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를 하는 사람이나 중개를 하는 행위 자체.’
저축은행 사태를 계기로 신문 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브로커’의 원뜻이다. 그 중에서 주로 금융사를 상대로 하는 금융브로커의 실체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사전에도 버젓이 올라와 있는 브로커들은 누구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일까. 서서히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금융브로커의 세계를 소개한다.
대출 알선이 주업
브로커하면 먼 얘기로 들리지만 실상 우리는 늘 브로커들을 접하고 산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대표적이다. 중개업자들은 집을 팔거나 전세를 놓으려는 사람과 집을 사거나 전세를 얻으려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고 수수료를 받는다. 증권사도 일종의 브로커로 볼 수 있다. 주식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을 연결시켜 주고 대가로 중개 수수료를 받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브로커는 ‘대출 중개업체’들이다. 주로 대부업체와 저축은행을 상대로 영업하는 대출 중개업체들은 대출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금융사에 소개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다. 대략 대출금액의 8% 정도를 받는다. 우리가 대부업체에 연 30~40% 이자를 내면 이 가운데 8%포인트가 대부 중개업체에 수수료로 넘어가는 것이다. 이 같은 업무는 모두 합법적이고 시장 효율 개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법은 해당 브로커의 자격 조건을 규정하고 있으며 수수료를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도 정해주고 있다.
이처럼 법이 허용하는 브로커가 아니라면 나머지는 모두 불법이다. 정식 대출 중개업체가 아닌 금융브로커도 마찬가지다. 법인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활동하는 금융브로커들은 각종 거래를 연결시켜 주고 대가를 받는 것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대출 과정에서 시행사와 저축은행을 연결해 주고 커미션을 받는 게 대표적인 형태다. 비단 PF대출에 머물지 않고 각종 대출을 연결해 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경우도 많다.
정식 대출 중개업체들이 소액 대출을 받으려는 불특정 다수와 금융사를 연결시켜 주는 반면 금융 브로커들은 친분 관계를 이용해 거액의 대출을 받으려는 기업과 금융사를 연결시켜 주고 커미션을 받는다.
저축은행 업계 관계자는 “브로커들은 저축은행 대주주들과 친분 관계를 이용해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좋게 얘기하면 대출 중개인으로 볼 수 있지만 각종 편법이 난무하면서 불법 행위를 자주 저지른다”고 말했다.
금융브로커들이 소개해 주는 대출은 정상적인 경로로 나간 대출과 비교하면 조건이 확연히 다르다. 중간에서 금리를 협상해 금리를 깎아주는 경우가 대표적이며 아예 자격 조건이 안 되는 기업이 대출을 받게 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 과정에서 브로커들은 금융사 대출 담당자 혹은 작은 금융사의 대표나 대주주에게 뇌물을 준다. 이 돈은 대출을 받으려는 기업이 제공하고 이는 결국 대출 금액에서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출금을 사실상 기업, 금융사, 브로커가 나눠 갖는 것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경로로 나가는 대출은 언젠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최근 저축은행 사태가 대표적이다. 물론 브로커들이 소개해 주는 대출에 모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부실로 이어진다.
브로커들은 평소 금융사 및 기업들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때로는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저축은행 업계 관계자는 “브로커들은 간혹 거액의 예금을 유치해 오곤 한다”며 “이에 따라 브로커를 마냥 멀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브로커의 업무는 날로 진화하고 있다. 인수합병 주선이 대표적이다. 금융브로커들은 2000년대 후반 저축은행 간 인수합병이 활발할 때 매각 대상과 인수 희망자를 연결시켜 주는 등 중간에서 많은 일을 했다. 여러 저축은행 대주주들과 친분을 활용해 거간꾼 노릇을 한 것이다. 또 금융 당국에 줄을 대 인수 승인이 쉽게 이뤄지도록 하기도 했다. 사려는 곳이 많아 경쟁이 치열한 인수합병 건을 담당하게 되면 사전에 입찰 정보를 취득해 고용한 금융사에 알려주기도 한다. 반대 일을 할 때도 있다. 저축은행을 파는 대주주가 브로커를 고용해 저축은행을 사려는 곳에 경쟁자들이 높은 가격을 쓰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가격을 높게 쓰도록 하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어떤 물건을 정말 사고 싶은데 참여자가 없어 단독 입찰을 해 유찰될 상황이라면 브로커가 거짓으로 입찰을 해주기도 한다”며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라면 브로커들은 어떤 일이라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저축은행 위기로 인해 이 같은 활동은 잠잠해졌지만 아직 완전히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저축은행 한 임원은 “최근 모 저축은행을 구입할 의사가 없느냐며 접근한 브로커가 있었다”며 “이들은 인수합병이 성사되면 거액의 수수료를 챙긴다”고 전했다.
검찰 수사에서 브로커들이 저축은행 민원 해결을 위해 각종 로비 활동을 벌인 정황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영업정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금융당국과 정치권에 줄을 대거나 각종 인허가를 받아내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무척 ‘힘이 센’ 브로커들은 정부 인사에 개입해 인허가를 쉽게 내줄 수 있는 인물을 관련 직위로 보내기도 한다.
이 같은 업무는 모두 브로커들의 인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금융브로커 활동은 저축은행 업계 전체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업계에서는 브로커 없이 정상적인 영업이 힘들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저축은행 가운데는 직접 브로커를 고용해 각종 업무에 활용할 때가 많다.
