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인 거리가 대표 상권을 형성한 이태원이 한남동 일대로 세를 넓히고 있다. 신사동 가로수길을 닮은 듯 제2의 가로수길이 다채롭다.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된 이태원 일대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선 지명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이태원(梨泰院)’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효종(1619~1659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설이 있는데 동네에 배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배나무 이(梨)가 붙었다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귀화해 살았다 해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고도 한다. 왜란 중 성폭행 당한 여성과 아이들이 살던 동네라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 이태원(異胎圓)이란 설도 있다. 차이는 있지만 이태원하면 이방인이 떠오르는 선입견엔 별다른 이의가 없다. 유난히 군사시설과 인연이 많았던 탓이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 사령부, 광복 이후엔 미군이 머물고 있다.
1970년대 미군 기지에서 나온 물품이 거래되며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와 기지촌, 클럽 등이 들어섰다. 미군 기지를 중심으로 외국인 전용주택과 고급 주택단지가 들어섰고, 1988년 올림픽 당시에 18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며 쇼핑 천국이란 이미지를 얻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퇴폐업소 단속과 범죄와의 전쟁이 진행되며 상권이 눈에 띄게 위축됐다. 여기까지가 20세기 이태원의 역사다.
21세기를 맞은 이태원은 문화 트렌드를 선도하며 색다른 변화를 시도 중이다. 첫 변화는 2001년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개통과 함께 진행된다. 유동인구의 증가가 새로운 상권 형성에 물꼬를 텄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려는 젊은층이 유입되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프랜차이즈와 패션 전문점,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외국인 관광객과 거주 외국인 등 외국인 유동인구의 비율이 여타 도심에 비해 높아 이국적인 문화가 여전히 장점으로 부각됐다.
현재 이태원의 변화는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 부근과 대사관길을 지나 한남오거리 유엔빌리지 진입로(독서당길)까지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 과연 어떤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까.
쇼핑천국 이미지 그대로 이태원역 주변
이태원역 주변은 쇼핑과 유흥문화가 공존하는 복합상권이다. 빅사이즈 전문점 등 독특한 패션 전문점은 여전하다. 내국인보다 외국인을 노린 전문점이다. 이색적인 레스토랑은 젊은층을 끌어들이는 확실한 보증수표다. 외국인 관광객과 한국 거주 외국인이 많이 들러 이국적인 분위기를 도드라지게 한다.
이태원 상권의 이러한 문화를 즐기려는 내국인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인근 거주자뿐 아니라 수도권 일대에서 찾는 지역명소다. 이러한 이유로 재방문율도 높다. 서울에서 유사한 상권을 찾기 힘들 만큼 특색이 강하다.
이태원 사거리에서 한강진역(지하철 6호선) 방향으로 진행되는 이태원로는 해밀턴 호텔 방향과 한강진역 방향의 상권이 분리된다. 해밀턴 호텔에서 녹사평역 방향은 패션의류, 액세서리 매장이, 한강진역 방향은 레스토랑과 카페가 자리했다. 이태원역 1, 4번 출구 방향은 보세의류, 잡화점, 기념품 매장, 패스트푸드점 등이 많다. 빅사이즈 전문점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태원역 4번 출구로 나서면 보광동 방향으로 클럽과 레스토랑, 카페들이 들어섰다. 클럽 주변 상권은 주간보다 야간 유동인구가 많다. 이태원역 2, 3번 출구에는 이국적인 퓨전 레스토랑, 카페, 제과점 등이 즐비하다. 특히 해외 각국의 전통음식이 주 메뉴인 곳이 많다. 해밀턴 호텔 뒤쪽 상권도 인테리어가 독특한 이국적인 카페와 레스토랑이 주를 이룬다.
이태원 상권은 외국인의 방문이 잦은 동대문, 명동과 전혀 다르다. 동대문과 명동에 동양인 관광객이 많다면 이태원은 서양인이 주로 찾는다. 그런 이유로 레스토랑과 카페 중 브런치와 샌드위치를 즐길 수 있는 비스트로가 간간이 눈에 띈다.
창업을 준비 중이라면 상권의 문화를 먼저 파악하는 심미안이 필요하다. 물론 개발계획도 사전에 점검해야 한다. 용산국제업무지구와 한강르네상스계획, 한남뉴타운 등 용산구는 다양한 개발호재로 부동산 수요자들에게 각광 받는 지역이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강남을 위협하는 거주단지로 부상할 거라 예측한다.이태원역 주변도 한남뉴타운에 속해있어 개발이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지역의 가치 상승과 외국인의 변화가 예상된다는 점은 장기적으로 호재가 될 전망이다.
