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지어져 재건축 연한(30년)을 막 넘긴 서울 강남구 수서·일원동 노후 단지들이 안전진단 절차를 속속 밟고 있다. 정부가 안전진단 규제를 완화하는 1·10 대책을 발표했지만, 법 개정이 필요한 만큼 이를 기다리기보다 기존 절차를 빨리 추진하는 속도전에 나선 것이다. 서울시는 수서차량기지를 입체적으로 복합 개발하는 방안도 추진중이다.
조달청의 국가 종합전자조달 시스템인 ‘나라장터’에 따르면 강남구는 지난 2월 일원동 가람아파트에 대한 재건축 정밀안전진단 용역을 발주했다. 가람아파트는 1993년 최고 5층 높이, 13개 동, 496가구 규모로 지어졌다.
가람아파트 재건축추진준비위원회 관계자는 “1·10 대책에서 도시계획정비법을 따르면 안전진단 면제는 없고 순서만 바뀔 뿐이더라”며 “어차피 안전진단을 받아야 하면 빨리 추진하는 게 맞다고 봤다”고 말했다.
같은 달 일원동 상록수아파트에 대한 재건축 정밀안전진단 용역도 시작됐다. 1993년 준공된 이 단지는 최고 5층 높이, 22개 동, 740가구 규모다. 상록수아파트 재건축추진준비위 관계자는 “후속 조치를 기다리다 지난달 말에 정밀안전진단을 신청했다”며 “공사비가 계속 오르니 조금이라도 빨리 통과하는 게 오히려 절약하는 것이란 판단을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예비안전진단 문턱을 넘은 수서동 삼익·신동아아파트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1992년 준공된 수서 삼익은 다음 단계인 정밀안전진단을 신청하기 위해 비용을 모으는 중이다.
수서 까치마을은 지난 1월에 잠시 중단했던 예비안전진단 동의서 징구 절차를 다시 추진하고 나섰다. 수서까치마을 재건축추진준비위 관계자는 “최근 조직도 개편해 적극 활동하려고 한다”며 “4월까지 주민 동의를 받아 구청에 (예비안전진단을) 신청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앞서 정부는 1·10 대책을 통해 준공 30년이 넘은 단지는 안전진단을 받지 않아도 재건축을 시작하게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현재는 안전진단 결과 A~C등급을 받으면 재건축을 할 수 없다. D~E등급을 받아야만 재건축이 가능하다.
정부는 안전진단을 통과하지 못하면 재건축이 아예 안 되는 현 상황을 바꿀 계획이다. 안전진단은 사업시행계획인가 전까지만 통과하면 된다는 게 정부안이다. 재건축 절차는 크게 ‘안전진단→정비구역 지정→조합 설립→사업시행계획인가→관리처분계획인가→철거 및 착공’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다. 여당에서 최근 재건축안전진단제도를 개편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한 이유다. 재건축 안전진단이란 명칭을 ‘재건축 진단’으로 바꾸는 내용도 법안에 포함됐다. 다만 총선을 앞둔 데다 여소야대인 국회 상황을 고려하면 법이 언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또한 수서·일원동은 1990년대 초반 수서택지개발지구로 지정돼 대규모 단지가 공급된 곳이다. 노후계획도시 특별법 적용이 가능한 지역인 셈이다. 하지만 역시 법이 적용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토교통부 지침이 나와야 하고 지자체가 조례를 바꾸고 기본계획을 세워야 한다. 아무리 빨라도 2년은 족히 걸리는 셈이다. 선도지구도 1기 신도시 위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 안전진단면제 등 혜택도 통합 재건축을 추진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수서·일원동 노후 단지들은 이에 차라리 용적률·용도지역 상향이 서울시가 만들고 있는 새로운 지구단위계획에 담길 수 있게 건의할 방침이다. 지구단위계획은 쉽게 말해 지역 전반에 대한 개발 가이드라인이다. 일부 단지는 대모산과 광수산 인근에 있어 용도지역이 제2종 일반주거지역으로 낮은 상황이다.
