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세 우위의 고착화인가, 단순한 전세 시장 숨고르기인가. 전세가 하락이 매매가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될까.
서울을 비롯한 전세 시장이 완연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시장에서 이같은 물음이 확산되고 있다. 서울 강남권 전세수급지수는 3년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8월 ‘전세대란’을 우려했던 일부 전문가의 목소리가 쑥 들어간 지 오래다. 물론 전세 수요 상당수가 월세로 이동하면서 생긴 전세 시장 공백이 만든 ‘일시적 현상’이라 볼 여지도 충분하지만 임대차법 시행 2년을 맞아 일각에서 예상했던 전세난은 오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8월 12일 KB국민은행이 발표한 주간 주택 시장 동향에 따르면 이달 8일 기준 서울 강남권 전세수급지수는 99.9을 기록했다. 일주일 전 대비 1.3포인트 하락해 100선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2019년 3월 18일 99.8을 기록한 이후 이 지수가 100이하로 떨어진 건 무려 3년 5개월 만이다. 당시에는 1만 가구 규모 송파구 소재 헬리오시티가 입주하는 등 시장 충격 요소가 있었지만 올해는 특별한 이벤트 없이도 시장이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전세수급지수는 전세 공급 부족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라 할 만하다. 기준선 100보다 높으면 공급이 부족하고 100보다 수치가 낮으면 공급이 수요를 웃돈다는 뜻이다.
그동안 강남의 전세수급지수 추이는 절대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수급지수는 2019년 2분기부터 올라 2020년 11월 초 200에 육박했다. 임대차법 개정안이 시행된 직후 모두가 급등한 전세금에 세입자가 고통받는 시기였다.
서울 시내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붙은 전월세 시세표. <사진 연합뉴스>
▶전세 수요가 월세로 이전
그런데 어떻게 2년 만에 전세수급지수가 확 떨어진 것일까. 최근 서울에 시장 트렌드 자체를 바꿀 만한 대형 입주 이벤트는 없었다. 그렇다면 수요가 줄어든 것으로 봐야 한다. 줄어든 수요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집단적으로 임차할 집을 찾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라도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부동산원의 통계를 살펴보자. 한국부동산원 집계에 따르면 지난 7월 전국 주택 전세 가격은 전월(-0.02%) 대비 0.08% 하락해 낙폭이 커졌다.
서울 주택 전세금은 0.07% 하락해 전월(-0.02%)보다 낙폭이 확대됐다. 경기도의 주택 전세금은 6월 보합에서 7월에는 0.21% 떨어져 하락 전환됐다. 하지만 전세와 달리 월세 가격은 상승세가 이어지는 추세다. 서울의 주택 월세 가격은 6월 0.06% 상승에서 7월에는 0.07%로 확대됐다. 같은 시기 아파트는 0.24%에서 0.25%로 오름폭이 커졌다. 전국 주택 월세는 6월과 마찬가지로 7월에 0.16% 상승했다. 전국의 아파트 월세는 0.22% 상승해 전월(0.21%)보다 소폭 오름세가 커졌다. 통계를 유기적으로 살피면 전세 수요 상당수가 월세로 이동했다는 뜻이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시중금리와 기준금리가 가파르게 오른 것이 큰 역할을 했다. 8월 16일 기준 은행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7월 신규 취급액 기준 코픽스는 6월(2.38%)보다 0.52%포인트 오른 2.90%로 나왔다. 한 달 만에 코픽스가 이만큼 오른 건 2010년 1월 신규 취급액 기준 코픽스가 발표되기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가장 상승 폭이 높았다. 신규 취급액 기준 코픽스가 2.9%대에 올라선 것은 2013년 2월 2.93%를 찍은 후 9년 5개월 만이다.
코픽스는 각종 대출의 변동금리 상품의 금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돌아간다. 쉽게 말해 코픽스가 오르면 대출 이자도 늘어나는 구조다. 이날 기준 연 3.92~5.99% 수준이었던 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은행 등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 변동금리는 곧바로 코픽스 변동분만큼 올라간다. 주택담보대출 대출금리의 상단이 연 6%대를 넘어선다는 얘기다.실제 16일까지 KB국민은행의 주담대 변동금리는 3.92~5.32%였는데 하루 사이에 4.44~5.84%로 뛴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은행 등에서는 최고 금리 6%가 넘는 상황까지 나왔다.
전세자금대출을 변동금리로 받은 경우 1년 만에 금리가 2%포인트 오른 것은 예삿일이 되어버렸다. 3%대에서 받은 전세자금대출 금리가 5%가 됐다며 울상을 짓는 가구가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이자 부담은 급속도로 올라가는 구조다. 기존 이자가 한 달에 60만원이었다면 1년 만에 이 금액은 90만원 안팎으로 상승한다.
금리 인상 국면이 끝난 것도 아니다. 금리 인상 사이클의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년 중순까지는 금리 인상 열차가 멈추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전세자금대출을 변동금리로 받을 경우 끝을 알 수 없는 이자 증가의 늪에 빠진다는 얘기다.
