꺼내든 지 1년여 만이다. 문재인 정부가 꺼내 든 부동산 정책 중 규제가 시장에 적용되기 전 철회된 첫 사례다. 정책 발표 당시부터 각종 부작용을 일으킬 것이란 지적을 받아왔지만 규제 백지화까지는 1년 이상이 걸렸다.
재건축 2년 실거주 의무는 지난해 발표된 6·17 대책의 핵심 정책 중 하나다. 재건축 단지에 투기 세력 유입을 막고, 원주민들에게 주택을 공급해 집값을 안정화시키겠다는 의도와 달리 강남 집값 상승의 원흉이 됐다. 법안 통과 전까지 조합 설립을 마친 단지는 해당 규제를 피할 수 있어 강남 재건축 시장의 사업 추진 속도만 자극했기 때문이다. 조합원 간 이견으로 수년간 재건축 논의가 멈춰있었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등 재건축 단지에서 ‘내리는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대응이 이뤄졌고, 지지부진하던 재건축이 속도를 내자 시장은 이를 호재로 받아들였다.
▶질질 끈 재건축 실거주 의무 입법
잡으라는 집값은 못 잡고 강남만 웃었다
실제 재건축 기대감 등의 영향으로 올해 상반기 서울의 노후 아파트값은 신축 아파트보다 2배 가까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국부동산원의 주간 아파트 가격동향조사 통계에 따르면 서울에서 준공 20년 초과 아파트값은 올해 상반기(1∼6월) 주간 누적 기준 3.06%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준공 5년 이하인 신축이 1.58% 오른 것과 비교하면 2배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서울을 5개 권역으로 나눠서 보면 20년 초과 아파트값은 동남권(강남·서초·송파·강동구)이 3.78%로 가장 많이 올랐다. 이어 동북권 3.15%, 서남권 2.58%, 서북권 2.13%, 도심권 1.48% 등의 순이다. 동남권에는 압구정·대치·서초·반포·잠실동 등의 주요 재건축 단지가 몰려 있다. 동북권에는 노원구 상계동 등의 주공아파트를 중심으로 재건축 추진이 활발하고, 서남권은 양천구 목동신시가지 아파트를 중심으로 재건축을 추진하는 단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는 신축 아파트값이 더 빨리 오르고 노후 아파트값은 더디게 오른다고 본다. 노후 아파트는 재건축 바람 등을 통해 새 아파트로 거듭날 수 있는 기대가 커지면 값이 껑충 뛴다. 지난해 실거주 2년 의무를 피하려 조합설립에 속도를 내는 단지가 속출하자 시장에서는 이를 재건축 기대감이 커진 것으로 해석했다.
실제 압구정 현대아파트 등 재건축 단지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사업 추진 속도가 빨라졌다. 정부가 지난해 6·17 대책을 통해 투기과열지구 내 재건축 아파트를 조합설립 인가 이후에 구입하면 입주권을 주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규제를 피하려는 움직임이 나왔기 때문이다.
6·17 대책 이후 올해 초까지 강남구 개포동 주공5·6·7단지를 비롯해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2차, 방배동 신동아, 송파구 송파동 한양2차, 용산구 서빙고동 신동아, 양천구 신정동 수정아파트 등이 재건축 조합설립 인가를 받았다. 압구정동에서는 올해 2월 4구역을 시작으로 5·2·3구역 등이 잇달아 조합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조합설립 인가를 받은 재건축 아파트 값이 폭등했다. 압구정동 현대7차는 전용면적 245㎡가 조합설립 인가 직전인 4월 2일 80억원(11층)에 거래됐다. 6개월 전 67억원(9층)보다 매매값이 13억원 뛰었다. 조합이 설립된 이후 매수하면 재건축 조합원 지위를 양도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막차 수요’가 몰린 것이다.