금융브로커들은 때로 자신이 직접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돈을 끌어 모아 법인을 설립한 뒤 직접 기업을 사들이는 게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기업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뒤 적절한 구매자를 찾아 기업을 되파는 경우도 많다. 가치가 떨어진 기업을 누군가 사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구매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뇌물이 건너가야 하며 처음부터 기업을 다시 사들일 대상을 정해 놓은 뒤 담당자와 공모해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사업 과정에서 돈이 떨어지면 적당히 관련 서류를 꾸민 뒤 친분을 이용해 불법 대출을 받는 일도 허다하다.
화려한 인맥 자랑… 사기도 마다하지 않아
브로커들의 출신은 다양하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화려한 인맥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신분을 가졌거나 갖고 있다는 점이다.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직을 비롯해 은행 등 금융권 출신이 많다. 금융 당국이나 정치인 출신도 있다. 때론 부모의 이력을 활용하는 정치인 아들이 브로커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현직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직을 버리고 전문 브로커로 나서기도 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브로커들의 인맥 관계를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친하게 됐는지 신기한 경우가 많다”며 “브로커들은 인맥 유지를 위해 각종 기기를 동원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두고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중간에서 각종 거래를 알선하거나 인허가 등 민원을 해결해주고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는다. 리베이트의 규모는 작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십억원에 이르기도 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일의 규모가 리베이트 크기를 결정한다”며 “수천억원짜리 사업 진행에 도움을 준 경우라면 수억원의 리베이트를 거리낌 없이 준다”고 설명했다.
점점 더 과감해지는 브로커들
중앙부산저축은행 비리에 연루된 많은 브로커들이 현재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리베이트는 일을 시작하기 전 사전에 합의를 해두고 일단 착수금을 지급한 뒤 일이 성공하면 성공 보수를 주는 행태가 대부분이다. 중간에 당국자를 위한 뇌물 등의 비용을 지출할 일이 있으면 금융사들이 브로커들에게 지급한다. 이 과정에서 브로커들은 간혹 배달 사고를 내기도 한다. 1억원을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이 가운데 5000만원은 자신이 챙기고 5000만원만 전달하는 식이다. 뇌물 공여자가 얼마나 받았냐고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을 노린 수법이다. 이에 따라 금융사들은 뇌물 전달 업무를 오랜 관계를 유지해 믿을 수 있는 브로커에게 맞기지만 100% 통제하기는 어렵다.
브로커들은 때로 정액 리베이트를 받지 않고 사업 수익을 나눠 갖기도 한다. 이쯤 되면 거의 동업자 수준이다. 2000년대 초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던 굿모닝시티 비리에 개입했던 한 금융브로커는 2000억원으로 추정되던 개발 이익의 30%를 받기로 하고 각종 활동을 벌인 바 있다. 인맥 하나로 이 같은 수입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금융브로커들은 사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상가를 대신 팔아주겠다고 속여 상가를 가로채거나 투자를 하면 높은 수익을 붙여주겠다고 약속한 뒤 돈을 받아 갚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금융시장에선 명성이 대단한 특급 브로커들이 많다. 금융사들은 먼저 브로커 방문을 받기도 하지만 각종 업무를 해결하기 위해 브로커를 찾아 업무를 위탁한다. 이를 위해 브로커들은 정식 사무소를 차려놓고 직원을 고용하기도 한다. 브로커들은 주로 혼자 일하지만 사안이 큰 건을 처리할 때는 여러 브로커가 함께 움직인다. 이들은 자체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 서로 일을 공유한다.
또 거물급 브로커들은 예전에 데리고 일했던 부하 직원을 끌어들여 후계자를 양성하기도 한다. 한 명이 길러내는 브로커는 많게는 수십 명에 이른다. 이들은 기업처럼 움직이며 일이 들어오면 경력별로 업무를 배분하는 시스템도 마련돼 있다. 금융권에선 ‘○○○사단’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금융권 관계자는 “거물급 브로커들이 갖고 있는 노하우와 인맥은 그대로 후배들에게 이전된다”며 “이 시스템을 통해 금융브로커들이 지속적으로 양성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금융권에선 브로커들을 멀리하자는 자정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브로커가 소개해 준 대출이 대거 부실화되면서 실적에 타격을 입는 저축은행들이 대표적이다. 한 대형 저축은행 관계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주 찾아오던 브로커들을 멀리하면서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며 “브로커 활동이 점차 업계 하위 저축은행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다른 저축은행 관계자는 “일부 저축은행들이 고용한 브로커를 최근 해고했다는 소문이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협박을 받는 저축은행이 나오면서 골치를 앓는 경우도 있다. 브로커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또 친분이 있는 정부 관계자를 움직여 각종 사업을 방해하는 등 보복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브로커를 고용하는 저축은행들도 많다. 저축은행 한 관계자는 “브로커와 관계를 끊고 싶지만 한번 연을 맺으면 끊기가 무척 어렵다”며 “처음부터 정상적인 방식으로 영업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법정 브로커라 하더라도 법 테두리를 넘어선 행위를 해선 안 된다. 휴대폰에 수시로 들어오는 ‘대출 받으라’는 문자메시지가 대표적이다. 이를 두고 대부업체들이 보내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대부 중개업체들이 보낸다. 문자를 보고 중개업체에 연락을 하면 대부업체 등에 연결해 대출을 받도록 해준다. 이를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불법이고 간혹 적발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