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내 주식시장에 ‘동학개미운동’이 일어나며 개인 투자자들의 직접 투자 열풍이 불었다. 동학개미운동은 과도한 레버리지로 이어지며 영끌(영혼까지 끌어서 투자), 빚투(빚내서 투자)의 부작용도 낳았다. 영끌, 빚투는 올해 초까지도 계속됐지만 최근에는 다소 약해진 모습이다. 올해 주식시장이 작년처럼 어떤 종목을 사도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본시장에서 영끌이 주춤한 사이 ‘연끌(연금 끌어서 투자)’로 불이 옮겨 붙었다. 연끌은 은행과 보험사 연금 계좌에 잠자고 있는 연금저축과 퇴직연금을 자본시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은행과 보험사에서 증권사로 연금저축과 DC(확정기여)형·IRP(개인형퇴직연금)형 퇴직연금 계좌를 옮긴 연금 가입자들이 수두룩하다. 증권사로 연금 계좌를 옮겨 예·적금에 묶여 있던 연금 자금을 주식형 펀드, 타깃데이트펀드(TDF), 리츠, ETF 등에 직접 투자하며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이다. 부동산과 달리 ‘주식·펀드에 투자하면 필패한다’는 편견에서 깨어난 투자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연금 운용에 눈을 뜬 가입자(투자자)들의 관심은 어떤 식으로 자산을 배분해야 하는지로 모아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1.0%에도 못 미치는 원리금보장상품에 넣어뒀지만 이제 직접 운용을 해서 장기적으로 연 5~6% 정도의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겠다는 각오다.
▶국민연금의 자산배분을 참고하라
국민의 노후소득을 보장하는 연금은 크게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연금저축) 3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건 국민연금이다. 여기에 퇴직연금과 연금저축까지 합쳐 3중 보장체계가 갖춰지면 비교적 안정된 노후생활이 가능하다고 본다. 2020년 말 기준 국민연금 적립금 규모는 833조원이다. 퇴직연금은 255조원이다. 연금저축은 150조원 쌓였다. 합치면 약 1300조원 규모다.
세 종류의 연금 중에서도 압도적인 규모를 가진 국민연금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전문가들이 국민을 대신해 운용한다. 기금운용본부의 장기 수익률 목표는 연 5~6% 수준이다.
이 수익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금운용본부는 830조원의 재원을 국내주식, 해외주식, 국내채권, 해외채권, 대체자산 등에 골고루 나눠 투자하고 있다. 올해 국민연금의 자산배분 목표비중은 국내주식 16.8%, 해외주식 25.1%, 국내채권 37.9%, 해외채권 7.0%, 대체자산 13.2% 등이다.
국민연금은 이렇게 국내외 주식과 채권, 부동산 등 대체자산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연 5~6%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올리는 방향으로 운용되고 있다. 실제로 1988년 기금운용을 시작한 후부터 2020년까지 국민연금의 누적 연평균 수익률은 6.21%에 이른다.
하지만 대부분 원리금보장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는 퇴직연금의 장기 수익률 성적표는 초라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퇴직연금의 최근 5년 연평균 수익률은 1.85%에 그친다. 최근 10년 수익률도 2.56%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많은 전문가들은 퇴직연금도 장기적으로 국민연금 수준인 연 5% 정도의 수익률 목표를 설정하고 국내외 주식, 채권 등에 분산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때 국민연금의 자산배분 비중이 중요한 참고 기준이 된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처럼 자산배분을 하면 시장 상황에 따라 부침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연 5% 수익률 달성은 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다만 일반 국민이 국민연금처럼 스스로 자산배분을 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알아서 자산배분을 해주는 TDF나 EMP펀드가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직접 자산배분 어려우면 TDF와 EMP
퇴직연금은 은행이나 보험사에 그냥 두면 연 1%의 수익률을 거두기도 어렵다. 반면, 퇴직연금 자금을 국민연금의 자산배분 비중을 참고해 직접 운용하면 장기적으로 연 1%보다는 높은 수익률을 거둘 수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로 가입자가 직접 운용할 수 있는 퇴직연금 자금인 DC형과 개인형 IRP 적립금 규모는 2020년 말 사상 처음 100조원을 돌파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중 DB형 비중은 2019년 62.4%에서 2020년 60.2%로 2.2%포인트 감소했다. DB형은 기업이 운용하는 퇴직연금으로 가입자인 근로자는 정해진 은퇴시점에 회사로부터 미리 정해진 퇴직금을 수령한다. 기업들은 DB형 150조원 중 95.5%를 안정적인 원리금보장상품으로 운용하고 있다.
반면, 지난해 코로나 팬데믹 이후 비로소 투자에 눈을 뜬 개인들이 늘어나며 전체 퇴직연금 중 DC형 비중은 26.1%에서 26.3%로 증가했다. 개인형 IRP 비중도 11.5%에서 13.5%로 크게 늘었다. 퇴직연금도 이제 은행 예·적금에 방치할 게 아니라 투자를 해서 불려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생업에 바쁜 개인 투자자들이 퇴직연금 자금을 국민연금처럼 자산배분을 해 투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런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등장한 금융투자 상품이 바로 TDF와 EMP펀드다.
