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직장인 김모씨(28·여)는 청담동을 자주 찾는다. 20대 초반에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를 즐겨 찾았으나 지금은 거의 가지 않는다. 대신 청담동 쪽으로 발길을 옮긴 것이다.
김씨가 청담동을 찾는 까닭은 명품을 사거나 패션 트렌드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주목적은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 가서 수다 떨고 ‘놀기’ 위해서다.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들을 청담동에서는 보기 힘들다.
청담동에 있는 카페는 대부분 대로변에 위치해 있지 않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런 만큼 아담하다. 그러나 실내 테이블 간 공간은 널찍하고 조용하다. 지인들과 대화하기 편하고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아 좋다. 또 하나, 이곳 카페는 주차하기도 편하다. 발레파킹 서비스를 해주는 곳도 있을 정도다.
김씨는 “압구정동·청담동 일대에 유명 연예기획사들이 있어 연예인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며 “명품 매장에 들어가 명품을 구경하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해외 유명 브랜드 매장 즐비
서울 강남구 청담동. 이곳을 사람들은 ‘명품패션거리’라 부른다. 강남구청에서 규정한 바에 따르면 갤러리아백화점부터 청담공원 사거리까지 1370m 구간을 일컫는다. 엄밀히 말해 이 구간이 모두 행정구역상 청담동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압구정동, 삼성동과 겹쳐 있는 지역이 꽤 있다. 실제로 청담로가 아니라 갤러리아백화점에서 청담사거리에 이르는 압구정로 760m, 청담사거리에서 청담공원 사거리까지의 삼성로 610m가 합쳐진 거리다. 게다가 성형외과, 피부과 등 병원, 갤러리, 일반 상가도 많다.
하지만 이곳을 ‘패션거리’ ‘명품거리’로 칭하는 이유는 해외 유명 브랜드 매장이 빼곡히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갤러리아백화점과 기아자동차 국내영업본부를 기점으로 청담공원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길 양쪽으로 해외 유명 브랜드 매장이 즐비하다.
청담동의 명품패션매장의 출발점은 갤러리아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코치’ 매장이라고 할 수 있다. ‘청담동 터줏대감’으로 불릴 정도로 청담동에 다수의 건물과 명품 매장을 거느리고 있는 신세계 소유로 알려져 있는 코치 매장을 시작으로 10꼬르소꼬모, 엠포리오 아르마니, 린, 토리버치 등 유명 브랜드 매장이 주욱 이어진다. 돌체&가바나, 루이뷔통, 미쏘니,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이들 매장 건물 외부는 전부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돼 있으며 고층 빌딩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규모도 꽤 크다.
길 건너편에는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건물이 많고 상호가 눈에 잘 띄지 않아 해외 유명 브랜드 매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곳에도 프라다, 루이까또즈, 까르띠에, 페라가모 등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브랜드 매장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청담동이 지금처럼 명품패션거리의 조짐을 보인 것은 1980년대 말~9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정과 패기가 있는 젊은 국내 디자이너들과 뜻있는 디자이너들이 세계적인 패션거리를 조성해보자는 취지에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면서 틀이 잡혔다.
1980년 말~90년대 초 형성되기 시작
당시에는 ‘패션거리’라 하면 명동이 제일 먼저 연상됐다. 하지만 명동이 포화상태에 다다르고 임대료도 비싸지자 디자이너들은 다른 곳을 물색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청담동 일대다.
김철웅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회장은 “1989년부터 19 90년대 초까지는 그야말로 뜻있는 디자이너들의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며 “지금처럼 해외 유명 브랜드가 즐비한 거리는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지금 같은 모습을 띠기 시작한 것은 약 10년 전”이라고 덧붙였다.
1990년대 후반 청담동이 디자인거리로 유명세를 타면서 해외 유명 브랜드 매장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제일모직, 신세계인터내셔널, 롯데쇼핑 등 대기업들이 해외 브랜드를 수입해 매장을 열면서 지금 같은 ‘명품거리’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뿐 아니라 분더샵 등 편집매장도 들어와 있다.
청담동 명품패션거리는 강남구청이 계획적으로 조성한 영향도 대단히 컸다. 강남구청은 지난해 3월부터 ‘청담명품패션거리 조성사업’을 펼쳐 청담동 일대를 정돈했다.
