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이 올해 충분히 전기료를 인상하지 못하면 22조원가량의 자금 부족에 시달릴 것으로 추정된다. 자금 부족은 한전채 발행 증가로 이어진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금융시장이 대내·외 여건에 의해 불안정한 상태로 돌변하면 한전채발 금리 급등 현상으로 지난해 말 발생한 단기 자금시장 교란이 재발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매일경제신문이 국내 한 증권사와 함께 전기료 인상 수준별 재무상태를 점검한 결과 전기요금을 현행 수준에서 계속 동결하면 올해 한전의 부족자금 규모는 22조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됐다. 부족자금 규모만큼 한전은 채권 발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행 전기료가 유지된다면 추정되는 한전의 전력 판매단가는 1㎾h당 평균 145원이다. 이때 한전은 올해 영업 이익과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이 각각 12조3000억원 적자와 1조 3000억원 적자를 기록하게 된다.
EBITDA는 기업의 현금창출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적자를 기록하면 그만큼 기업 현금이 고갈된다는 뜻이다. 또 한전은 매년 13조원가량 설비투자에 나서고 있다. CAPEX로도 불리는 설비투자는 한전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필수적으로 지출 해야 하는 비용이다. 증권업계 추정에 따르면 올해 한전 설비투자 비용은 14조원으로 지난 1~2년 수준(13조원) 대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한전의 순금융비용이 어느 정도 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지난해 회사채 발행이 크게 늘면서 한전의 이자비용은 급증했다. 한전의 올해 순금융비용은 4조2000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 2~4분기 만기가 돌아오는 한전채 규모도 3조원이 넘어선다. 설비투자, 순금융 비용과 더불어 만기채 차환에 필요한 비용을 고려할 때 전기료 추가 인상이 없다면 한전은 경영 과정에서 올해 22조원 이상 규모의 자금이 부족할 전망이다.
앞서 정부는 올해 경제 정책 방향 발표를 통해 지난해 28조8000억원에 달했던 한전채 발행 물량을 올해 10조원 안팎으로 낮추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 같은 정부의 발행 목표 수준은 적절한 전기료 인상을 전제로 한 수치다. 증권업계에선 전기료가 충분히 인상되지 못하면 흑자전환 시기가 늦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자연스레 채권 발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 그동안 한전은 채권 발행으로 연료비, 전력 구입비 등을 충당해왔다. 만약 자금 부족 사태가 장기화하면 그만큼 한전채를 발행해야 한다. 이에 따라 지난해 말처럼 자금시장 교란이 우려되는 것이다.
한 금융당국 고위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금융시장에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지만 한국전력 이슈가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이라며 “전기요금 인상이라는 근원적 해결책이 없으면 한전채가 다시 도화선이 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심지어 올해 2분기 이후 산업통상자원부 의견대로 전기요금을 1㎾h당 38.5원(1분기 인상분 포함 시 연간 51.6원) 인상해도 부족자금 9조 6000억원이 발생한다. 이때 한전 영업이익과 EBITDA는 각각 1조 8000억원과 11조8000억원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설비투자와 금융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나마 상황은 개선된다. 국제유가를 비롯한 에너지 비용이 극적으로 내려가지 않는 한 지속적인 전기료 인상은 당분간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한전은 벌써 10조원에 달하는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이는 지난해 연간 한전채 발행액(약 32조원)의 3분이 1수준이다. 지난해 말 국회가 한전채 발행한도를 적립금 및 자본금 합산수치의 5배로 늘리면서 발행 한도는 100조원 초반대로 추정된다. 5월 중순 기준 한전채는 77조원가량 누적 발행돼 약 30조원가량의 여유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적자 규모가 커지면서 자본금이 쪼그라들면 한전채 발행 한도 역시 축소된다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이영원 흥국증권 연구원은 “기온이 상승해 전력수요가 증가하는 여름에 적자폭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라며 “이 경우 한국전력의 부채비율 상승과 채권 발행 규모가 더욱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라고 말했다.
