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따라 미국 가자?’ 나스닥 상장 준비하는 기업들, 유니콘 엑소더스… 국내자본시장 속앓이
박지훈 기자
입력 : 2021.05.27 15:30:30
수정 : 2021.05.27 15:31:02
쿠팡이 지난 3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86조원에 달하는 시가총액을 인정받고 입성한 이후 국내 기업들이 잇달아 미국 상장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팡은 상장 첫날 시가총액이 886억5000만달러(약 100조원)에 달했고 이후 거품논란과 1분기 실적부진으로 최근까지 꾸준히 주가가 빠졌음에도 5월 18일 현재 631억달러(약 72조원)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 한정해 이커머스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기업이 국내 시가총액 3위인 네이버(57조원)보다 몸집이 크다는 것은 전 세계에서 투자가 몰리는 미국 증시에 상장했다는 이유가 크다는 분석이다. 쿠팡은 미국 상장으로 약 5조원을 확보해 국내에 물류센터를 추가로 짓고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까지 준비 중이다. 올해 3월부터 싱가포르 법인에서 근무할 직원을 뽑고 있다.
미국 증권시장 상장을 추진 중인 마켓컬리
▶IT 분야 유니콘 10여 개 줄줄이 대기
바이오 거물들까지 나스닥 입성 채비
미국 시장에서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인 기업들로는 IT 분야의 유니콘들이 많다. 유니콘 기업은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벤처 기업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마켓컬리다. 마켓컬리는 지난 3월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JP모건을 상장 주관사단으로 뽑았다. 2017년 말 삼성증권과 맺은 주관 계약을 해지한 뒤 외국계 IB로만 새롭게 꾸린 것이다. 시장에서는 마켓컬리가 이르면 연내 뉴욕증권거래소 입성을 추진할 것이라 보고 있다. 마켓컬리는 기업공개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3000억원 규모 프리IPO(Pre-IPO·상장 전 지분투자)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리IPO란 투자자에게 수년 안에 상장한다고 약속하면서 일정 지분을 팔아 자금을 유치하는 것을 말한다.
일찍부터 북미 시장 공략에 나선 네이버웹툰 역시 미국 시장 상장을 고려하고 있다. 네이버웹툰은 7200만 명이 이용하는 세계 1위 웹툰 플랫폼이다. 박상진 네이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4월 2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네이버웹툰은 당장은 자금 조달 계획이 없지만 미국 투자자에게 더 친숙해지고 믿음직해진다면 상장을 고려할 수 있다”고 공론화했다. 앞서 네이버는 지난해 ‘웹툰엔터테인먼트’라는 자회사를 미국에 세우며 북미 진출을 본격화한 바 있다. 최근에는 네이버가 글로벌 1위 웹소설 플랫폼인 캐나다의 ‘왓패드’를 인수한 것도 북미 정서에 맞는 이야기를 웹툰으로 옮겨오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카카오 계열사로 웹툰, 웹소설, 영화·드라마 등을 다루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도 올 하반기나 내년쯤 미국 상장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기업이다. 최근 미국의 ‘래디쉬’와 ‘타파스미디어’ 등 웹소설·웹툰 플랫폼 인수를 타진한 것도 현지화 전략의 일환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카카오엔터 외에도 카카오 계열사로 암호화폐 거래소를 운영하는 ‘두나무’, 운송 서비스 업체인 ‘카카오모빌리티’ 등도 올해나 내년을 목표로 미국 상장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카오페이지가 서비스하는 <승리호>는 영화로 제작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을 만났다.
이 밖에도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야놀자, 블라인드 등의 기업이 미국 상장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론화시키진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검토 중인 곳까지 합치면 최소 10곳이 넘을 것이란 게 대체적인 중론이다.
