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대학교 국문과 교수를 역임한 강기진 선생이 고등학교 교편을 잡았을 때의 일이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수주(樹州) 변영로의 시 '논개'를 읊은 뒤 수주의 흥미진진한 술주정에 대한 이야기로 수업을 마쳤다. 당대의 술꾼이던 수주가 자신의 술주정 인생을 풀어놓은 고서 '명정사십년' 이야기였다. 스승에게 수주의 얘기들을 들은 한 소년은 학교를 마친 뒤 청계천으로 가 '명정사십년'을 찾아 헤맸다. 헌책방의 천국이었던 청계천에서 책을 찾지 못한 소년은 ‘고서’에 대한 묘한 오기가 발동했다. '고서 이야기'의 저자 박대헌 대표의 고등학교 시절 일이다. 그는 이삼 년이 지나 결국 '명정사십년'을 손에 넣었고, 그 후로 고서의 묘미에 한껏 빠지게 되었다.
국어사전에서는 고서를 ‘옛 책, 고서적’ 또는 ‘헌책’으로 정의하고 있다. 헌책은 낡은 책 또는 오래돼 허술해진 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분명 ‘고서적’과는 다르다. 고서를 규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지만 단순히 오래된 책이나 헌책을 ‘고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호산방’의 박대헌 대표에게 고서적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사전적 의미로는 헌책과 고서적, 모두 같은 말입니다. 구분의 기준은 철저히 개인적이죠. 헌책이라고 하면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책. 고서라고 하면 그 중에서도 나에게 특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봅니다.”
엽서나 우표 등을 모으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지만 고서는 특별하다. 우리나라에 고서를 취미로 혹은 전문적으로 모으는 인구는 많지 않다. 고서가 지니는 경제적·역사적 가치, 고서를 수집하는 루트나 되팔 수 있는 곳, 좋은 고서를 알아보는 방법 등에 대한 기준이나 지식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 책 전문가인 박대헌 대표에게 좋은 고서에 대해 물었다.
“좋은 고서란 가장 먼저 내용이 귀해야 합니다. 그 다음 나 혼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루 좋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보관 상태가 훌륭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에 하나가 무조건 오래된 책만을 찾아 헤맨다는 겁니다. 그렇게 고서적을 모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뚜렷한 ‘수집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취미로 고서적을 수집해서는 절대 좋은 컬렉션을 이룰 수 없습니다.”
박대헌 대표는 스스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 또는 연구 목적으로 이도 아니라면 차라리 고서의 경제적 가치 때문에 모으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수집은 그 수준이 저절로 높아 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서에 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수집에 들어갈 수는 없다. 안목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서를 직접 접해 보고 부지런히 연구하는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 발품을 팔기도 하고, 때로는 별 가치 없는 고서를 구입하는 시행착오도 겪는다.
책의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투자
고서적이 지니는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고서적이 투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지 물었다.
“제대로 알고 수집을 한다면 어떤 수집품보다 충분한 투자의 대상이 됩니다. 실제로 내가 구입한 책 중 100배에서 많게는 몇 백 배를 훌쩍 뛰어 넘게 오른 것도 있습니다. 실제로 책의 가치는 구입하는 순간 정해지는 겁니다. 그 책이 지닌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팔리는 거니까요. 책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소유일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죠.”
박 대표는 책을 제대로 파는 법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좋은 책을 가지고 있는 수집가라고 해서 모두 되파는 일까지 잘할 수는 없다. 이럴 때는 욕심을 버리고 과감히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조언한다. 헌책방은 전국적으로 수 백군데 이상 있지만 고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은 몇 곳 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지인의 소개나 관심이 많은 이들을 중심으로 이어진 네트워크로 고서의 매매가 이뤄지고 있다.
일반인도 고서를 잘 보관할 수 있을까? 특별한 장치나 환경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물었다. 의외로 쉬운 대답이 나왔다.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에서는 책도 잘 보존된다는 것. 우리나라에 고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력은 굉장히 적다고 한다. 책을 구입한 가격보다 고서를 수리하는 비용이 훨씬 비싼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이들은 고서에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는데 오히려 적당히 만져 주는 게 고서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라고 한다.
■ 고서 보관 방법
1. 부드러운 솔이나 거즈 등으로 먼지를 제거한다. 2. 구겨진 부분을 바로 편다. 3. 찢어진 곳은 밀가루 풀을 사용하여 한지로 보수한다. 단 손상 부위가 심각한 귀중본의 수리는 전문가에게 의뢰한다. 4. 실온에서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보관한다. 5. 일 년에 한두 번 책을 볕에 쬐고 바람에 쐬는 폭서(曝書)를 하며, 곰팡이나 해충의 피해가 심할 경우에는 전문업체에 의뢰해 훈증 소독을 한다.
[신경미 기자 lalala-km@mk.co.kr / 사진 =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