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은행 또는 핀테크 앱에서 은행 계좌조회는 물론 입·출금 업무까지 볼 수 있는 ‘오픈뱅킹’ 서비스가 10월 말부터 시작됐다. 지난 2월 금융위원회가 ‘금융결제 인프라 혁신방안’을 발표한 후 8개월 만에 현실화된 시범 운영이다. 이미 핀테크 플랫폼 토스, 카카오페이, 뱅크샐러드 등에서 통합 자산 조회 서비스를 선보여 많은 소비자가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지만, 오픈뱅킹은 기존 서비스의 안정성·보안성을 높이는 동시에 기존 시중은행의 장벽을 허물 것으로 기대된다.
오픈뱅킹의 정의와 쓰임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서정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정의를 빌리면 ‘제3자가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고객의 금융 정보에 안전하고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식 또는 제도’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한국형 오픈뱅킹이 당장 고객 입장에선 ‘계좌 통합 조회’ 정도의 서비스로 인식될지 몰라도, 오픈뱅킹의 도입 목적은 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오픈뱅킹이 노리는 건 은행이 독점하고 있던 고객 개개인의 금융정보 활용성을 높이는 데 있다. 개인들의 신용정보를 알기 쉽게 분석해 자산 관리에 도움을 주고, 대출 금리를 합리적으로 낮춰주는 등의 새로운 금융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마이데이터 산업’의 활성화다.
그뿐 아니라 지급결제 분야에서도 신용카드 외에 다양한 직불결제 수단이 활성화될 수 있다. 중국의 알리페이·위챗페이처럼 새롭고 간편한 결제서비스를 출현시키기 위해 기존의 공고한 카르텔을 깨겠다는 금융당국의 복안이다. 신용카드 가맹점이 부담해야 했던 수수료 비용을 낮출 방안도 이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금융 소비자의 편의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금융 플랫폼의 혁신 경쟁을 기존보다 한 차원 높일 것으로 기대되는 오픈뱅킹. 구체적으로 소비자 입장에서 무엇이 달라지는지, 어떻게 보수적인 금융계 혁신을 촉진시키겠다는 것인지 그 내용을 파헤쳐 본다.
▶오픈뱅킹, 앱 하나로 다 된다
최근 시중은행들 사이엔 ‘슈퍼앱’ 바람이 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은행 한 곳을 이용하려면 계좌 조회, 신규 계좌 설립, 간편 조회, 펀드 가입, 대출 신청 등 서비스마다 별도의 앱을 깔아야 하는 불편이 컸었다. 서비스마다 앱을 깔아야 하니 휴대폰 용량을 많이 차지하는 건 물론이고 시간도 오래 걸려 간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지난해 통합 모바일 플랫폼을 표방한 신한은행의 쏠(SOL)을 시작으로, KB국민은행 리브(Liiv), 우리은행 원(WON), KEB하나은행 하나원큐(1Q), NH농협은행 올원뱅크 등 저마다 모바일 앱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디지털 금융 시대의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이 같은 변화에는 카카오뱅크·케이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과 토스·뱅크샐러드 등 핀테크 플랫폼 업체의 등장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은행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오픈뱅킹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일종의 ‘은행 간 통합’을 구현한다. 하나의 은행 앱 또는 핀테크 앱에서 모든 계좌를 관리할 수 있으니, 일일이 여러 은행 앱을 왔다 갔다 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얘기다. 10월 30일부터 시작된 오픈뱅킹 시범 운영에선 우선 대형 은행 10곳이 이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행 계좌 개방에는 인터넷전문은행을 포함한 시중은행 18곳 모두 참여한다.
핀테크 업체를 포함한 본격적인 서비스 제공은 이번 시범 시행을 거쳐 올해 안에 시작하겠다는 계획이다.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10월 현재 오픈뱅킹 사전 이용 신청 업체는 18개 은행을 포함해 총 146개에 달한다. 토스(비바리퍼블리카)와 뱅크샐러드(레이니스트), 네이버페이, 핀크, 롯데멤버스 등도 이름을 올렸다.
오픈뱅킹으로 달라지는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우선 시범운영 단계에선 10개 은행 앱에 각각 오픈뱅킹 관련 메뉴가 생기고, 고객은 여기에 접속해 가입·동의 절차를 거친 뒤 스스로 타행 계좌번호를 입력해 등록하게 된다.
예를 들어 A은행을 월급통장으로 쓰면서 B은행, C은행, D은행에도 각종 예·적금을 가입해둔 고객의 경우, 이 중 가장 간편하고 믿음이 가는 B은행 앱의 오픈뱅킹에 A~D은행 계좌를 모두 등록해두면 B은행에서 다른 모든 은행 계좌의 조회·송금도 할 수 있게 된다.
