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 시가총액 2위인 이더리움이 좀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더리움 자체의 호재성 행보에도, 비트코인 반감기에 따른 시장 전체의 호황 분위기에도 이더리움은 별 반응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한때 비트코인의 대항마로 자리잡는 듯했던 이더리움의 이 같은 지지부진한 모습에 시장은 짙은 실망감을 내보이고 있다.
2022년 머지 업그레이드 완료, 2024년 이더리움 현물 ETF 출시…. 가상자산 시가총액 2위인 이더리움의 행보에 시장 참여자들이 잔뜩 기대를 했던 대형 이벤트들이다. 머지 업그레이드는 이더리움의 네트워크 운영방식을 기존 작업증명(PoW)에서 지분증명(PoS) 방식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현물 ETF는 탄탄한 수급을 끌어들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시장에서는 이더리움의 행보가 다른 가상가산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두 이벤트들은 이더리움 시세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증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벤트가 확정되면 재료 소멸로 오히려 가격이 빠지는 현상이 이더리움에서도 나타났다.
지난 2022년 머지 업그레이드 완료 즈음에 이더리움 가격은 한화 기준 180만원대였지만, 이후 150만원대까지 하락했다. 그러다 다시 가격이 오르긴 했지만, 머지 완료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시장 전체 분위기가 바뀐 덕이 컸다.
이더리움 현물 ETF 출시도 마찬가지다. 머지 업그레이드보다 시장이 더 기대하는 부분이었지만 큰 반향은 없었다. 오히려 머지 때보다 더 실망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 7월 예상보다 일찍 당국의 승인을 얻으며 시장에 이더리움 현물 ETF 상품이 선보였지만, 이더리움 시세는 맥을 못추고 있다. 상품 출시 당시 470만원대이던 이더리움 가격은 현재 40% 넘게 빠진 상태로, 300만원대에 머무르고 있다.
물론 올 1월 비트코인 현물 ETF가 출시됐을 때도 초반 상황은 비슷했다. 비트코인 가격은 20%하락하며 약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크립토 대장은 한화 기준 1억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트코인 반감기 전후의 이더리움 모습도 시장에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비트코인 반감기 전후는 시장의 에너지가 가득 찰 때여서 메이저 코인의 시세 상승도 여타 알트코인 못지않게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이더리움은 이때도 시장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업비트에 따르면 이더리움은 2022년 9월 머지 업그레이드 완료 이후 4차 반감기를 앞두고 나타났던 가상자산 시장 랠리 흐름(2023년 중순~올 3월)에서 230% 정도 상승세를 나타냈다. 이에 반해 비트코인은 같은 기간 300%가량이 올랐고, 솔라나의 경우 600%가 넘는 시세 상승을 분출했다.
이처럼 한때 비트코인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이더리움이 좀체 날개를 펴지 못하는 모습을 두고 시장에서는 역설적으로 이더리움의 덩치가 너무 커져 버린 것이 주된 이유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이용하는 프로젝트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속도와 확장성 등 이더리움 자체 문제점들이 좀체 해결되지 않고 있고, 이로 인해 이더리움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더리움의 문제점들을 이더리움 블록체인 밖에서 해결하려는 솔라나, 아비트럼, 옵티미즘 등 레이어2 프로젝트들이 시장에서 더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 레이어 2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활발히 움직이면서 이더리움의 거래량이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더리움도 블록체인 운영 방식의 획기적 변화였던 머지 업그레이드 이후 계속 샤펠라, 덴쿤 등의 여러 업그레이드를 순차적으로 진행해 나가며 자체적으로 여러 문제점들을 개선해 나가려는 자체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자들의 체감 정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반응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다 보니 이더리움은 계속 기술적 개선을 이뤄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시장은 지쳐가고있다는 것이다.
한 가상자산 전문가는 “비트코인의 경우 비교적 단순한 콘셉트이지만 스마트컨택트란 개념을 도입한 이더리움 구조는 복잡하기 그지 없다”면서 “이더리움이 자체 문제 해결에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이더리움이 투자 측면에서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더해 암호화폐 1세대인 이더리움의 신선도가 떨어진 것도 최근 부진의 또 다른 요인으로 지목된다.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른 암호화폐의 특성상 이더리움이 시장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모멘텀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암호화폐 스테이킹 회사인 어테스턴트는 “이더리움이 (시장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좀 더 세련된 내러티브를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더리움의 개념이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더리움도 비트코인처럼 광범위한 인지도를 얻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 가상자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의 데이비드 두옹 암호화폐 리서치 책임자도 “이더리움이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투자자는 물론 개발자들이 다시 몰려들 수 있는 새로운 트리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다 보니 이더리움 시세를 견인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현물 ETF 상품이 출시됐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 없는 것이다.
암호화폐 플랫폼 소소밸류에 따르면 7월 중순 미국에서 이더리움 현물 ETF 상품이 출시된 이후 주간 단위 기준으로 관련 상품에 자금이 순유입된 적은 한 주를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9월 중순까지 6억달러 가까이 빠져나가며 자금 유출 현상만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비트코인 현물 ETF가 출시된 직후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암호화폐 첫 현물 ETF였던 비트코인 현물 ETF는 출시되자마자 같은 기간 3억달러 이상의 자금을 빨아들였다.
JP모건은 “이더리움의 경우 비트코인처럼 유동성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기관 투자자들에게 덜 매력적인 자산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이더리움 현물 ETF에서 스테이킹 기능이 제외된 것이 이더리움의 최근 약세에 한 몫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스테이킹이란 블록체인상의 독특한 투자 유인책으로 시장 참여자가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가상자산을 맡기면 보상을 돌려주는 구조다. 이더리움도 스테이킹 기능을 도입했는데, 문제는 현물 ETF를 통해 이더리움을 보유하면 스테이킹 기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더리움 현물 ETF를 승인하면서 이 기능이 ‘증권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별 투자자 입장에서는 굳이 기관을 통해 이더리움 현물 ETF에 자금을 넣을 요인이 없어진 셈이다.
때문에 이더리움 현물 ETF 활성화를 위해서 스테이킹 기능을 SEC가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는 “SEC가 ETF의 스테이킹을 계속 허용하지 않으면 ETF 수요는 일부 억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더리움의 발행량이 이론적으로 ‘무한대’라는 점도 항상 걸림돌이다. 계속 새로운 물량이 시장에 나온다면 장기 투자자들의 경우 보유 자체가 큰 리스크가 된다. 특히 지금처럼 수요가 뜸한 상태에서 공급 물량이 늘어난다면 가격의 하방 압력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여전히 이더리움에 대해 긍정적인 이들도 꽤 된다.
매트 호건 비트와이즈 CIO는 “이더리움이 여전히 해결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있지만 여전히 암호화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서 “디파이 자산의 60% 이상이 이더리움 네트워크에 있고, 전체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의 절반 이상이 이더리움 네크워크에서 발행되고 있는 등 이는 숱한 경쟁자들이 나오고 있음에도 전통 테크 업계에서 가장 큰 플랫폼 지위를 지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이더리움의 위상은 마이크로소프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면서 “현재 이더리움은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매튜 시겔 반에크 디지털자산 리서치 책임자는 이더리움 가격이 “2만2000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문수인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9호 (2024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