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방 소재 한 중소기업이 인수자를 찾기 위해 인수의향서를 돌렸다. 가장 많은 돈을 써낸 곳은 뜻밖에도 ‘중국 자본’이었다. 중국 자본이 제시한 금액은 다른 후보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중국 자본은 인수를 위한 우선협상자에 선정됐다. 회사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중국 자본이 몰려온다는 건 알았지만 지방에 있는 중소기업 인수까지 관심을 보일 만큼 깊숙이 들어왔을 줄 몰랐다”며 “아마도 기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놀라워했다.
# 외국인들의 투자가 주춤하기 시작하던 올해 초, 증권가에는 중국 자본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4분기부터 국내 증시에 관심을 보이던 중국 자본은 1월에 5390억원어치를 사들이더니, 2월에는 무려 1조2380억원어치 주식을 쓸어 담았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 코스피200에 포함된 대형주 위주로 주식 순매수를 하는 차이나머니의 대담한 매수는 북한 리스크로 유럽과 미국 투자자들이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3월에도 이어지고 있다.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보유한 차이나머니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상륙하고 있다. 기껏해야 채권에만 관심을 보였던 차이나머니가 최근 들어 기업 인수에서 주식까지 관심 영역을 크게 넓히고 있어 자본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차이나머니의 투자 확대는 ‘외국인 투자자 다변화’라는 측면에서 반가운 일이지만 중국 경제 의존도가 날로 커지고 있는 와중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시장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차이나머니는 채권에 집중됐다. 중국의 우리나라 상장채권 보유액은 11조원(올해 2월 말 기준)을 웃돈다. 외국인 채권투자 중 1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19조원) 룩셈부르크(14조원)에 이어 3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채권 투자는 점차 둔화되는 모습이다. 올해 채권 순투자액을 보면 룩셈부르크 태국 미국이 3위권에 포함돼 있고, 중국은 스위스, 프랑스와 비슷한 350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식시장에서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차이나머니는 지난해 11월부터 한국 투자를 눈에 띄게 늘리고 있다. 4개월 만에 약 3조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많아야 수백억원 수준의 주식을 매수하는 데 그쳤는데, 지난해 11월에 5660억원어치를 사들인 이후 12월(6940억원)에 이어 올해 1월(5390억원)에도 순매수를 이어갔다. 급기야는 2월에 1조2380억원어치를 사들이며 한 달 순매수로는 사상 최대 금액의 주식을 싹쓸이했다.
차이나머니가 국내 주식을 본격적으로 사들인 지난해 11월은 공교롭게도 중국 관영 CCTV의 경제채널인 CCTV2가 한국 증시 방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CCTV2는 지난해 하반기에 서울에 별도의 스튜디오를 열고, 한국 증시가 끝난 이후 한국 증시 상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연구소에 근무하는 중국계 연구원이 직접 출연해 매일 한국의 시장 분위기를 전한다. CCTV2의 진출은 한국 시장에 관심이 높은 투자자가 중국에 많다는 점 때문인데, 이때 이후 차이나머니의 투자는 급격히 늘고 있다.
올 들어 한 분기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지난해 순매수액(1조7800억원)을 넘어섰다. 사상 최대 월 매수액을 기록했던 2월보다는 다소 둔화됐지만 차이나머니는 3월 들어서도 매수액을 줄이지 않고 있다.
차이나머니의 주식 대량 매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시장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첫째는 다른 외국인들이 올해 들어 우리나라 시장을 외면하고 있는 와중에 중국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1~2월 외국인들은 4000억원 넘게 순매도했다. 양적 완화의 효과를 보고 있는 미국과 엔저 완화의 수혜를 보는 일본과는 달리 세계 최대 상장지수펀드(ETF) 운용사인 뱅가드의 지수 변경 영향 등으로 외국인의 매수가 크게 줄면서 코스피는 힘겨운 모습이 역력하다. 유럽계나 미국계가 중심이 된 외국인의 매도를 차이나머니가 상당부분 받아내고 있는 셈이다.