향후엔 고객이 일일이 계좌를 입력할 필요 없이, 간단한 인증만으로 개인의 계좌 보유 현황을 일괄 조회하고 등록할 수 있는 방식도 구현할 예정이다. 앞서 2017년 금융결제원이 선보인 계좌정보 통합관리 서비스 ‘어카운트인포’와 연계하는 방식이다.
▶오픈 API가 뭐길래
얼핏 보면 기존 핀테크 플랫폼의 통합 자산 조회 서비스와 오픈뱅킹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그러나 뒷단을 들여다보면 구현 방식과 비용 등 측면에선 변화의 폭이 작지 않다. 기존에는 핀테크 업체들이 고객 자산 정보를 불러오려면 각각의 은행과 개별 제휴를 맺어야 서비스 제공이 가능했다. 또 고객이 공인인증서를 입력하면 각 은행 사이트에 접속해 관련 정보를 긁어오는 방식을 써왔다. 이를 ‘스크래핑’이라고 한다.
반면 오픈뱅킹은 핀테크 기업이 금융 서비스를 편리하게 개발할 수 있도록 은행의 금융 기능과 콘텐츠를 표준화된 형태로 제공한다. 이 기반 기술을 오픈 API(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 인터페이스)라고 한다. 금융결제원 관계자는 “오픈 API가 활성화되면 간단한 인증만으로도 더 안정적으로 금융 정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핀테크 업체가 기존 은행권에 내야 했던 과도한 이용료도 10분의 1 수준으로 합리화된다. 기존에는 핀테크 업체가 은행 송금·결제망을 이용할 때 건당 약 400~500원의 비용을 내야 했다. 고객들은 토스나 카카오페이 등의 ‘간편 송금’을 무료 서비스(또는 횟수 제한 무료)로 알고 있지만, 각 플랫폼이 고객 수를 늘리기 위해 비용 지불을 감수했을 뿐 실제론 무료가 아니었던 셈이다. 이마저도 비용 부담이 크다보니 대형 핀테크 업체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고, 새로 시장에 진입하려는 핀테크 스타트업은 막대한 지불 비용 탓에 감히 시도하기 어려웠다. 국내 핀테크 업체 중 유일하게 기업 가치 1조원을 넘긴 토스가 창업한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이같은 비용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란 진단이 많다.
그러나 오픈뱅킹이 시행되면 핀테크 사업자가 기존 은행망에 지불했던 이용료가 건당 40~50원으로 낮아진다. 플랫폼에서의 월간 거래 금액 100억원, 건수 10만 건을 충족하면 비용은 더 낮은 건당 20~30원 수준이 될 예정이다. 비용 부담이 줄어들 경우 핀테크 업체들이 성장 기회를 갖고 전보다 더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을 여력도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주거래은행’ 없어질라… 은행 위기감 고조
핀테크 업체들의 금융업 진출 장벽을 대폭 낮춰주는 데다 은행 간 장벽까지 낮추게 되면서 은행권엔 긴장감이 감돈다. 특히 오픈뱅킹 서비스는 개별 은행의 고객·핀테크 친화 역량을 드러낼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객이 가장 사용하기 편하고 혜택 많은 금융사 또는 핀테크 앱을 찾아 옮겨다닐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주거래은행’이란 개념이 약화되고 은행이 독점하던 고객도 이탈이 가속화할 수 있다. 점포망이 부족한 은행이더라도 앱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만 좋다면 고객들이 대거 몰릴 가능성도 있다.
한 시중은행 디지털전략본부장은 “오픈뱅킹은 그간 은행이 독점하고 있던 고객과의 채널, 송금 등의 기능을 핀테크 업체와 공유하는 것”이라며 “앞으로는 고객이 은행을 직접 통하지 않고 핀테크 플랫폼을 거쳐서 은행 상품에 가입하는 것이 보편화될 수 있어 은행 영업에서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반면 소비자 입장에선 금융사의 고객 ‘잡아두기(Lock-in)’ 경쟁이 치열해지면 더욱 질 좋고 특색 있는 금융서비스의 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최근 은행들은 앞서 선보인 각각의 통합 모바일 앱을 ‘은행 안의 은행(Bank In Bank)’ 수준으로 고도화해 고객 유치에 집중한다는 방침을 잇달아 발표했다.
우리나라보다 일찍, 지난해 1월부터 오픈뱅킹을 도입한 영국의 사례를 봐도 은행들은 차별화된 서비스로 고객들 잡아두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영국 HSBC은행은 별도로 오픈뱅킹 앱을 만들어 고객의 모든 은행 계좌, 대출, 카드 관련 데이터를 집약해 제공할 뿐 아니라 고객의 지출·예산을 30개 항목으로 나눠 세부적으로 관리해준다. 영국의 모바일은행 스탈링뱅크도 별도 앱에서 고객 계좌를 집약해 제공하는 것은 물론, 투자상품·포인트 수집·연금 확인·주택담보대출 중개 등 다양한 외부 서비스를 결합해 제공하는 식으로 서비스를 차별화하고 있다.
