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부회장 중심 지배구조 판 짜는 현대차그룹, 엘리엇 방어 후 현대건설·엔지니어링 또 합병설
문일호 기자
입력 : 2019.04.30 16:21:06
수정 : 2019.04.30 16:21:50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투기자본 엘리엇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방어한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의 새 판을 짤 것이란 예상이 증권가에서 솔솔 나오고 있다.
그 방식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의 지분율이 높은 계열사를 중심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끊고 정 부회장의 후계 구도를 탄탄히 하는 방식이 될 것이란 분석이다. 작년에 추진했던 현대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의 합병 방식도 결국 정 부회장이 현대글로비스의 지분을 23.29%나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계열사 중 비상장사이면서 정 부회장의 지분율이 19.47%에 달하는 현대오토에버도 지난 3월 주식시장에 상장되면서 정 부회장의 자금원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 현대엔지니어링(11.72%)이 급부상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엘리엇 방어 성공, 다음은 지배구조
정의선 부회장은 지난 3월 22일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정기 주총에서 각각 대표이사에 올랐다. 같은 달 15일 열린 기아차 주총에서도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지난 2005~2009년에 기아차 대표를 지낸 바 있는 정 부회장은 기아차 비상근이사에서 이번에 사내이사로 전환하면서 그룹 장악력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제철 사내이사 자리까지 포함하면 정 부회장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 4곳을 책임지게 됐다. 현대차그룹은 작년에 엘리엇의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정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분석이다.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의 초반 공세는 거셌다. 작년 3월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을 핵심으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놨는데 엘리엇이 주주들을 대표한다면서 이 개편안에 대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엘리엇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지분을 각각 2.9%, 2.6%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현대차그룹은 이 같은 지배구조 개편안을 잠정 보류하겠다고 선언했다. 엘리엇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올 3월 주총을 앞두고 주주제안 형태로 고액 배당을 요구하는 안을 그룹에 제시한 것이다.
엘리엇은 현대차그룹이 초과 자본을 줄이고 이를 주주에게 환원해야 한다며 현대자동차에 대해 사측 제안(주당 3000원)의 7배가 넘는 주당 2만1967원을 배당하라고 요구했다. 현대모비스에 대해서도 주당(보통주) 2만6399원(사측 제안 4000원)의 배당을 제안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주총에서 완패했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총에 출석한 주주 중 86%와 85.9%가 각각 사측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같은 주주제안에 앞장선 제임스 스미스 엘리엇 아시아 태평양 총괄대표가 최근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는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엘리엇 공세를 잘 방어하면서 정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에도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올해 주요 계열사의 실적이 개선되고 노사 관계까지 훈풍이 불면서 주변 여건도 갖춰지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3월 12일 성명을 내고 엘리엇이 무리한 배당 요구를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기아차 노사도 같은 달 18일 통상임금 합의안에 서명하면서 8년간 이어진 법정 싸움이 종결됐다.
정 부회장은 연초에 주요 계열사들의 실적에 대해 ‘V자 반등’을 예고하기도 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수그러들면서 미국과 중국 등 수출 시장에서 판매가 회복되고 국내에선 신차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란 자신감이 숨어 있다.
실제 현대차의 영업이익은 지난 2017년 4조5747억원에서 작년 2조4222억원, 올해 3조6445억원으로 반등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는 특히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판매 증가 기대감이 높은 편이다.
현대차는 이달 미국에서 코나 보다 작은 SUV인 ‘베뉴’를 공개했는데 국내에선 올 하반기에 출시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베뉴(엔트리)-코나(소형)-투싼(준중형)-싼타페(중형)-펠리세이드(대형)’로 이어지는 SUV 라인업 구성을 마쳐 소비자들의 선택 폭이 넓어졌다.
