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북미 노후 인프라 교체 붐으로 한 차례 랠리를 탔던 전력인프라주들이 올해 또다시 일제히 가파른 상승폭을 보이고 있다. 인공지능(AI)을 구현하기 위한 신규 데이터센터가 막대한 전력량을 소모하면서 전력 설비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AI는 이미 대규모 전력을 소비하고 있다. AI가 일상적 도구로 자리잡는 미래에는 전력 수요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AI는 모델을 학습시킬 때뿐만 아니라 사용할 때에도 막대한 컴퓨팅 자원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대 알렉스 브리스의 연구에 따르면, 표준 구글 검색은 1회당 0.3Wh의 전력을 사용하지만 AI 기반 검색 엔진은 1회당 3Wh의 전력을 사용한다고 하니 구글에서 검색했을 때의 10배 사용량을 AI 기반 검색 엔진이 더 쓰는 것이다. 박세연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모건스탠리는 2022년 수치를 기준으로 2027년에는 생성형 AI가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며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33%가 위치한 미국 전력 소비량은 2022년 200TWh에서 2026년 260TWh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설명했다. 미국 전체 전력 사용량의 약 6%에 해당하는 양이 AI 사용으로 인해 추가로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AI의 광범위한 사용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안정적인 전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전력 산업의 성장속도는 가속도가 붙을 수밖에 없다. 최근 HD현대일렉트릭이나 LS Electric, 효성중공업과 같은 전력기기 관련주들의 랠리가 계속되는 이유다. 사이클 면에서 ‘슈퍼 사이클’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기업과 산업의 성장은 명백해 보인다. 변압기 시장 호황은 교체 수요를 충족하는 수준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며, 향후 데이터센터, 신재생, 전기차 등의 전력 수요로 인한 메가 트렌드로 장기 성장의 모멘텀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이번 사이클의 근본적인 요인은 미·중 갈등으로 인한 미국의 리쇼어링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거 사이클보다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급증하는 수요에 비해 속도를 못 따라가는 공급이 앞으로도 사이클의 진폭과 기간을 연장시킬 것이란 기대를 낳고 있다. 전력기기 산업은 노동집약적 특성을 가지며,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제조 과정에서 정밀한 품질 관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숙련된 인력 양성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단기적으론 생산 능력을 빠르게 확장하기 어렵고, 생산 설비 및 인력 충원에도 시간이 필요해 공급 부족이 장기화될 수 있다.
최근 HD현대일렉트릭이나 이튼이 직간접적인 증설을 발표하고 있지만, 급증하는 수요에 비해 여전히 보수적인 모습이다. 이처럼 생산설비가 한정된 상황에서, 공장은 최대로 가동되며 업체들은 최대 2030년에 납기할 수주를 논의하고 있다. 이에 전력기기 업체들의 공급자 우위 환경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손현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15년만에 도래한 전력 산업의 확장 사이클은 과거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판단한다”며 “이번 사이클은 교체 수요 뿐만 아니라, 데이터센터와 신재생 에너지 등 신규 수요가 함께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 과거 교체 사이클이 최소 6년간 지속된 것을 감안하면, 이번 사이클은 적어도 2029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지금 전력인프라주의 주가가 강세인 현상은 국내외 공통적이다. 무엇보다 빅테크들이 AI 시대에 맞춰 전력 확보에 집중하면서 AI 시대의 촉매제로서 전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지난 3월 24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데이터센터 수요가 늘어나면서 빅테크들이 데이터센터 가동에 필요한 에너지 전력 확보에 몰두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동안은 데이터센터화 관련해서 클라우딩이나 반도체 주가가 올랐다면 기본 인프라로 전력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존웹서비스(AWS)의 빌 바스 부사장은 세계적으로 사흘에 하나씩 새로운 데이터센터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는 데이터센터의 수익성을 결정할 핵심 요소로 전력을 꼽기도 했다.
게다가 데이터센터 건설만으로 전력이 많이 소요되는 것은 아니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미국 내 제조업 공장 건설 증가, 수송·난방·중공업 부문의 전기 전환 등 전력 수요를 늘리는 다른 요인들도 중첩된 상황이다. 북미 변압기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국내 전력기기주들의 주가가 선전하고 있는 이유다.
전 세계 데이터센터 8000곳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미국에 있는 만큼 미국 내 전력 사정에 관심이 집중된 상태지만, 데이터센터 건설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적으로 데이터센터·AI·가상화폐 부문의 전력 수요가 2026년까지 2배가 될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국내 전력변압기 업체들의 피어그룹(Peer group)으로 자주 거론되는 기업은 이튼(ETN)이다. 이번 1분기에도 높아진 시장의 눈높이를 넘어서면서 22개월 연속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하고 있다. 매출은 기대했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조정 영업이익률은 전년 동기 대비 기준으로 3.4%나 개선됐다.