▶주택 실수요자 피해사례 속출
정부 정책 믿고 따른 사람만 ‘바보’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던 재건축 조합원 2년 실거주 의무 규제가 전면 철회되면서 주택 실수요자들의 속을 태우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집주인이 실거주하겠다고 해 새 집을 구한 세입자들은 전세계약금을 날릴 위기에 처했고, 입주를 위해 인테리어 비용과 이사 비용을 치른 집주인들 역시 막상 실제 입주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시에, 쓸데없이 수천만원의 손해를 본 셈이 됐다. 코로나19 확산에도 해외에서 실거주를 위해 귀국했거나 귀국을 준비하던 사람들도 황당한 상황을 맞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임대사업자 A씨는 구청에 납부한 3000만원의 벌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손해를 보게 됐다. A씨는 지난해 6월 정부가 실거주 의무 규제를 발표한 후, 정부정책을 믿고서 실거주 기간을 채우기 위해 임대 등록한 물건을 자진 취소하고 1년 전 본인이 입주했다. 이 과정에서 등록 취소로 인해 구청 주거재생과에 3000만원의 벌금을 냈다. A씨는 “정부 발표를 순진하게 믿는 국민만 손해를 보고 정부발표를 안 믿어야 이익을 보는 나라가 된 게 너무 화가 난다”며 “이젠 정부가 뭐라고 해도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거주 여건이 안 돼 재건축 프리미엄을 포기하고 처분했는데 이후 집값이 억단위로 뛰어 땅을 치고 후회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B씨는 지난 2월 보유하고 있던 아파트를 팔아버린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후회만 남는다. B씨가 판 아파트는 서울 노원구 재건축 아파트 가운데 속도가 가장 빠른 태릉우성이다.
지난해 6월 ‘재건축 조합원 2년 실거주 의무’ 방침이 밝혀지면서 B씨는 고민 끝에 지난 2월 이 단지 전용면적 66㎡을 7억4000만원에 팔았다. 현재 이 아파트 같은 면적 호가는 8억7000만원 수준이다. B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실거주하지 못할 형편이라 집을 팔았는데 실거주 의무 조항이 없어진다는 발표에 어이가 없었다”며 “이제는 같은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간다. 정부 말만 믿다가 재건축에 따른 프리미엄을 한순간에 날렸다”고 한탄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7월 13일 전체회의를 열고 재건축 조합원 실거주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을 삭제한 도정법(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낡은 아파트에 살기 위해 인테리어에 수천만원의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도 정부에 분노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1차 아파트 보유자는 실거주를 위해 3000만원을 들여 집수리를 했는데, 실거주 의무 규제가 전면 백지화되면서 수천만원을 날린 셈이 됐다.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아파트 3단지 아파트 보유자도 실거주를 하기 위해 인테리어 계약금으로 1000만원을 지불했는데 취소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인테리어를 계속 진행할 수도 없어 난처한 상황이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인근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규제 백지화 소식이 알려지자 집주인과 세입자 등 전화가 빗발치는 중”이라며 “집주인이 입주하지 않아도 되면서 신규 계약 체결, 계약 파기 등 다양한 문의가 오고 있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에는 ‘이랬다 저랬다 법을 장난으로 만드냐’ ‘정부가 도무지 인생계획을 세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집주인이 다시 세입자를 구할 때 전셋값이 더 오를 것’ 등 비판이 쏟아졌다.
박일규 법무법인 조운 대표변호사는 “정책 발표에 따라 발 빠르게 움직인 사람들이지만 법적으로 손해배상을 받기는 극히 어렵다”며 “법적인 책임을 물기는 어렵지만 정책을 섣불리 수립해 혼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은마아파트 전경
▶지난해부터 부작용 경고 예고된 입법 참사
재건축 ‘2년 실거주’ 의무 조항은 이미 지난해 국회 입법 과정에서도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강하게 제기됐다. 특히 정부와 여당이 규제 발표 1년 만에 백지화하면서 이유로 밝힌 ‘세입자 주거 불안’ 문제가 집중 제기됐다. 정부 정책을 믿고 따랐던 주택 수요자와 살던 집에서 쫓겨난 세입자가 입을 선의의 피해를 정부와 여당이 사실상 방치해 피해를 키운 셈이다.
지난해 11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법안심사 소위 회의록에는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다수 확인됐다. 이 법안은 투기과열지구에서 시행하는 재건축 사업의 경우 조합원이 분양권을 신청할 때 소유 주택에서 2년 이상 실거주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을 담았다.
지난해 소위 심사 과정에서 규제 시행 시 세입자들의 피해에 대한 우려가 앞서 제기됐다. 김희국 국민의힘 의원은 “서울 은마아파트라든지 오래되고 누추한 아파트는 60% 가까이 전월세 사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 법이 강행되면 주인들이 어떻게 행동하겠나.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나가라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왔다 갔다 할 텐데 여기에 대한 대책은 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세입자들 피해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공식 의견은 없었다.