심지어 영국의 오픈뱅킹은 9개 은행이 참여해 타행 계좌 조회, 근처 타행 지점 검색, 오프라인 ATM 연동 등의 수준에 머물렀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한국식 오픈뱅킹은 영국과 달리 자금 이체라는 금융의 핵심 업무를 오픈뱅킹 공동 시스템에 포함시켰다는 점에 차별점이 있다”며 “은행 입장에선 당장 핀테크 업체들로부터 받던 은행망 이용 수수료 수입은 줄겠지만, 직접 오픈뱅킹에 참여하면 고객 접점 채널도 늘고 새로운 사업수익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착 위해 개인정보 보안 우려 해소해야
이처럼 지금으로선 금융 혁신 활성화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되는 오픈뱅킹이지만, 안정적인 제도 정착을 위해선 극복해야 할 문제도 있다. 민감한 개인 금융정보의 활용도가 높아지는 만큼 개인정보 보안 문제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앞서 영국의 경우 오픈뱅킹을 도입하면서 은행이 핀테크 업체에 오픈 API를 제공하는 것을 의무화하면서도 개인정보 보호 규정을 강화했는데, 여전히 고객들은 이 부분에 불안감을 느껴 초기 인지도가 낮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현지 언론 파이낸셜타임즈에 따르면 영국 오픈뱅킹 도입 약 1년 만인 지난 1월 영국인 2000명 대상 설문조사에서 4명 중 1명만이 오픈뱅킹에 대해 들어봤다고 응답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은 5명 중 1명에 불과했다. 개인정보가 여러 업체에 공유된다는 데 대한 프라이버시 문제, 고객 편의보다 금융사 수익에 보탬이 될 것이란 불신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에선 데이터 경제 활성화와 함께 개인정보 보호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데이터 3법(개인정보 보호법, 신용정보법,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등)’이 발의됐지만 국회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11월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인정보 보호법 개정안은 개인정보를 비식별화한 ‘가명정보’와 ‘익명정보’ 등으로 세분화해 정의하고, 통계 작성, 과학적 연구, 공익적 기록 보존 등의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 점이 특징이다. 기존 법체계에선 개인정보의 개념과 활용 범위가 모호했고, 사생활 보호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회에 발의된 개정안에는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며 “산업 발전과 법·제도 정비가 상호 보완하면서 나아가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금융정보가 개방되니 개인정보 보호에 대해 우려가 커질 수는 있지만 더이상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글로벌 데이터 경제 흐름에 더 뒤처져선 안된다”며 “국회가 조속히 법안을 통과시켜 데이터 경제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을 법 제도로 뒷받침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속성 위한 법 개정까지도 먼 길
아울러 오픈뱅킹 제도 자체의 지속성을 위한 입법 과제도 남아있다. 현재 구축된 오픈뱅킹 시스템은 은행권과 핀테크 업체 간 실무협약을 통해 시스템을 연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순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오픈뱅킹을 통한 서비스 개선이 실제 구현되려면 금융기관의 정보제공 의무가 법으로 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도 비슷한 입법 선례가 있다. 일본은 지난 2017년 은행법을 개정해 ‘은행은 API 이용업체 간 제휴·협력에 관한 방침을 결정하고 공시해야 한다’는 의무를 명시했다. 유럽연합(EU)도 지난 1월 결제서비스지침(PSD2)을 통해 은행 API를 핀테크 기업에 수수료 등에 있어서 차별없이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의무화했다.
금융당국은 이 같은 내용을 담아 연내 전자금융법 개정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은행이 일정 요건을 갖춘 핀테크 사업자 모두에게 자금이체 관련 API를 제공하고, 이체 처리·비용 등에서도 차별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다.
또 당국은 중장기적으로 핀테크 기업이 충분한 건전성과 전산 역량 등을 갖춘 경우 은행에 의존할 필요 없이 직접 계좌 발급과 결제 서비스 제공 업무를 할 수 있게끔 한다는 방침이다.
이들 업체는 향후 법 개정을 통해 전자금융법상 ‘종합지급결제업’ ‘마이페이먼트 산업’ 등으로 지정될 수 있다. 고객 입장에선 은행 계좌를 연동시킬 필요 없이, 핀테크 플랫폼에 직접 현금을 보관하거나 결제·송금할 수 있게 된다. 플랫폼 중개를 통한 금융상품 가입 등 간편 자산관리도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런 아이디어가 현실화되기까지는 간편 금융 플랫폼을 통한 투자상품 불완전 판매 논란, 금융정보 보안에 대한 불안감 해소 등 금융 소비자 보호를 위한 기술적·사회적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