발행 물량이 늘어나면 금리도 재차 높아질 수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연 5.99%까지 높아졌던 한전채 발행 금리는 올해 초 3.5%까지 떨어졌다가 현재 3% 후 반대로 반등했다. 김명실 하이투자 증권 연구원은 “하반기 전기요금 인상이 쉽지 않다면 사채 발행을 통한 추가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라며 “고금리 한전채가 과다 공급되면 국내 채권 시장 수요를 잠식했던 상황이 재현될 우려가 크다”라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지난해 부동산 PF 시장 불안이 ‘레고랜드 사태’를 계기로 폭발 했던 현상이 재발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채권 발행에 부담을 느낀 한국전력은 기업어음(CP) 조달에 열을 올리고 있다. 5월 중순 기준 올해에만 1조8000억원의 CP를 발행했다. 만기가 3개월~1년으로 보통 짧은 CP는 기업이 단기적으로 자금을 구하기 위해 활용한다. 경쟁입찰 필요성도 없이 신용등급에 따라 발행이 가능해 회사채 대비 발행이 쉬운 편이다. 5월 기준 한국전력의 CP 발행 잔액은 약 5조원으로 5개월 새 50% 이상 증가했다. 한전채로 인한 자금 시장 ‘구축효과’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CP를 활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전력의 지난해 부채비율은 459%로 지난 2020년 187% 대비 크게 악화됐다. 실적 추이도 좋지 않 다. 올해 1분기 한국전력은 21조 600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31% 실적이 개선됐다. 전력 수요 변화가 적었지만 과거부터 누적된 전기요금 조정이 외형 성장으로 이어졌다. 다만 영업이익은 6조200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연료비, 구입전력비가 각각 9조1000 억원, 12조2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8%, 15% 증가하며 원가 부담이 늘었기 때문이다.
적자의 늪에 빠진 한국전력은 주가 흐름도 좋지 않다. 지난해 2016년 고점 기준 한국전력 주가는 70% 가까이 급락했다. 이후 8년 연속 내림세를 지속 중이다. 증권업계에서도 한국전력 투자 의견은 좋지 않다. 대부분 증권사들이 투자의견 ‘중립’을 유지하고 목표주가를 하향 중이다.
유재선 하나증권 연구원은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3분기는 소폭 흑자가 예상되기도 한다”라면서도 “다만 연간 당기순손실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사채발행한도 관점에서 부족한 수준으로 판단되며 연내 법안 개정을 통한 한도 확대 또는 추가 요금 인상 조치가 필요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박광래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2024년까지 장부가치 하락이 예상 되는 가운데 2만원 중반 수준의 적정 주가 도출은 어렵다고 판단한다”라며 “2024년 연간 영업이익 흑자 전환의 기대감이 본격 반영되기 시작 할 때까지는 박스권 주가 흐름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주가 방향성에 중요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수년 동안 한국전력 주식을 팔아치우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5월 중순 기준 한국전력의 외국인 투자자 지분율은 14.55%에 불과하다. 앞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전력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했던 시기는 지난 2016년 9월로 당시 지분율은 33.4%에 달했다.
대부분 한국전력 주식을 사들인 투자자들도 손실 중이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자사를 통해 한국전력에 투자한 투자자 6만4000여 명의 평균 수익률은 -21%였다. 수익 투자자 비율도 100명 중 10명에 불과했다.
한편 정부는 5월 15일 전기요금을 1㎾h당 8원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물가 상승 우려와 국민 여론 등을 고려해 2분기 전기요금 조정을 미루다가 이날 소폭 올렸다. 증권업계에선 이번 전기요금 인상으로 인해 단기적인 한전채 발행 이슈는 해소 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전기요금 추가 인상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산자부의 올해 전기요금 인상 목표치(51.6원)를 달성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30.5원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민재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급한 불은 껐지만 부담이 너무 큰 상황”이라며 “다음 인상 시점일인 3분기는 전력 사용이 많은 여름이기 때문에 대대적인 인상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충분한 전기료 인상이 이어져 한전채 발행 물량이 축소될 경우 또 다른 공사채로 불똥이 튈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공사채는 일반 회사채 대비 상대적으로 우량물로 인정돼 기관투자자 수요가 몰리는 편이다.
최근 개인투자자들은 한전채 대란이 발생할 경우 오히려 채권 매수 기회로 보고 접근 중이다. 한전채 발행이 늘어 금리가 오르게 되면 그만큼 향후 기대할 수 있는 자본(매매) 차익분이 커지기 때문이다. 채권 가격과 금리는 반대로 움직인다. 실제 지난해 말 표면금리 5.99%에 발행된 한전채 ‘1309’의 이자수익을 고려한 연환산 세전 수익률은 16%에 달했다.
이후 시장이 안정돼 금리 수준이 3%대까지 떨어지면서 채권 가격이 뛴 셈이다.
매일경제 증권부 차장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