하지만 월세로 계약하면 적어도 이런 리스크는 헤지할 수 있다. 샤일록(Shylock)의 심장을 가진 집주인도 계약기간 동안 금리가 올랐다고 월세를 더 내라고 하지는 않는다. 현행 제도상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월세 계약이 사실상 고정금리 전세대출을 받은 것과 진배없이 여겨지는 것이다. 한 세입자는 “은행에 이자를 내나 집주인에게 월세를 내나 세입자 입장에서 매달 들어가는 돈만 적으면 그걸로 오케이”라며 “현 시점에서는 전세보다 월세 계약이 훨씬 유리해 보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월세를 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시장에서는 월 100만원 이상 월세가 급증하는 등 고가월세 시장도 넓어지는 추세다. 부동산 정보 제공 업체 경제만랩이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을 살펴본 결과 올 상반기(1~6월) 서울 아파트 월세 거래량은 총 4만5085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월세 가격 100만원 이상인 거래는 총 1만788건으로 전체 거래의 35%에 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 월세 100만원 이상 거래량이 1만675건이었던 것과 비교해 1년간 고가 월세가 47.9%나 늘어났다고 경제만랩은 분석했다.
올 상반기 서울 아파트 월세 가격이 1만~49만원이었던 거래량은 1만5323건으로 전체의 34% 수준이었다. 월세 가격이 50만~99만원이었던 거래는 1만3974건으로 전체의 31%, 100만~199만원이었던 거래는 1만686건으로 23.7%를 차지했다. 200만~299만원이었던 거래는 2935건(6.5%), 300만~399만원 1230건(2.7%), 400만~499만원 442건(1%), 500만~999만원 421건(0.9%), 1000만원 이상 74건(0.2%) 등으로 조사됐다.
▶상생임대인 제도도 전셋값에 영향
때마침 정부가 도입한 상생임대인제도 시행으로 집주인들이 전셋값을 크게 조정하지 않는 점도 전세시세 안정에 영향을 미쳤다. 상생임대인제도는 전세 계약을 갱신할 때 임대료를 5% 상한으로 올리면 양도소득세 비과세 요건(2년 거주)을 완화해주는 제도다. 세금 인센티브를 줘서 전세금 인상을 막을 목적으로 최근 제도가 시행됐다.
그런데 임대차 시장 주류가 전세에서 월세로 바뀌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로 인해 매매가 시장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주택 시장 시세 상승기 때 전세라는 제도는 주택을 투자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효과적인 레버리지로 다가온다. 집값을 모두 치르지 않고 매매가와 전세가 차이만큼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에 높은 전세금은 매매가를 떠받쳐주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높아진 전세금이 매매가와 전세가 갭을 좁히고, 좁혀진 갭이 ‘갭투자’를 부르는 사이클이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세금이 현 상황처럼 오르지 않으면 더 이상 ‘갭투자’는 효과적인 투자법으로 효력을 유지하기 힘들다. 매매가와 월세보증금 차이는 매매가와 전세보증금 차이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전세 시장이 월세 시장으로 넘어가는 것은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사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주택을 구매하는 두 가지 요인인 ‘실수요’와 ‘투자수요’ 중 한 축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값은 올 7월 기준 6개월 연속 약세인 가운데 3년 3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8월 16일 한국부동산원 조사에 따르면 7월 서울 주택종합(아파트·단독·연립주택) 매매 가격은 전월 대비 0.09% 하락했다. 서울 주택 가격은 올해 3월 0.01% 떨어진 이후 대선을 계기로 규제 완화 기대감이 커지며 상승 또는 보합세를 보였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8월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부동산 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하지만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 영향 등으로 4개월 만에 다시 하락 전환했다. 여기에는 임대차 시장 주류가 전세에서 월세로 이동하는 현상도 한몫한 것으로 분석된다. 7월 서울 아파트값은 6월 대비 0.22% 하락하며 직전 월(-0.08%)보다 낙폭이 크게 확대됐다. 2019년 4월(-0.40%) 이후 3년 3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인터뷰를 통해 “부동산 거래 위축이나 가격이 전반적으로 하향하는 것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시장 상황을 읽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다만 그는 금융위기가 오지 않는 한 집값이 대폭 하락하는 국면이 펼쳐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 수억원 단위의 하락 거래가 나오고 있지만 크게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원 장관은 “집값이 ‘경착륙’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금융충격이 올 정도의 상황이어야 한다”며 “하지만 현재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 등 규제가 작동하고 있고 주택담보대출비율(LTV)도 40~50% 수준이다. 이런 경우에는 금융충격으로까지 이어지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전세 시장이 안정되고 있어 정부가 임대차 3법을 개편할 의지도 확 줄어든 것으로 평가된다. 국토부와 법무부는 지난 7월 주택임대차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임대차법 개선안 마련에 나섰다는 의미다. 연구용역과 전문가 의견 수렴을 기반으로 임대인과 임차인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전월세 시장 정상화를 위해 임대차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임대차법 전면 수정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원 장관 역시 여러 차례 폐지하는 게 소신이라고 밝혔다. ‘폐지에 가까운 근본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웠던 시장이 안정화 흐름을 찾아가고 있는 마당에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도 정부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법을 단숨에 없애면 시장이 더 어지러워진다는 우려도 한몫하고 있다.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견이 주류로 떠오른 것이다. 원 장관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지난 정부에서 임대차 3법은 제대로 된 공청회 한 번 없이 다수당이란 이유로 통과됐다. 졸속입법은 항상 문제를 낳는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