불황 속 시세 상승 한강진역 주변
서울 서초동에 살고 있는 김정혜씨는 주말마다 한강진역을 찾는다. 또래 친구들과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브런치 문화를 즐기며 주말을 보내던 김씨는 2개월 전부터 모임장소를 바꿨다.
“주말 가로수길은 밀리는 자동차와 북적이는 사람들 때문에 더 이상 조용한 모임장소가 아니에요. 한강진역 주변은 가로수길처럼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많고 갤러리와 브랜드 매장이 있어서 좋아요.”
이태원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이태원 상권이 한강진역 주변으로 확대되며 제2의 가로수길을 만들고 있다. 한강진역에서 한남동 일대로 약 650m에 이르는 길이다. 이 일대는 일본 디자이너 레이 카와쿠보가 만든 명품 브랜드 꼼데가르송 플래그십 스토어를 지난해 제일모직이 인수하면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젊은층 사이에선 ‘꼼데가르송길’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 브랜드로 채워진 5층 건물 주변에 개성 넘치는 건물과 레스토랑이 들어서며 패션과 문화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덕분에 20~30대 여성들의 방문이 늘었고 이들을 겨냥한 디저트 전문 카페 등이 고급화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강남권에서 한남대교를 건너면 도착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한몫했다. 유동인구가 늘고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 등이 속속 문을 열자 임대료도 올랐다. 대로변 건물은 임대료가 전년 대비 두 배가량 올랐지만 매물이 없어 계약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인근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화려한 건물이 들어서고 이국적인 레스토랑이 생기면서 낡은 건물도 리모델링이 시작됐다”며 “세입자들 스스로가 인테리어에 수억원을 투자하며 고객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명품 브랜드가 들어선 것도 상권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 가구 디자이너 이종명의 명품숍, 건축가 유이화의 B스토어, 앙드레 김 부띠끄, 자동차 브랜드 폭스바겐·아우디 매장, IP부티크 호텔 등이 둥지를 틀었다.
강북의 새로운 명소 독서당길
이태원로에서 대사관길로 빠져 순천향대학병원으로 이동하면 한남대교 남단 고가차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횡단보도를 건너 유엔빌리지 방향 언덕길(독서당길)을 오르면 다양한 색채의 레스토랑과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현대리버티하우스에서 유엔빌리지 진입로까지 늘어선 세계 각국의 레스토랑은 샌드위치, 햄버거부터 전통음식까지 다양한 메뉴를 자랑한다. 테라스가 있는 곳도 여럿이라 20~30대 여성과 연인들에게 인기 있는 데이트 코스다. 주변 환경도 레스토랑 메뉴에 영향을 끼쳤다.
몽골, 남아프리카, 루마니아, 인도, 이집트, 아랍 에미리트, 리비아,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등 각국의 대사관이 곳곳에 자리해 외국인 거주자가 많다.
독서당길의 변화는 단국대학교가 용인 죽전으로 이전하며 시작됐다. 이전 당시 캠퍼스 상권은 희비가 엇갈렸다. 인근 상가시장은 학교 이전 후 문을 닫는 점포가 속출하고 임대료도 30~40%가량 빠졌다. 하지만 그곳에 고급 임대주택 한남 더힐이 들어서자 사정은 달라졌다. 주변에 유엔빌리지 등 고급 주거지가 밀집한 지리적 환경에 더힐이 입주(2011년)를 앞두자 부유층을 겨냥한 프랜차이즈와 카페가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독서당길 약 80여m 구간에는 부동산 중개업소만 5곳이 영업 중이다. 주변 부동산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카페나 레스토랑이 늘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매물이 없어서 계약이 없다”고 현 상황을 전했다.
상가 수요가 급증하며 권리금도 올랐다. 현재 33㎡ 점포 기준 권리금은 5000만~6000만원. 전년 대비 약 2000만원 상승한 금액이다. 월세도 180만~200만원 수준이다. 부동산 관계자들은 “한남대교 남단 고가차도가 철거되면 이태원 상권과의 단절 현상이 해소되며 현재보다 더 활발한 상권이 형성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