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리치(젊은 고액 자산가)들은 투자할 때 미국 주식·채권보다 암호화폐(코인)나 수집품 등 다른 자산을 더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최근 한국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한국 주식 대신 미국 주식에 대한 투자 열풍이 불고 있지만, 미국의 큰손 개미들의 관심사는 세대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다만 나이를 불문하고 자산을 크게 키울 기회가 가장 많은 투자처로는 부동산이 꼽힌다.
최근 월가 대형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프라이빗 뱅크 사업부가 발표한 고액 자산가 투자 선호도 조사를 보면, MZ세대(21~43세) 투자자들과 기성 세대(44세 이상) 투자자들의 자산 배분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주식과 코인, 대체 투자였다.
주식의 경우 MZ세대의 자산 배분 비중은 28%인 반면, 기성 세대는 55%로 차이가 가장 컸다. 전통적인 투자처인 주식과 채권을 합친 경우, MZ세대는 자산의 47% 정도를 배분한 반면, 기성 세대는 74%를 배분해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이밖에 MZ세대는 대체 투자와 코인에 기성 세대보다 각각 12%p, 13%p 더 큰 비중으로 자산을 배분했다.
대체 투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프라이빗 에쿼티(PE)와 사모 대출, 부동산, 인프라스트럭처, 사모 부동산 등에 투자하는 것이다. 소수의 투자자들이 비상장 기업 경영진 등과 개별적으로 협상해 투자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헤지펀드 투자다. 공개된 상장 시장에서 공매도 혹은 레버리지 투자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헤지펀드를 통해 투자하는 방식이다. BOA 측은 MZ 세대는 전자를, 기성 세대는 후자를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자산을 키울 기회가 가장 큰 투자처에 대해서도 세대 간 의견이 달랐다. 젊은 층은 신흥국 주식에 대한 관심이 적고, 코인이나 디지털 자산, 비상장 기업·브랜드 등을 유망하다고 본다. MZ세대의 경우 코인/디지털자산(26%)에 이어 PE(26%), 개인기업/브랜드(24%), 채권(17%), 미국 주식(14%) 순이다. 반면 기성 세대는 미국 주식(41%)과 신흥국 주식(25%), 채권(12%)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코인/디지털 자산 성장성이 높다고 본 경우는 4%에 그쳤다.
다만, 부동산 선호도만큼은 세대를 불문했다. MZ세대는 부동산(31%)을 가장 유망한 투자처로 봤고, 기성세대는 미국 주식에 이어 부동산(32%)을 꼽았다.
전체 고액 자산가의 65%가 미술품 등 수집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집계됐다. MZ세대만 따로 보면 94%가 관심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MZ세대는 시계(46%), 와인·증류주(36%), 희귀 클래식 자동차(32%), 운동화(30%), 골동품(30%)에 대한 관심이 기성 세대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았다.
마이클 펠자 BOA 프라이빗뱅크 투자 책임자는 “MZ 세대는 2000년 닷컴 버블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기성세대에 비해 코로나19 이후 최고의 증시 랠리를 주로 목격한 세대”라며 “이들은 다양한 투자 플랫폼 출시 덕에 자기 주도적으로 코인이나 기업 운영에 직접 투자해 돈을 벌 수 있다는 낙관론이 비교적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대체 투자의 경우 최근 5년간 투자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다”고 덧붙였다.
이번 조사는 자금 운용이 가능한 자산 300만달러(약 42억원) 이상인 개인 자산가 1007명을 상대로 진행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오는 2045년까지 세대 간 부 이전이 84조 달러(약 11경6256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절반에 가까운 약 42%가 고액자산가(HNWI)들의 자금 이동일 것이라는 월가의 예상이 있다. BOA 측은 앞으로 10년 안에 미국 내 부의 이전 중 30조달러가 여성에게 이전될 것으로 예상하며 여성 투자자들의 성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최근 국내 부동산 시장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일부 활기를 띠고 있는 가운데, 한국 투자자들은 국내 주식을 팔고 미국 주식이나 부동산 등 다른 투자처로 이동하는 분위기다. 한국예탁결제원 등 집계에 따르면, 개인 투자자들은 올해 상반기 중 한국 주식을 약 11조원 넘게 매도한 반면, 미국 주식은 8조원 넘게 사들였다.