김도현 삼성증권 연구원은 “이미 실적을 발표한 배전설비 기업인 버티브홀딩스의 분기 실적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북미 배전설비 시장의 호황을 입증하는 지표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튼의 지난해 5월 주가 수준은 160달러 정도였으나 올 5월 초엔 2배인 330달러까지 올라갔다. 이튼의 실적 발표에서 눈에 띄는 점은 데이터센터의 성장 속도였다. 이튼은 지난해 3분기 실적 발표 과정에서 데이터센터 관련 시장의 성장 전망에 대해 2022~2025년 중 연간 상승률 16%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1분기 실적 발표 과정에서는 기존 전망치 대비 상당히 높아진 연간 상승률 25%를 제시했다.
실적과 수주를 반영해 국내 전력기기 업체들의 주가는 가파르게 올랐지만 국내 전력기기 및 전선 업체들은 해외 피어그룹 대비 전력기기는 상대적 저평가, 전선은 고평가 상태다. 국내 송전 변압기 업체들의 2025년 평균 주가이익비율(PER)은 15.8배로 해외 송전 업체들의 평균 PER 22.1배 대비 30% 할인되어 있다.
반면, 전선 업체들은 국내 2025년 평균 PER 26.1배, 해외 16.4배로 국내 업체들이 50% 프리미엄을 받고 있다. 특히 전선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시가총액이 적어 개인투자자들이 많이 몰리며 주가가 빠르게 오르다 보니 고평가 정도가 심해진 것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올 초 9만원이던 주가가 4월 초엔 18만원까지 올랐다. 이 같은 전력인프라주의 급격한 가격 상승에 대한 밸류에이션 부담도 있었지만 HD현대일렉트릭이 ‘어닝 서프라이즈’를 발표하면서 밸류에이션에 자신감이 생긴 상태다. 전력인프라 대장주라고 할 수 있는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 1분기 영업이익이 1288억원으로 북미 및 중동 지역의 고수익성 수주가 매출로 전환되며 전 사업 부문에서 고른 성장세를 보였다. 수주잔고 확대 추세는 올해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한결 키움증권 연구원은 “1분기에만 약 14억달러의 신규 수주를 달성하며 올해 수주 가이던스 37억달러의 약 40%를 달성해 1분기 말 수주잔고는 약 6조7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24.4% 증가했다”며 “과거 평균적으로 수주가 상반기에 집중되었음을 감안해도 올해 수주 가이던스를 웃돌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고 전망했다.
또한 데이터센터발 전력 수요 증가로 글로벌 빅테크 업체들의 변압기 문의도 이어지고 있어 변압기 수요 강세에 따른 수주잔고 확대 추세는 지속될 수 있다. 올해 신규 수주의 경우 대부분이 2027년부터 2029년 사이에 납품될 예정으로 계속해서 올라가는 변압기 생산 비용이 수주 단가 상승으로 이어지며 중장기 실적 성장세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LS Electric의 1분기 수주는 전분기 대비 81% 늘어난 6296억원으로 급증했다. 전력인프라 수주가 4443억원으로 34% 늘었으며 북미 변압기 수주가 늘어났다. 전력인프라 잔고는 2조1000억원으로 전분기 대비 11% 증가했다. 이외 스마트그리드도 1540억원의 수주를 기록했다.
효성중공업 역시 향후 실적 가시성을 보여주는 수주잔고 성장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1분기 수주잔고는 51억달러로 전년 대비 66.4% 증가했으며, 이 중 57.5%가 북미향 수주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북미향 수주잔고 비중이 44.9%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미향 수주가 전체 수주 증가를 주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전력기기 확장 사이클에 맞춰 인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기존 350명에서 최근 390명까지 제조 인력을 확대했다. 또한 공장의 가동률을 90%까지 끌어올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제룡전기는 배전 변압기 매출 비중이 94%에 달하며 2022년 말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변압기 확장 사이클로 인한 수출 급증이 외형 성장을 이끌고 있다. 2023년 기준 수출 비중은 82%이며, 대부분 미국향으로 추정된다.
일진전기는 글로벌 유일로 전선과 변압기를 동시 생산할 수 있는 업체이다. 미국 전력기기 호황으로 변압기 수주잔고가 쌓이고 있으며, 설비 확장에도 나서고 있다.
전력기기 투자는 ETF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특히 최근에 출시된 원자력 ETF는 원자력을 비롯한 전력 밸류체인에 골고루 투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KB자산운용의 KBSTAR 글로벌원자력 iSelect ETF는 국내·외 원자력 밸류체인(가치사슬)에 투자할 수 있으며 1년 수익률은 70.02%에 달한다.
2024년 5월 기준 ‘KBSTAR 글로벌원자력 iSelect ETF’의 섹터별 비중을 보면 원자력 발전소가 62.3%로 가장 크고, 원재료(우라늄) 34.5%, 원전 관련 서비스 3.2%순이다. 대표 기업은 청정에너지 생산업체인 콘스텔레이션에너지(25.52%)와 우라늄 생산기업 카메코(21.61%)다. 국내 기업으로는 두산에너빌리티(10.66%), HD현대일렉트릭(6.81%) 등이 있다.
[김제림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5호 (2024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