TDF는 은퇴시점이 가까워질수록 주식 비중은 줄이고 채권 비중을 늘리는 방식으로 글로벌 분산 투자를 하는 펀드다. 2030, 2040, 2050 등 TDF 상품에 들어가 있는 숫자는 은퇴 시점을 나타낸다. 숫자가 낮을수록 은퇴 시점이 빨리 다가온다는 뜻이기 때문에 채권 비중이 높고, 반대로 숫자가 높을수록 주식 비중이 높다. 즉, 공격적인 투자자라면 높은 숫자를 선택하고 보수적인 투자자라면 낮은 숫자의 TDF 상품을 선택하면 된다는 뜻이다.
TDF는 알아서 자산배분을 해주기 때문에 퇴직연금 선진국인 미국과 호주에서도 최우선 투자 대상으로 꼽힌다. 국내 퇴직연금 투자자들 중에서도 다른 상품에 가입하지 않고 한 가지 종류의 TDF에만 퇴직연금 자금을 모두 투자하는 사례도 많다.
편리성을 갖춘 데다 안정적인 수익률 달성까지 가능해 국내 TDF 가입자는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펀드 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016년 말 756억원이던 국내 TDF 설정액은 지난 3월 말 4조4811억원까지 늘어났다. 펀드 개수도 2016년 25개에서 최근 119개까지 증가했다. 가장 대표적인 TDF 상품인 ‘미래에셋 전략배분2045’의 경우 최근 1년 수익률은 16.00%, 3년 수익률은 29.42%에 이른다. ‘한국투자TDF알아서2045’도 1년 수익률 15.88%, 3년 수익률 26.35%를 기록하고 있다.
EMP(ETF Managed Portfolio·ETF 자문 포트폴리오) 펀드도 알아서 분산 투자를 해주는 대표적인 금융 상품이다. EMP펀드는 수많은 ETF에 자산의 절반 정도를 분산해서 투자하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따라서 하나의 ETF에 투자했을 때보다 변동성을 줄일 수 있고 분산 투자가 가능하다. 다만, 많은 ETF를 펀드 안에 담기 때문에 수수료가 다소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KB다이나믹4차산업혁명EMP펀드’는 최근 2년간 약 65%의 수익률을 기록해 EMP 펀드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미래에셋 글로벌코어테크EMP펀드’도 2년 수익률이 60%가 넘는다.
▶세제혜택과 투자 시 주의사항
은행, 보험사 계좌에 잠자고 있는 퇴직연금을 깨워 펀드나 ETF에 투자하는 가입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투자 시 주의해야 할 점도 적지 않다. 우선 세금 문제를 잘 살펴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퇴직연금 계좌에서 투자하는 모든 금융상품에 대한 과세는 연금으로 수령하는 시점까지 이연된다. 만약 퇴직연금 계좌로 펀드나 ETF 여러 종목에 투자해 손실과 이익을 합쳐 손실이 있으면 과세하지 않고, 이익이 발생했으면 연금 인출 시점에 따라 55~70세 5.5%, 70~80세 4.4%, 80세 이상 3.3%의 저율 분리과세를 한다. 퇴직연금 계좌에는 손익 통산과 과세이연, 저율분리 과세 혜택이 모두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반 증권계좌에서 국내 주식형 펀드나 ETF에 투자를 하면 2022년까지 매매차익에 대해 과세를 하지 않는다. 2023년부터는 매매차익 5000만원을 공제하고 20%의 소득세를 부과한다. 따라서 2023년 이전에 퇴직연금을 수령할 계획이라면 국내 주식형 펀드나 국내 ETF에 투자하면 세법상 불리하다.
반면, 해외 주식형 펀드나 국내상장 해외 ETF에 투자할 경우 은퇴 시점과 상관없이 퇴직연금 계좌에서 투자하는 게 유리하다. 일반 계좌에서 투자해 매매차익이 발생한 경우 15.4%의 소득세가 부과되지만 퇴직연금 계좌에서는 3.3~5.5%의 세금만 부과되기 때문이다.
퇴직연금 계좌에서는 투자할 수 있는 대상에도 제한이 있다. 우선 국내주식, 해외주식 직접 투자는 금지된다. QQQ, ARKK 등 해외에 상장된 ETF에 투자하는 것도 막혀 있다. 국내·해외 주식형 펀드와 국내 상장 주식형 ETF에 투자할 때 주식은 위험자산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70% 이상 투자할 수 없다. 따라서 국내 주식형 펀드에 70%를 투자했다면 나머지는 채권형 펀드에 투자해야 한다.
예외도 있다. TDF는 주식·채권에 분산 투자하는 상품이기 때문에 퇴직연금 자산의 100%까지 투자할 수 있다. 또 상장 리츠(REITs)는 한 종목당 30%까지만 퇴직연금 계좌로 투자를 허용한다. 리츠는 연 4~5% 수준의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부동산 간접투자 상품이다. 퇴직연금 계좌로 일반 주식은 거래할 수 없지만 리츠만 예외적으로 종목당 30%까지 투자가 가능하다. 퇴직연금 계좌는 수익성은 물론 안정성도 중요하기 때문에 레버리지나 인버스 상품 투자도 금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