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는 “올 들어 인기몰이 중인 팰리세이드 증산 합의까지 더해져 올해 현대차 판매 실적에 청신호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현대제철 역시 같은 기간 ‘V자 반등’이 예상된다. 현대·기아차에 자동차용 철강을 공급하는 현대제철 입장에선 이 같은 신차 효과를 통해 이들 실적이 개선되면 철강값 인상 요인이 발생한다. 현대모비스와 기아차도 역시 신차 효과로 2017년 이후 2년 연속 이익이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강성진 KB증권 연구원은 “올해 주총에서 현대차그룹의 안건들이 엘리엇을 큰 표 차로 누르면서 정 수석부회장이 핵심 지배기업의 지분을 직접 취득하고 지배구조 변화를 조기에 마무리하기 위한 공격적인 계획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건설·엔지니어링 합병 후 순환출자 해소할까
현대차그룹 주총에서 사측이 엘리엇에 완승을 거두면서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작년에 추진했던 지배구조 개편안이 중단된 이후 현대차그룹에서 구체적인 움직임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이 같은 개편안을 설계했던 현대차 임직원들과 국내 대형 로펌, 회계법인·자문사 등으로 구성된 지배구조 개편 태스크포스(TF)팀은 해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TF의 해체는 중단이란 뜻도 있지만 새로운 개편안을 기획하기 위한 수순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현대차그룹은 향후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조율할 부서를 선정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그룹 내부에선 기존 시나리오 중에 차선책을 선택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배구조 개편 부담을 줄이고 경영권 승계를 위해 정 부회장의 지분율이 높은 계열사를 지렛대로 삼을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작년에 현대글로비스에 이어 올해 현대오토에버가 활용된 것도 이같은 배경이 작용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
현대오토에버는 현대차그룹의 시스템통합(SI) 업체다. 그룹사를 대상으로 한 매출이 전체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실적이 안정적이며 현대차그룹이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핵심 계열사로 꼽힌다.
현대오토에버의 최대 주주는 28.96%를 보유한 현대차, 2대 주주는 19.47%(402만주)를 보유한 정 부회장이었다. 지난 3월 28일 주식시장에 상장되면서 정 부회장은 현대오토에버 주식 201만주를 구주매출로 매각해 960억원 상당의 현금을 확보했다. 현재 9.57%(201만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해당 지분 가치는 공모가 대비 60% 상승한 1540억원 수준이다. 증권가에선 정 부회장이 현대오토에버를 통해 확보한 현금으로 지배구조 개편이나 상속세 등의 재원으로 쓸 것이란 예상이다.
다음 차례는 현대엔지니어링이란 분석이다. 정 부회장은 현대엔지니어링의 지분을 11.72% 들고 있다. 그가 보유한 계열사 지분율 중 ‘톱 3’ 안에 든다. 최근 나오고 있는 지배구조 개편안은 같은 건설 업종이면서 종속회사로 묶여 있는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을 합병하는 것이다.
이 같은 업종 연관성 때문에 두 회사는 매년 합병설에 이름을 올렸다. 현대건설 지분이 없는 정 부회장은 두 회사가 합병할 경우 현대엔지니어링 지분율을 지렛대 삼아 합병 회사의 장악력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증권사의 한 연구원은 “정 부회장은 알짜 회사인 현대건설 지분이 없는 대신 같은 업종의 엔지니어링 지분율은 높은 편”이라며 “이럴 경우 오너 입장에선 합병을 통해 지분 가치를 끌어 올려 지배구조 개편 자금으로 활용할 여지가 높은데 작년에 현대글로비스가 활용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작년 현대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의 합병안이 나왔는데 정 부회장은 현대글로비스를 23.29%나 들고 있었지만 현대모비스 지분은 없었다.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은 같은 업종이지만 영역 구분은 확실한 편이다. 현대건설이 주택사업 중심이라면 현대엔지니어링은 비주거 상업건물 중심이다. 영역이 다른 만큼 합병 시너지가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게다가 현대엔지니어링 최대주주는 현대건설(38.62%)이다. 정 부회장은 2대 주주인 셈이다.
