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제 위기 넘긴 재개발·재건축, 유망 투자처는? 코로나19 사태 찬바람에도 압구정·영등포 등 ‘Go’
정지성 기자
입력 : 2020.04.03 10:40:16
수정 : 2020.04.03 16:06:34
지지부지한 정비사업장에 대한 ‘사형선고’인 ‘정비사업 일몰제’를 앞두고 코너에 몰렸던 서울 내 재건축·재개발 단지들이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사업 추진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시는 ‘정비사업 일몰제’ 적용을 받는 구역(40개 구역) 가운데 일몰기한 연장 신청을 한 24개 구역에 대해 주민들의 적극적인 사업추진 의지가 있는 구역은 연장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24개 구역에 대해 자치구를 통해 각 구역별 추진경위와 주민동향을 면밀히 파악해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이번 발표로 일몰제 대상인 전체 40개 구역 중에서 연장 신청을 한 24개 구역에 더해 기존에 이미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했거나 인가를 받은 15개 구역을 합쳐 총 39개 구역이 사실상 정비사업 일몰제 적용을 피하게 됐다. 사업방식 변경을 위해 스스로 구역 해제를 원한 나머지 1개 구역(신반포26차)은 소규모 재건축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할 방침이다. 이처럼 서울시 내 알토란 같은 핵심지역 정비사업장들의 수명이 대부분 연장되면서 부동산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된 매물을 선점하려는 투자자들의 발길이 빨라지고 있다.
▶따끔한 ‘자극제’ 된 정비사업 일몰제
정비사업 일몰제는 사업 추진이 안 되거나 더딘 곳을 정비구역에서 해제하는 절차다. 정비사업이 오랜 기간 늦어질 경우 주민 갈등이 심해지고 매몰비용 부담이 커지는 문제를 막기 위해 도입됐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하 도정법)에 따라 지난 2012년 1월 31일 이전에 정비계획이 수립된 구역에서 승인된 추진위는 2020년 3월 2일까지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해야 하며, 이 기간을 초과하면 정비구역 해제 대상이 된다. 다만 일몰기한이 도래한 정비구역은 토지 등 소유자 30% 이상의 동의를 받거나 자치구청장의 판단으로 2년 범위 안에서 일몰기한을 연장할 수 있다.
정비사업 일몰제는 지지부진하던 재개발·재건축 사업장에 ‘이대론 사업 자체가 무산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와 주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이게 만든 ‘촉진제’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예가 서울 송파구 잠실 한강변의 장미아파트 1·2·3차다.
장미아파트 재건축추진위원회는 지난 2월 말 열린 재건축 조합창립 총회에서 전체 주민의 81.9% 동의율을 확보해 조합설립에 성공했다. 아파트 주민과 상가 소유주 동의율은 각각 85.4%, 62.3%를 기록했다. 추진위가 구청에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하려면 아파트·상가 소유주 동의율이 각각 50%, 전체 주민 동의율이 75%를 넘겨야 한다.
현장에는 최근 코로나19 확산 우려에도 전체 조합원의 20%(700명)가 넘는 조합원들이 참석했다. 주택법 시행령에 따르면 조합창립 총회는 조합원 20% 이상이 참석해야 한다. 추진위는 이날 참석자의 체온을 측정하고, 대구·경북지역 방문자의 출입을 금지하는 등 예방 조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미아파트의 조합설립은 지난 2005년 정비구역 지정·고시 후 무려 15년 만이다. 이 단지는 지난 2016년 6월 통합 재건축 추진위 승인을 받은 뒤 조합설립을 추진했지만, 상가 소유주들의 반대로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설립된 상가 재건축협의회가 상가 소유주에 대한 설득에 나서면서 재건축 동의율이 크게 늘었다.
상가재건축 협의회 관계자는 “아파트 재건축 추진위 측과 협의한 내용에는 상가 소유주에게 유리한 내용이 포함돼 있어 설득에 나섰다”며 “특히 일몰제 적용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지난 1979년 준공된 장미아파트는 올해 준공 41년 차를 맞는다. 총 3522가구 규모의 단지로 인근에 있는 잠실주공5단지와 함께 잠실 한강변의 마지막 재건축 단지로 꼽힌다. 이 단지는 잠실대교와 잠실철교 남단 한강변지구에 위치하고, 서울지하철 2·8호선 환승역인 잠실역과 2호선 잠실나루역을 걸어서 이용할 수 있다.