특히 법안 소위 과정에서 ‘과잉 입법’도 지적됐다. 김 의원은 “개인 사유재산인데 사정변경의 원칙을 무시해버리고 2년이라는 강제조항을 부과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실소유자가 아닌 사람이 재건축 아파트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개발부담금이라든지 초과이익환수제를 통하도록 해야지 ‘2년 거주 안하면 분양권을 주지 않겠다’는 방식은 법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부동산을 규제하는 과정에서 ‘이분법적 사고’가 반영됐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투기꾼과 실수요자를 가르는 기준이 자의적이란 배경에서다.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새 집을 마련하려면 여러 방법이 있는데 특정 행위를 정부가 법으로 너무 강요하고 있다”며 “거주 요건을 갖추면 실수요자, 안 갖추면 완전히 투기꾼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로 (정책을 하다) 보니 국민들이 헷갈리고 정책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도 “윤성원 국토부 차관도 실거주하겠다고 해놓고 특공 받은 주택을 결국 팔지 않았나”라며 “사정 변경의 원칙을 존중해야 하는데, (규제를) 강제하고 의무화하면 법리에 맞지 않는다. 2년이면 투기이고 1년이면 투기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한 시민이 서울 송파구 공인중개소 벽에 붙은 재건축 안내 문구를 바라보고 있다.
이 법안은 올해 상반기 처리 방향이 결정될 것으로 관측됐으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 관련 법안 처리에 밀려 시간만 흘렀다. 결국 부작용이 예상된 법안 처리를 국회가 차일피일 미루면서 정부 정책방향에 따라 움직인 선의의 피해자들만 양산한 상황이 됐다.
급기야 지난 2월 청와대 청원도 제기됐다. 재건축 단지는 연식이 30~40년으로 노후도가 심해 주변 전세 시세보다 50%까지 저렴한 경우가 많은데, 집주인들이 실입주하겠다고 나서 전셋값 부담이 커졌다는 호소였다. 청원인 A씨는 “재건축 아파트는 살기는 불편해도 대단지이면서 학군도 괜찮은 지역이 많고, 주변 신축보다 저렴한 전세를 살 수 있어서 서민들에게 소중한 보금자리”라며 “안 그래도 전세가격이 올라 어려운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재건축 노후 아파트에서마저 쫓겨나면 세입자들 고통은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했다.
조합원 분양권을 얻기 위해 집주인이 갑자기 재건축 단지로 들어가면서 세입자들이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는 현실화했다. 특히 6·17 대책 이후 도입된 임대차3법(전월세 신고제·전월세 상한제·계약갱신청구권)과 영향이 맞물리면서 파급효과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계약갱신청구권이 시행을 두고 집주인이 실거주한다고 하면 계약 갱신이 되지 않도록 한 예외 조항과 겹치면서 집주인들이 대거 입주했던 것이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작년 6월 이후 강남구 전셋값은 18.07%, 서초구는 17.81%, 송파구는 23.72% 급등했다. 이는 같은 기간 전국 상승률(12.23%)을 압도한다.
▶규제 폐지가 집값 자극할 우려도…
일각에선 수혜 단지 찾기 분주
섣부른 부동산 규제 정책이 결국 폐지 수순을 밟았지만 향후 재건축 아파트의 집값 상승세를 더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각종 온라인 부동산 카페에서는 벌써부터 재건축 실거주 2년 의무 폐지에 따른 수혜 단지를 전망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온라인 카페 한 게시글엔 “최대 수혜단지는 그동안 이 법안으로 가장 눌려있던 최종 안전진단통과 단지~조합설립 전 단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글 게시자도 “그동안 실거주 규제로 인해 실거주 의무가 없는 조합설립된 단지들이 급등하는 수혜를 입었다”며 “조합설립 전 단지들은 한 단계 차이로 현금청산 위기감 때문에 쉽게 매수할 수 없었는데 하반기엔 이들 단지가 정상화되는 과정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장재현 리얼투데이 리서치본부장은 “결국 투자수요만 자극해 가격 인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목동, 강남, 노원처럼 학군이 좋은 지역의 전세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