IT 기업들 외에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 역시 미국 나스닥 상장을 검토하는 곳이 상당수다. 앞서 지난해 11월 한독과 제넥신이 최대주주로 있는 미국 바이오벤처 레졸루트는 나스닥 상장에 성공한 바 있다. SCM생명과학과 제넥신 역시 미국 현지에 합작벤처 코이뮨을 설립해 나스닥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코이뮨은 글로벌 제조시설을 갖춘 면역세포치료제 전문 바이오 벤처기업이다.
GC녹십자랩셀도 미국 현지 법인 상장을 준비 중이다. GC녹십자랩셀의 미국 관계사 아티바 바이오테라퓨틱스는 지난 4월 9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증권신고서를 제출했다. 앞서 6일엔 미국 월스트리트 투자은행(IB) 크레디트스위스와 웰스파고에서 바이오 분야 시니어 애널리스트로 근무한 마이클 E 피엄을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영입하기도 했다.
자연살해세포(NK세포) 관련 원천과 제조 기술을 보유한 아티바 바이오테라퓨틱스는 GC녹십자그룹이 전략적투자자(SI)로 설립을 주도한 기업이다. GC녹십자그룹 지주회사인 GC와 GC녹십자랩셀은 아티바 설립 초기 각각 54%, 31%의 지분을 출자했다.
이 밖에도 엘앤케이바이오, 이뮨온시아, 로킷헬스케어 등 여러 바이오사들과 그 합작사들이 미국 증시 상장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쿠팡 효과’를 목격한 국내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시류는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이미 글로벌 벤처캐피털과 사모펀드를 주주로 유치해 자본의 세계화에 성공한 유니콘들과 바이오 기업들이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 자본시장에 진출을 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평가다. 국내 시장을 넘어 기업 위상을 세계적으로 높일 수 있고 투자자와 소비자 신뢰도도 한층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 확장에도 유리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바이오 기업들의 경우 글로벌 네트워크 확보에 있어서도 매력적인 측면이 있다. 글로벌 임상을 준비하기 용이하고 미국 FDA(식품의약국) 허가를 받아낼 경우 그 가치가 국내 허가보다 훨씬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LA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코믹콘’에서 네이버 웹툰 작가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선 팬들의 모습
▶20년 만에 돌아온 미국 상장 열풍
실패 사례 딛고 성공신화 쓸 수 있나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미국 상장 열풍이 부는 건 ‘닷컴 버블’ 이후 약 20년 만이다. 삼일회계법인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20년 1분기까지 16년간 한국 기업들의 미국 상장 실적은 뉴욕거래소 10건, 나스닥 1건 등 총 11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기업 중 최초로 나스닥 시장을 노크한 기업은 초고속인터넷을 서비스하던 두루넷이다. IT 버블이 한창이던 1999년 11월 한국 기업 최초로 나스닥에 상장한 두루넷의 티커(Ticker)는 KOREA였다. 그러나 버블이 꺼지자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실적부진이 이어지며 상장 유지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국 2003년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스닥에서 퇴출당한 바 있다. 두루넷 이후 미래산업·이머신즈·하나로텔레콤·웹젠 등이 2000년대 초반 나스닥에 상장했지만 짧게는 1년, 길어도 10년을 넘지 못하고 상장 폐지를 당했다.
2000년 3월 상장 후 2001년 4월 퇴출당한 이머신즈는 주가가 1달러 미만으로 떨어져 상장 폐지되기도 했다. 거래량 부진과 연 수십억원에 달하는 상장 비용 부담도 문제였다. 닷컴 버블 당시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주요 IT 기업 중 현재 ‘그라비티’만 나스닥에 남아 있다.
김동희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이에 대해 “쿠팡 이후 상장한 기업들이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따라 IT 기업들의 미국행이 계속될지 가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위험부담이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국 증시에 상장하기 위해서는 국내 증시에 상장할 때보다 비용 부담이 10배까지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례로 쿠팡의 경우 상장 주관 비용으로 2000억원을 썼다고 한다. 당초 나스닥 상장을 고려한 SK바이오팜은 본사가 서울에 위치한 점, 나스닥 상장 시 상장 유지비에 대한 부담 등을 이유로 국내 상장으로 방향을 틀기도 했다.