강남권 재건축 약세 속에서도 최근 장미아파트에서는 매물이 귀해졌다는 게 인근 공인중개업소의 설명이다. 인근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조합원 지위를 얻으려는 수요자들의 문의가 늘었다”며 “지금은 가끔 나오던 급매도 나오지 않아 매물이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강남역 역세권 노른자위 땅에 자리 잡은 서초진흥아파트도 재건축 사업 추진 16년여 만에 조합설립총회를 개최하면서 사업에 청신호가 켜졌다. 지난 2월 초 열린 서초진흥아파트 재건축조합 창립총회에 전체 조합원 731명 중 706명(96.6%)이 동의서를 제출해 조합설립에 필요한 75% 동의율을 훌쩍 넘겼다.
현장에는 전체 조합원 중 절반이 넘는 401명이 직접 참석해 높은 사업 열기를 보여줬다. 추진위 관계자는 “정비사업 일몰제를 적용받지 않아야 한다는 조합원들의 공통된 의지로 총회에 상정된 모든 안건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통과됐다”며 “이르면 이번주 안에 구청에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단지는 2004년 첫 번째 추진위를 구성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사업이 지지부진했다. 2009년 2기 추진위를 구성한 뒤에는 사업 용지에 대한 용도지역 변경을 추진하다 규제로 인해 무산되기도 했다. 지지부진하던 사업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3월로 예정된 정비사업 일몰제로 재건축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사업에 소극적이었던 주민들이 일몰제 적용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강남 찬바람에도 달리는 압구정 재건축
최근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 시세가 약세로 돌아선 가운데에서도 일몰제 압박을 벗어난 압구정 재건축 매물은 연이어 신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3월 15일 기준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7일부터 13일까지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실거래가 신고까지 완료한 서울 아파트 거래건수는 355건이다.
이 중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한양8차 전용 201㎡가 48억원(12층)에 팔려 주간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 면적형은 지난해 7월 43억8000만원(15층)에 팔린 바 있다. 8개월여 만에 4억원 넘게 오르며 신고가를 경신한 것이다.
같은 날 압구정동 한양5차 전용 153㎡도 34억원(13층)에 거래되며 신고가를 다시 썼다. 이 면적형은 지난해 10월 33억3000만원에 팔렸다. 5개월 새 7000만원이 올랐다.
압구정동 한양아파트는 강남을 대표하는 재건축 유망주로 꼽힌다. 이 아파트는 1970년대부터 압구정현대와 함께 고급 민영 아파트 시대를 이끌었다. 1977년부터 1984년까지 8차에 걸쳐 33개동 2719가구가 입주했으며 전용면적 44~264㎡의 다양한 면적으로 구성돼 있다. 한양8차는 총 1개동 15층 규모의 90가구로 구성됐다. 한양아파트는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이 단지와 접해 있으며 3호선 압구정역도 가깝다. 성수대교 남쪽을 통해 올림픽대로를 이용하기 편하며, 청담초·중·고가 단지 인근에 있다.
압구정 재건축 단지들은 대부분 아직 조합이 설립되지 않은 초기 단계지만 현재 과도하게 적용되는 정부의 재건축 규제가 앞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으며 묵묵히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압구정지구 특별계획구역5 재건축 추진위원회는 조합설립 준비를 위해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조합설립 동의서를 걷는 중인데 동의율이 75%를 넘어섰다. 압구정5구역은 한양 1·2차로 구성됐으며 총 가구 수는 1232가구다.
현대 1~7차, 현대 10·13·14차, 대림빌라트 등 4065가구로 이뤄진 압구정3구역이나 현대 9·11·12차 등으로 구성된 압구정2구역에 비해 가구 수는 많지 않지만, 한강변에다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갤러리아백화점 등이 가까운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압구정 재건축 아파트들이 규제로 꽉 막힌 상황에서도 사업에 나서는 건 시세 상승을 노리면서 노후화된 주거환경도 개선하기 위해서다. 압구정5구역 조합에 따르면 지난 2018~2019년 2년간 아파트 수리 건수는 204건, 수선유지비용은 약 10억4300만원으로 집계됐다. 조합 측은 “환경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재건축을 추진하는 아파트들은 대부분 입주한 지 30년이 넘어 배관이나 난방, 주차 등의 시설이 열악한 경우가 많다.