제3종 일반주거지역에 속한 아파트도 용적률이 200%를 넘는 중·고층 단지다. 사업성 개선이 시급한 셈이다. 최근 8개 단지 재건축추진준비위가 모여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든 배경이다. 비상대책위 관계자는 “노후계획도시 특별법에 대한 기대는 낮은 상황”이라면서도 “법이 만들어진 취지가 있지 않냐. 여러 단지와 함께 그 취지를 최대한 반영해달라고 서울시에 건의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고준석 연세대 상남경영원 주임교수는 “수서·일원동 재건축의 관건은 용도지역, 용적률 규제를 어떻게 풀어주느냐”라며 “대지지분이 적은 소규모 단지도 있어 잘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서동의 한 공인중개소 대표는 “노후계획도시 특별법이나 안전진단 규제 완화 수혜단지로 알려졌지만 매매 가격에 반영되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다만 재건축 설명회가 활발하게 열리며 호가가 내려가지 않고 관망세로 접어든 분위기”라고 언급했다.
주변 호재로는 수서차량기지 복합개발 사업이 꼽힌다. 서울시는 지난해“도심을 단절시키고 인근 지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꼽히는 수서차량기지를 입체·복합개발한다”고 밝혔다. 강남구 자곡동에 위치한 수서차량기지는 면적이 약 20만 4280㎡(6만 1903평)에 달한다. 폭이 300m, 길이가 1㎞가량인 남북방행 장방형 형태를 가졌다. 검사고, 관리동, 정비동, 유치선 33개 등 주요 시설이 배치돼 있다.
서울시는 이곳이 서울교통공사 소유라 직접개발이 가능하다고 보고 우선사업 대상지로 선정했다. 수서차량기지를 동남권 디지털 기반의 ‘첨단산업 복합도시’로 육성하는 게 목표다. 수서차량기지는 SRT, GTX-A 등 광역교통이 집결되는 만큼 개발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봤다. 삼성~양재~수서~판교로 이어지는 동남권 지식산업 거점을 만들 계획이다. 서울로 향하는 정보기술(IT) 기업의 첨단업무 수용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고밀 복합개발 지역인 리브고슈 사례도 벤치마킹한다. 리브고슈는 철도 상부에 인공지반을 조성해 상업·주거·교육·녹지 등으로 복합개발한 사례다. 차량기지기능을 유지하면서 상부를 기존 도시와 연계한 입체도시로 조성한 셈이다. 이를 참고해 수서차량기지 개발 규모는 9~16층으로 계획했다. 업무 중심의 주거·공공·상업·철도시설을 적정 배분할 예정이다. 세부 도입시설은 추후 확정한다.
인공데크 상부는 보행친화 공간으로 조성한다. 대상지는 우면산, 구룡산~대모산~남한산성 등을 잇는 녹지축이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개발을 통해 한강과 탄천이 연결되는 수변축과 수서~문정~위례로 연결되는 도시축을 완성할 방침이다. 입체복합개발을 할 때 동부간선도로, 자곡로와 직접 연결해 지역 간 연계 기능도 원활히 한다. 동서와 남북으로 단절돼 있는 녹지 생태축과 도시축을 연결하는 게 핵심이다. 이 경우 광역 환승 거점인 수서역 일대는 명실상부한 중심지로 변모할 전망이다.
현재 수서차량기지 일대는 도시관리계획상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에 속한다. 개발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선 그린벨트가 풀려야 하는 것이다. 때마침 서울시는 최근 1971년 지정한 후 엄격하게 유지돼 온 그린벨트의 공간 활용 방안을 새로 찾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서울의 전체 그린벨트 면적은 약 149.1㎢다. 서울 면적의 약 24.6%에 해당하는 규모다.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53년간 그 면적이 엄격하게 유지돼 왔다.
제도가 오래된 만큼 여러 문제도 생겨났다. 그린벨트 주변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는 게 대표적이다. 심각한 수도권 주택공급 문제를 풀기 위해 그린벨트 인근에서도 많은 국책 사업이 추진됐고 그 결과 이미 훼손된 곳들도 여럿이다. 강남구 수서 차량기지 일대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탄천 주변의 녹지 공간이었지만 1990년대 수서역세권 공공주택지구가 들어서며 이곳에 차량기지가 놓였다. 서울시가 “이미 도시화됐거나 미래 교통수단 도입이 필요한 지역을 위주로 그린벨트 해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혀 앞으로 변화가 주목된다.
[이희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3호 (2024년 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