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지갑 속에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혜택이 크게 줄면서 갈수록 매력을 잃고 있는 신용카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번 달부터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 무이자 할부 혜택이 자취를 감췄고, 상품 혜택을 축소한다는 통지문이 카드대금 청구서만큼이나 빈번하게 우편함을 채우고 있다.
“연회비보다 더 뽑을 수 있다”는 말에 수십만원을 주고 가입했던 VVIP카드도 혜택이 슬그머니 줄어들어 만원짜리 카드와 다를 게 없어졌다. 여기에 올해부터 신용카드 소득공제율마저 20%에서 15%로 줄어들었다. 카드 수난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용카드가 이처럼 수난을 겪게 된 것은 포화된 시장에서 카드사들의 과도한 점유율 경쟁이 시장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국내 카드시장은 7개 전업계 카드사(우리카드 제외)와 10여개 은행계 카드사가 치열한 다툼을 벌여왔다. 이 덕분에 한국은 1인당 보유 카드수 4.5장, 결제시장 점유율 60%(2012년 6월 말)의 ‘카드공화국’이 됐다. 지난해 35년 동안 손대지 않았던 가맹점수수료 체계를 개편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카드업계가 대형가맹점에는 수수료율을 낮춰주고, 회원들에게 폭넓은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소형가맹점에는 지나치게 비싼 수수료를 물렸기 때문이다.
올해도 신용카드의 서비스는 갈수록 줄어들 전망이다. 가맹점수수료 체계 개편으로 카드사의 수익이 크게 줄면서 적자를 면하기 위해서는 부가서비스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수료 인상안에 반발한 일부 가맹점들이 이탈하면서 카드결제의 범위도 좁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파트 관리비다. 종전에는 수수료를 받지 않았지만 신 체계를 적용해 수수료가 생기면서 결제대행업체가 가맹계약을 해지할 계획이다. 오는 9월부터는 카드결제가 전면 중단될 예정이다. 4대보험도 상황은 비슷하다. 현재 지역가입자의 보험료 결제가 일부 카드에 한해 계속되고 있지만 정부에서 카드결제수수료를 소비자에 물리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그렇다면 지갑 속 신용카드를 모두 잘라버려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신용카드는 체크카드나 현금에는 없는 장점이 많다. 얼마나 알고 쓰는지가 관건이다.
무이자 할부·청구 할인 이제는 옛말
‘1월 1일부터 카드사 무이자 할부가 중단됩니다.’ 새해 첫날 대형마트 계산대에는 이 같은 팻말이 큼지막하게 붙었다. 소비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2~3개월 무이자 할부는 일시적인 판촉행사 형식이지만 카드사들이 365일 내내 제공하면서 소비자에겐 당연한 것으로 비춰졌다.
무이자 할부는 카드사들이 ‘돈 주고 사는 점유율’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단기간 시장점유율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다. 카드사들은 연간 수조원에 이르는 비용을 전액 부담하면서도 업계 순위를 지키기 위해 무이자 할부를 이어 왔다.
하지만 지난해 말 시행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에서 카드사가 비용을 전액 부담하는 판촉행사를 금지하면서 연초부터 무이자 할부가 일제히 중단됐다. ‘절대 갑’의 지위를 가진 대형가맹점이 카드사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3월 현재 대형마트, 백화점, 항공사 등 주요 대형가맹점에서 이벤트성 무이자 할부는 대부분 중단됐다. 홈플러스와 무이자 할부 비용을 반으로 분담한 신한카드만 한 달간 2~3개월 무이자 이벤트를 열고 있다.
청구할인 이벤트도 무이자 할부와 함께 자취를 감쳤다. 얼마 이상 결제하면 일정 비율을 청구서에서 깎아주는 이 행사도 일시적인 판매촉진 이벤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이자 할부가 꼭 필요한 소비자는 무이자 할부 기능이 탑재된 신용카드를 이용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신한 심플카드, 현대 제로카드, 삼성카드 4, 하나SK 빅팟카드는 업종 구분 없이 국내 모든 가맹점에서 2~3개월 무이자 할부 혜택을 준다.
금융당국은 신규 상품의 약관심사에서 무이자 할부 관련 수익구조를 면밀하게 따져보겠다는 계획이다. 카드사의 판촉행사가 없어졌다는 것은 곧 여러 장의 카드를 보유할 필요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유독 한국에서만 1인당 보유 카드수가 많은 것은 소비자가 카드사별 이벤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1~2장의 상품에 집중해서 쓰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VIP카드 이젠 별 볼일 없네
카드사 우량회원(VIP) 기준도 연회비에서 사용 실적으로 바뀌고 있다. 값비싼 연회비를 내는 회원에게 연회비를 초월하는 다양한 혜택을 주던 관행이 사라지고 가입 상품에 관계없이 사용 실적에 따른 혜택이 늘어나는 추세다. 연회비 200만원을 내더라도 카드 사용이 미미한 회원보다는 연회비 5000원짜리 카드를 소유하고도 결제를 많이 하는 회원이 회사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다.
실제로 지난해 고가 연회비를 내는 초우량고객(VVIP) 카드에는 종전에 없던 ‘전월 실적’이라는 굴레가 씌워졌다. 연회비를 아무리 많이 내더라도 카드를 쓰지 않으면 혜택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다. 대표적 VVIP 카드인 현대카드 퍼플과 레드, 신한카드 프리미어·에이스·클래식, KB국민카드 테제·로블 등에는 전월 실적 조건이 새로 생기거나 종전보다 강화됐다.
신한카드는 신용카드로 연간 1200만원 이상 결제하면 ‘클래식’, 연간 2000만원 이상 결제하면 ‘베스트’, 4000만원 이상이면 ‘에이스’, 6000만원 이상은 ‘프리미어’ 자격을 준다. 결제 금액이 상위 5% 안에 드는 이들 회원에게는 연회비 면제, 문자서비스 수수료 면제와 함께 분기별로 100만~500만원까지 무이자 할부 한도를 준다. 많이 쓰는 고객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자는 취지에서다.
KB국민카드도 결제 실적을 기준으로 연 1회 우수회원을 선정해 2~3개월 무이자 할부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는 또 우대고객 우대서비스인 프라임회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전년 이용금액 1억원 이상, 6000만원 이상, 2400만원 이상 회원을 각각 노블, 프리미엄, 클래식으로 분류해 특정 가맹점 우대, 전용콜센터, 콘도회원권 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Key point
“연회비보다 더 뽑을 수 있다”는 말에 수십만원을 주고 가입했던 VVIP카드도 혜택이 슬그머니 줄어들어 만원짜리 카드와 다를 게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