한 정비사업 전문가는 “요즘 같이 재초환, 안전진단 강화 등 규제가 쏟아지는 시기에는 재건축을 추진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다만 강남 재건축은 아직 초기 단계인 데다 언제 성사되건 높은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먼 미래를 보고 사업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잠실 장미아파트
▶되살아난 뉴타운 열기
코로나19 사태는 변수
정비사업 일몰제가 시행된 가운데 뉴타운과 인근 정비사업장들이 조합 설립을 통한 일몰제 회피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타운 일대 주거 여건이 정비되고 집값이 상승하는 효과를 직접 목격한 주민들이 재개발에 적극적 태도로 나서는 일종의 ‘학습효과’가 일어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등포구는 최근 신길2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의 설립인가 신청을 승인했다. 2007년 추진위원회가 첫 승인을 받은지 13년 만이다. 신길2구역은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190 일대 11만6896㎡에 아파트 1772가구(임대 315가구)를 공급하는 사업이다.
신길2구역은 정비구역 일몰제가 실시된 이후 처음으로 조합설립인가를 받은 사례다. 지난 2007년 처음으로 추진위 승인을 받았지만 이듬해 닥친 세계금융위기의 여파 등으로 정비사업이 중단됐다. 2016년 시행된 일몰제 대상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18년 11월 다시 추진위가 구성됐고 동의서 징구를 거쳐 지난 1월 조합창립총회를 여는 데 성공하며 일몰제 유예 막차에 성공적으로 탑승했다.
업계에서는 신길2구역의 부활에 최근의 집값 상승과 함께 신길뉴타운의 성공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신길2구역에서 1㎞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한 신길뉴타운은 2015년 11구역 래미안프레비뉴가 입주를 시작한 이후 주거환경이 대폭 개선됐다. 지난해 12월 3구역 더샵파크프레스티지분양에는 일반분양 187가구에 2만 명이 넘는 청약자가 몰리며 114대 1이라는 높은 평균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가격도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래미안에스티움 전용 85㎡ 매물은 지난해 말 14억원에 실거래되며 이 일대에서 같은 면적으로는 최고가를 경신했다.
미아 4-1주택재건축과 9-2주택재건축 구역도 추진에 불이 붙었다. 두 구역도 신길2구역과 마찬가지로 미아뉴타운으로부터 1㎞ 남짓 떨어진 뉴타운 인근 정비사업장이다. 미아4-1구역과 미아9-2구역은 각각 지난달 1일과 15일 조합창립총회를 개최한 데 이어 24일과 26일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했다. 미아9-2구역 추진위 관계자는 “일몰제 적용이 임박하면서 소유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외에도 장위뉴타운 3구역이 지난해 5월 조합설립인가를 받은 데 이어 길음뉴타운 5구역이 조합 설립에 성공하며 일몰제를 미리 빠져나갔다. 전농답십리뉴타운 인근 청량리6구역도 지난해 7월 조합설립인가를 받았다.
다만 일몰제 연장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사태가 사업 진척에 미칠 영향에는 주의해야 한다. 서울시에 따르면 코로나19로 도시계획위원회를 포함한 각종 대면 위원회가 전면 중단됐다. 정비구역 일몰제 여부를 심의하는 도시계획위원회는 당초 오는 4일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현재 무기한 연기된 상황이다. 당분간 조합설립총회 등도 개최하기 어렵다. 서울시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조합 총회 등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한 탓이다.
건설사들도 영향을 받고 있다. 조합 일정이 밀리면 시공사 선정 등 후속 단계를 밟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건설현장 점검이나 본사의 현장 지원활동도 화상회의나 이메일 등 원격으로 가능한 일만 진행하고 있다”며 “워낙 전례가 없는 상황이라 경북·대구 등 지방은 물론 해외 출장 계획도 섣불리 잡기 어려워 모든 일정이 밀린 상태”라고 전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일몰제를 피했다고 해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정비사업을 빠르게 강행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고 주택 경기도 조정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재개발과 재건축은 단기 투자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장기적 투자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