청담동 제냐 매장
청담동에는 아직까지 해외 명품업체들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남아 있어 보인다.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층도 아니다. 또 일반 상가건물도 이따금 보여 해외 유명 브랜드 업체를 도맡아 수입하는 대기업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 치고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있다. 1990년대 초 명동처럼 청담동도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것. 김철웅 회장은 “진정한 패션거리가 되려면 대로변뿐 아니라 사잇길에도 전부 패션의 냄새가 짙어야 하고 패션거리가 형성돼야 하는데 청담동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골목과 사잇길을 패션거리로 조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주민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청담동은 대로변에만 유명 브랜드 매장이 자리를 잡고 있을 뿐 골목으로 올라가면 대개 일반 가정집이다. 이 때문에 대로변에서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명품과 패션’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언덕길로 돼 있는 청담동의 골목길에는 일반 가정집으로 보이는 집들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대기업과 그 집안의 딸들이 청담동의 건물을 속속 매입하거나 임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청담동이 포화 상태가 아니라 아직도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가.
청담동 토리버치 매장
청담동 소재나 인근 건물을 매입하는 사람들이 삼성, 신세계, 롯데 등 대기업 집안의 딸들이라는 점이 주목을 끈다. 제일모직 이서현 부사장, 신세계 정유경 부사장, 롯데쇼핑 신영자 사장이 그들이다. 모두 패션과 그 산업에 일가견이 있는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청담동 소재나 인근 건물 매입 소식은 큰 화제를 불러오고 있다.
원래 청담동을 주무대로 삼은 사람은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다. 정 부사장은 신세계의 패션계열사인 신세계인터내셔날을 앞세워 청담동 명품패션거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코치 매장을 비롯해 크롬하츠, 조르지오 아르마니, 엠포리오 아르마니, 돌체&가바나 등 10여개 매장을 소유,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다 편집매장인 분더숍까지 남성관과 여성관 각각 따로 갖추고 있다. 신세계가 ‘청담동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세계는 지난해 말 청담사거리 쪽 일부 토지와 현재 코치 매장 뒤편의 요산빌딩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 딸들 청담동 건물 속속 매입
코치매장 뒤로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최근 구입한것으로 알려진 요산 빌딩이 보인다.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도 청담동에서 꽤 많은 곳을 장악하고 있다. 지금의 토리버치 매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2009년 아버지인 이건희 회장이 250억원을 들여 매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갤러리아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현대스위스상호저축은행 건물도 이 회장이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가 매입한 건물에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이 연 토리버치 매장은 뉴욕은 물론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평가받고 있다.
정유경 부사장과 이서현 부사장의 ‘청담동 전쟁’은 삼성가(家)의 사촌자매들 간 경쟁으로 비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또 이 두 사촌자매의 패션업계 경쟁은 청담동의 부동산 가격을 높이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다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전 부인 임세령 와이즈앤피 대표의 청담동 부동산 매입도 영향을 주었다. 2009년 도산공원 앞에 있는 건물을 자녀들의 이름으로 매입한 바 있는 신 사장은 지난해 말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앞 건물을 자신이 설립한 화장품 도소매업체 ‘에스앤에스인터내셔날’ 이름으로 매입했다. 임세령 와이즈앤피 대표도 최근 청담동 소재 한 건물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이유 때문인지 2009년 말 3.3㎡당 평균 1억원이었던 청담동 부동산 가격은 불과 1년 만인 2010년 말 1억5000만~1억6000만원까지 올랐다. 상권이 발달한 대로변은 2억~2억5000만원까지도 치솟았다. 부동산 침체기에서도 청담동 일대만 영향을 받지 않은 셈이다. “2011년 지하철 분당선 연장선인 ‘신청담역’이 개통될 예정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대기업 딸들의 부동산 매입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인근 부동산업체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패션과 명품의 거리 청담동이 대기업의 각축장이 되면서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청담동에 즐비한 브랜드 매장 중 국내 브랜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 김철웅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회장
김철웅 SFAA 회장은 청담동이 패션의 거리로 형성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을 회상하며 지금처럼 대기업이 청담동을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김 회장은 대기업이 해외 유명 브랜드를 대거 수입해오는 것과 국내 디자이너들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김 회장은 “대기업이 압구정동, 청담동 일대를 장악하면서 열정 있는 디자이너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차별 없는 균등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마침 2월8일 서울 수송동 제일모직 사옥에서 ‘한국 패션의 새로운 방향 모색’이라는 주제로 열린 문화체육관광부 정책간담회에서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이 디자이너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약속한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 부사장은 이 자리에서 “기관별로 산발적으로 지원하기보다 통합기구를 통해 4~5명의 스타급 디자이너를 집중적으로 밀어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청담동에 국산 브랜드가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청담동을 장악한 대기업들이 해외 유명 브랜드만 앞다퉈 들여오고 있다”며 “자체적으로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양성해야 우리나라 패션산업의 앞날이 밝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