이러한 위험에도 한국 기업들이 미국으로 향하는 이유는 상장했다는 것만으로 전 세계 투자자들 사이에서 관심을 모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거래소보다 상장 요건이 덜 엄격하다는 이유도 있다. 그동안 적자를 내는 국내 기업은 상장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성장 잠재력이 있어도 상장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2017년부터 상장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도 잠재력이 있는 기업에 상장 기회를 주는 ‘테슬라 요건’을 시행 중이지만, 4년간 7개 기업만 이 제도를 통해 코스닥에 상장했을 뿐이고 그마저도 바이오 기업이 대부분이었다. 쿠팡이나 마켓컬리 등 이커머스 기업의 미국행은 까다로운 상장 심사를 피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니콘의 이탈로 코스닥 경쟁력 약화
차등의결권 등 제도적 유인책 시급
쿠팡에 이은 유니콘 기업들의 엑소더스가 현실화되자 국내 자본시장은 고심에 빠졌다. 기업들의 입장에서 미국 등 해외 자본시장에서 성공하는 사례는 국내 기업들에 상당히 긍정적이지만 대형 유망주들이 해외 증시로 발길을 돌릴 경우 국내 자본시장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장기적으로 우량한 유망 기업이 미국에 상장하고 국내 증시에는 성장 가능성과 투자가치가 낮은 기업들만 국내 상장을 추진해 국내 증시의 매력이 하락하고 이로 인해 투자자와 우량 기업이 국내 증시를 외면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증시 상장 요건 완화를 비롯해 유니콘 기업의 경영권 보호 장치 마련에 서둘러 대어 상장을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유니콘 기업은 과거 전통적인 기업과 달리 해외 벤처캐피털(VC) 투자자금을 기반으로 성장,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희석되어 비율이 낮은 경우가 많다. 상장 이후 주식비율로 의결권을 가지게 될 경우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상장제도 개편과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단을 마련함으로써 유니콘 기업들이 국내 증시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를 위한 장치 중 하나가 바로 차등의결권이다. 일례로 쿠팡의 김범석 의장은 차등의결권을 적용받아 실제 지분율은 10.2%에 그치지만 미국 쿠팡Inc 이사회에서 76.7%의 의결권을 갖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를 포함한 세계 주요 5대 증권시장에서는 한 주당 여러 의결권 부여를 허용하는 차등의결권제도를 도입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와 같은 제도가 없다.
이러한 문제를 깨닫고 현재 법 개정 등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가시화된 성과는 아직 없는 상황이다. 한국상장사협의회는 최근 낸 보고서를 통해 “차등의결권제는 단순히 경영권 보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거래소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글로벌 거래소 간 경쟁 관점에서 차등의결권제 도입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쿠팡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한국거래소는 자체적인 제도 개선에 나섰다. 유가증권시장 상장 과정에서 매출과 영업이익, 수주잔액 시장점유율 조건을 만족하지 못해도 시가총액이 1조원을 넘으면 심사를 면제하고 매출액과 영업이익 변화를 통해 현금 흐름이 기대되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을 허용하기로 했다. 아울러 차등의결권과 유사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의 활용도 유도해나가기로 했다. 이 밖에 기존에는 6~7일이 걸렸던 청약 이후 상장까지의 기간을 3~5일로 줄이기로 한 것이다.
손병두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최근 국내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과 간담회를 열고 국내 유니콘 상장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손 이사장은 이날 국내 유니콘의 원활한 상장을 위해 창업자와 2대, 3대 주주의 의결권 공동행사 약정이 적극 활용되도록 유도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국내 증시의 고질적인 저평가 상태 해소를 위한 정책적인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 시장의 상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업가치와 미국 시장을 택했을 때 기업가치와의 근본적인 괴리를 해소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 시장의 저평가된 밸류에이션 해소를 통해 미국 증시 수준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다면 굳이 큰 비용을 내가며 해외로 갈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