현대건설은 30여 곳이 넘는 국내외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종속회사와 관계기업을 분류할 때 철저하게 지분율 ‘50% 룰’을 따르고 있다. 지분율이 50%를 넘으면 종속회사로 분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현대엔지니어링 지분율이 50%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 회사를 종속회사로 삼고 있다.
아파트 브랜드 로고에서도 두 회사의 합병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현대건설은 현대엔지니어링과 함께 아파트 브랜드 ‘힐스테이트’의 로고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로고 아래 두 회사의 이름과 로고를 함께 넣기로 하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전했다.
두 회사를 합병해 정 부회장의 지분가치를 높인 후 이를 매각하는 후속 작업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매각 자금을 통해 정 부회장이 기아차와 현대제철, 현대글로비스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23.3%)을 사들여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방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뉴욕 제이콥 재비츠 센터에서 열린 ‘2019 뉴욕 국제 오토쇼’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된 현대자동차 ‘베뉴(VENUE)’가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다른 그룹들이 취하고 있는 지주사 형태의 방식도 가미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을 합병해 정 부회장의 그룹 장악력을 높이면서 현대모비스에서 모듈 및 AS 부문을 분할해 상장하는 방식도 예상된다. 잔존 모비스가 지주사가 되고 분할되는 사업부문이 사업회사로 나뉘어 지배구조도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너 일가가 지배구조 개편 자금도 마련하면서 순환출자 고리가 끊기고 지주사 체제로 전환 가능하다.
작년 개편안의 최대 문제점이었던 현대모비스 주주의 반대 가능성도 낮은 편이다. 현대모비스 주주들은 향후 지주사와 사업회사 주식을 모두 갖게 돼 주총에서 이 같은 개편안에 반대할 이유가 적다는 것이다. 앞서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안에 대해 엘리엇 등 주요 주주들은 현대모비스의 주주들이 장기적으로 손해보는 ‘딜(거래)’이라며 반대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방식도 여러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일단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의 덩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현대건설의 연간 영업이익은 지난 2016년 1조1590억원에서 2017년 9861억원이었다. 작년 영업이익은 8400억원이었지만 올해 다시 ‘1조클럽’에 가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반해 현대엔지니어링의 이익 규모는 현대건설의 절반 수준이다. 지난 2017년 5144억원이었던 현대엔지니어링의 영업이익은 작년에 4537억원으로 1년 새 12% 감소했다. 이 같은 규모의 차이를 통해 현대건설 주주들의 반발을 예상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현대엔지니어링과의 합병을 통해 현대건설 주주들은 향후 주주가치 희석 및 대주주 오버행(대량 매도) 가능성이 부각돼 주총에서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현대엔지니어링을 상장시킨 이후에 현대건설과 합병시킬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이 방식은 최근 기업공개(IPO) 시장이 위축되면서 장기전을 감수해야 하는 방법이다.
이와 함께 현대모비스를 지주사로 만드는 방식도 현실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차그룹이 지주사 체제를 택할 경우 금산분리법에 따라 금융 계열사들을 매각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캐피탈, 현대카드, 현대차증권 등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카드·캐피탈 등은 자동차 판매와 시너지가 높고 실적 기여도가 높아 그룹 입장에선 포기하기 어려운 사업군이다.
지주사 체제는 대형 인수합병(M&A)에도 불리한 구조다. SK그룹은 최대 현금 창출원인 SK하이닉스가 지주사 SK의 손자회사이다 보니 사실상 국내 M&A에서 손을 끊은 지 오래다. 손자회사는 M&A를 할 때 인수 대상 회사의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한다는 규정 탓이다.
여러 시나리오에도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쉽사리 시작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이 장기전에 돌입할 것이란 의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주총에서 엘리엇 공세를 방어했고 현대오토에버의 성공적인 상장을 통해 지배구조 개편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맞다”면서도 “그러나 각종 규제가 남아 있고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지배구조 개편 압박이 약해지면서 현대차그룹이 굳이 지배구조 개편을 앞당길 명분이 약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