5월까지를 보면 특히 한국 개인 투자자들의 변심이 눈에 띈다. 한국 반도체 간판기업 삼성전자가 올해 2분기 깜짝 호실적을 내면서 ‘9만 전자’를 향하는 가운데, 정작 개인 투자자들은 주식을 대거 매도하고 미국·대만 반도체 간판주를 집중 매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SK하이닉스에 이어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용 반도체 특수를 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도입 여부와 재벌 총수 일가의 상속세 마련용 지분 매도 등 국내 증시 리스크를 감안할 때 엔비디아 등 미국 반도체 기업에 투자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한국거래소 집계에 따르면, 올해 6월 5일부터 7월 5일까지 한 달간 한국 개인 투자자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식을 각각 약 5조4709억원, 3891억원 순매도했다. 7월 5일 하루만 보면, 개인 투자자들은 삼성전자 주식을 약 1조7272억원어치 순매도해 올해 3월 21일(약 1조5423억원) 이후 최다 매도 기록을 냈다. 전날인 4일 순매도 금액(1조2311억원)을 합치면 이틀 간 3조원 넘게 내다 판 셈이다.
반면 예탁결제원 집계를 보면, 같은 기간 국내 투자자들이 가장 많이 순매수한 해외 주식 상위권은 모두 미국·대만 반도체 주식이었다. 순매수 1위 종목은 AI용 반도체 간판기업으로 통하는 엔비디아(순매수 9억1860만달러·약 1조2700억 원)였고, 2위는 미국 반도체 설계기업 브로드컴(2억7474만달러)이었다. 이어 35위는 순서대로 엔비디아 주가를 2배로 따르는 고위험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인 그래닛셰어스 2X 롱 엔비디아 데일리 ETF, 미국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기업(파운드리)인 대만 TSMC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순이다. 해당 기간 동안 개인 투자자들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순매도 금액은 약 5조8600억원이다. 해외 주식 순매수 상위 5개 종목 순매수액을 전부 합친 금액(총 18억1816만달러, 약 2조5136억원)의 두 배가 넘는 규모다.
국내에서는 모든 개인 투자자를 넘어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고액 자산가들에 눈길이 쏠린다. 올해 상반기 중 KB증권 고액 자산가 대상 WM(자산관리) 자산은 총 60조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8월에 50조원을 돌파한 이후 10개월여 만이며, 앞서 통합 법인이 출범한 2017년 1월(12조6000억원)의 5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삼성증권의 초고액 자산가 대상 자산관리특화 서비스 ‘패밀리오피스’ 고객도 100가문, 자산 규모로는 총 30조원을 넘어섰다. KB경영연구소의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금융자산을 10억원 이상 보유한 개인 고액 자산가는 2022년 42만4000명에서 지난해 45만6000명으로 1년 만에 7.5%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19년에는 32만3000명이었다. 현재 개인 고액 자산가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은 총 300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의도 증권가에 따르면, 노후 생활 자금이나 증여·상속·절세 등이 주요 관심인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뿐 아니라 기업공개(IPO)나 스톡옵션, 주식·코인 투자 등으로 일찍 부를 쌓은 청년 갑부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부자들이 늘어나자 지난해 8월 입주를 시작한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원베일리 단지 내 상가에는 내로라하는 국내 유명 증권사들이 앞다퉈 WM 센터를 열었다. 해당 건물 1층과 4층에는 미래에셋증권, 2층은 NH투자증권과 삼성증권, 3층은 KB증권, 5층은 유안타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이 들어서는 식이다.
국내 자산가들은 반도체 업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저평가 업종으로 자금을 분산 투자하는 분위기다. 한국투자증권 측은 “자산가들은 올해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인공지능(AI) 관련주 비중을 조금씩 줄이는 한편 다가올 금리 하락 국면에 대비해 헬스케어와 같은 성장주라든지 금융주 등 저평가 부문으로 비중을 늘리고 있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제롬 파월 미국 연준의장이 7월 9일과 10일 차례로 미국연방 상원과 하원에서 열린 통화정책 청문회 자리를 통해 금리 인하 임박 가능성을 시사하자, 이 때를 기점으로 뉴욕증시에서는 금융주와 헬스케어, 중소형주 주가가 빠르게 반등한 바 있다.
5월 말을 기준으로 미국판 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 선물시장 투자자들은 연준이 오는 9월 첫 금리 인하에 나설 확률을 90.9%, 11월 두번째 금리 인하에 나설 확률을 61.6%, 12월 세번째 금리 인하 확률을 56.2%로 책정한 상태다. 최소한 두번 이상 금리 인하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의미다.
최근 미국 대선 승기를 잡은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어쩌면 그들(연준)은 선거 전에, 그러니까 11월 5일 전에 할 수도 있다”면서 “그들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이라며 대선 전 금리 인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표시했다. 다만 미국 투자자들도 9월부터 금리가 낮아질 가능성을 거의 확신하며 헬스케어와 금융 등 그간 주가 흐름이 부진했던 업종을 집중 매수하는 분위기다.
김인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