둘째는 북한 리스크가 날고 커지고 있는 와중에 북한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이 한국 증시를 사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외국인 매수가 크게 줄어든 이유 중 하나로 날로 긴장이 커지고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꼽히고 있다. 북한은 연일 강성 발언을 쏟아내며 외국인 투자심리를 얼어붙게 하고 있다. 이런 정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차이나머니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무언가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북한 정보에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는 중국 투자자는 북한 리스크를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차이나머니가 사들이는 종목은 삼성전자 현대차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대표업종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의도의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현대차를 포함한 코스피200에 포함된 종목을 포괄적으로 사들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인덱스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운용사 펀드매니저는 “중국 투자자 입장에서는 중국보다 한 발 앞서 있는 우리나라 제조업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잘 아는 종목과 업종에 투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차이나머니가 채권에서 돈을 빼내 주식으로 옮겨가고 있는 분위기인데, 가장 잘 알고 있는 한국 시장의 대표종목에 투자하는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차이나머니의 실체는 무엇일까.
금융당국과 금융투자 업계의 얘기를 종합하면 최근 4~5개월 동안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는 차이나머니는 3조3000억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고를 무기로 한 중국 중앙은행과 중국 국부펀드 CIC가 주축을 이룬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중국 인민은행과 중국 CIC 산하에 있는 두 개의 투자회사가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있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다. 또 중국의 적격 국내 기관투자자(QDII)들이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중국 국부펀드인 CIC는 우리나라 운용사인 삼성자산운용 트러스톤자산운용과 국내 투자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운용사에 돈을 맡겨 자금을 운용하려 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MOU를 체결한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국내 투자가 크게 늘어 시장에서는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위탁이 아니라 직접 운용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선 아직 구체적인 배경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실 외환보유고를 관리하는 중국 정부가 해외에 자회사를 설립해 직접 투자에 나서는 것은 그리 생소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외환보유고를 채권 위주로 운용하던 것에서 벗어나 대체투자나 주식으로 다변화하고 있는데, 특정 국가 투자를 위해 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낯설진 않다. 최근 영국에서는 징고트리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가 수처리, 기숙사, 빌딩오피스 등 런던과 맨체스터에 있는 부동산과 인프라스트럭처에 16억달러를 투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징고트리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는 중국 외환보유고를 보유하고 있는 정부의 100% 자회사다.
베이징 중국은행 타워
이유야 어찌됐든 중앙은행과 국부펀드가 중심이 된 차이나머니는 사실상 장기펀드로 분류된다. 이벤트가 터질 때마다 대량 매도를 쏟아내 우리나라 증시를 뒤흔드는 유럽계 헤지펀드보다는 펀드와 연기금이 중심이 된 미국계 장기펀드와 유사한 자금이다. 사실 이런 돈의 성격만 놓고 보면 차이나머니의 국내 자본시장 본격 상륙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펀더멘탈과 관계없는 이벤트에 일희일비하며 주식을 대량으로 매도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와중인데다, 자본시장이 아닌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서 차이나머니의 기술 먹튀 논란 등이 빚어진 적이 있어 일각에서는 경계심이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차이나머니의 공습은 앞으로도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사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차이나머니의 주식시장 진출은 급격히 늘었지만 전체 투자액을 놓고 보면 채권과는 달리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차이나머니의 국내 주식시장 보유액은 8조원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전체 외국인 순위로 보면 10위권에도 포함되지 못한다.
미국계 자금(165조원)이나 영국(40조원) 룩셈부르크(27조원) 싱가포르(20조원) 등 유럽계 자금과 비교하면 아직은 투자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중동의 국부펀드 성격인 사우디아라비아(15조원)나 아랍에미리트연합(8조원)보다 적다. 그러나 중국의 외환보유고 축적 속도와 투자 다변화 분위기를 감안할 때 한국 주식시장에서도 큰 손으로 등극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용준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중국은 최근 들어 제조업뿐 아니라 금융에 있어서도 ‘해외로 나가자(走出去)’는 게 정책의 기본 방향”이라며 “시진핑 시대에 접어들면서 차이나머니의 해외진출은 눈에 띄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Key point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보유한 차이나머니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상륙하고 있다. 기껏해야 채권에만 관심을 보였던 차이나머니가 최근 들어 기업 인수에서 주식까지 관심 영역을 크게 넓히고 있어 자본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