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용산은 행정기능이 집중된 광화문 업무지구, 금융의 여의도 업무지구, 정보기술(IT)을 포함한 강남 업무지구 등 이른바 3도심의 중심축에 위치한다. 용산은 지리적인 측면부터 이들 3개 중심업무지구를 연계하면서 서로 간의 영향을 가장 잘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기대하는 개발사업은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10여 년 이상 ‘개발시계’는 공회전했다.
하지만 용산은 새로운 이야기를 써갈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0년 넘게 방치한 용산정비창 용지 개발에 물꼬를 트겠다고 7월 26일 발표했다. 서울 한복판에 여의도공원의 2배, 서울광장 40배 규모의 아시아식 실리콘밸리를 마련하겠다는 청사진이다. 서울 노른자위 땅인 용산의 개발 계획이 발표된 것은 이번이 다섯째다. 오 시장에게는 두 번째 도전이기도 하다.
용산정비창 부지.
▶높이와 용적률 모두 완화
서울시가 잡은 용산정비창의 미래상은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다. 이를 위해 서울시 최초의 ‘입지규제 최소구역’을 지정해 법적 상한 용적률 1500%를 뛰어넘는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도록 할 계획이다. 그러면 롯데월드타워(123층, 555m)보다 높은 초고층 건물이 들어설 수 있다. 완공까지 10~15년 정도 걸릴 것으로 시는 예상하고 있다.
시는 용산정비창 일대를 일자리, 주거, 여가, 문화 등 도시생활에 필요한 모든 활동을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직주혼합의 융·복합 국제도시로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평일 퇴근 이후, 주말에 텅 비는 도시가 아닌 24시간 활력이 계속되는 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최첨단 기술기업과 연구개발(R&D)·인공지능(AI) 연구소, 국제기구 등이 입주할 수 있는 업무공간과 MICE(전시·세미나 산업) 시설, 비즈니스 호텔, e스포츠 콤플렉스, 증강현실 공연장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선다. 6000여 가구의 주거지역을 조성하면서 외국 기업·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국제교육시설·병원 등 외국인 생활시설도 유치한다. 최근 글로벌 도시들의 트렌드인 직(Work)·주(Live)·락(Play)이 함께하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오세훈 시장은 “용산 개발의 핵심 키워드는 하이테크놀로지이며 외국 기업의 주재원, 회사원이 쾌적한 도심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경쟁력이 생긴다”면서 “여가와 문화 기능을 포함시켜 24시간 즐기며 기업 활동을 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는 10년 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 사업이 무산된 원인 중 하나였던 민간 프로젝트 금융회사(PFV) 주도의 통개발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공공 기관인 SH공사와 코레일이 ‘공동 사업 시행자(지분율 코레일 70%, SH공사 30%)’로 사업을 추진하는 ‘단계·순차적’ 개발을 선택했다. 공공이 약 5조원의 재원을 투자해 용지 조성과 인프라 구축을 먼저 시행하고 민간에서 개별 용지별로 하나씩 완성해가는 방식이다. 공공이 ‘마중물’을 만들면 민간이 사업을 마무리한다는 얘기다. 시는 내년 상반기까지 도시개발구역 지정과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2024년 하반기 기반 시설 착공, 2025년 앵커 부지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래교통 중심지로 만든다
서울시는 용산정비창 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 용산 일대를 철도와 도로는 물론 미래 교통수단인 도심항공교통(UAM)이 총망라된 서울의 1호 ‘모빌리티 허브’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여의도, 강남 일대 금융·업무지구와 용산을 연계한 교통 개발이 서울의 도심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숙원 과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날 발표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분은 UAM과 지하 도로 개설이다. 우선 서울시는 용산역과 인접한 용지에 UAM 정거장을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에어택시로 대표되는 UAM은 도로, 철도 등이 혼잡한 도시에서 하늘길을 이용해 이동성을 극대화하는 교통수단이다. 미래 유망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정부가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로드맵을 준비 중인 가운데 서울시는 이에 맞춰 용산국제업무지구와 김포국제공항을 연결하는 UAM 시범 노선을 운영할 계획이다. 앞으로 김포공항뿐만 아니라 인천국제공항, 잠실, 수서 등 서울 시내 주요 거점을 연결하는 노선도 구축한다. 이 같은 구상이 현실화하면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을 이용하는 내·외국인 출입국자들이 공항에서 내려 UAM을 이용해 용산까지 이동한 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나 지하철로 환승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해질 것이라는 게 서울시의 설명이다.
아울러 서울시는 업무지구 지상에 녹지와 도보 공간을 조성하는 한편 지하에는 차량 중심의 도로교통 체계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서울시는 이날 “용산을 교통 결절점으로 해 지하 도로망을 구축함으로써 경부고속도로와 이어지고, 강변북로·올림픽대로와도 이어지는 교통 시스템을 준비하겠다”고 설명했다. 용산은 현재 철도만 따지면 경부선, 호남선 등 이미 사실상 전국으로 통하는 간선철도 노선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지하철 1·4호선, 경의중앙선 등 수도권을 관통하는 도시철도 노선도 있다. 향후 GTX-B, 수색~광명 고속철도, 신분당선 연장선 등이 들어서면 총 8개의 철도 노선 환승 체계가 구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남뉴타운 등 타 사업도 탄력
용산 개발 계획의 핵심인 용산정비창 개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주변 프로젝트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용산에는 용산정비창 외에도 한남뉴타운 재개발 등 대규모 개발과 경부선·경의선 철도 지하화, 용산공원 조성 등 굵직한 사업이 즐비하다. 용산 미군기지는 한국 최초의 국가공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정부는 용산 미군기지 용지를 단계별로 반환받으며 이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해 용산공원 전체를 개방하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목표는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 같은 도심 속 국가공원이다. 공원조성지구는 약 291만 ㎡로, 용산구 용산동 1가, 2가, 3가, 4가, 5가, 6가, 및 서빙고동 일원에 자리하고 있다. 여의도 면적과 맞먹는 규모다. 이 중 지금까지 돌려받은 부지는 모두 76만4000㎡로, 전체 용산기지의 31% 수준에 불과하다. 당초 정부는 2027년까지 용산공원을 완공한다는 목표를 잡았지만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남 뉴타운 재개발 사업은 서울 뉴타운 중 최대어로 꼽힌다. 서울 용산구 한남·보광·이태원·동빙고동 일대 111만205㎡ 부지를 재개발하는 프로젝트로, 2003년 뉴타운으로 지정됐다. 현재 5개 구역 중 1구역(해제)을 제외한 2~5구역이 사업을 추진 중이다. 3구역과 2구역이 사업 시행 인가를 받았다. 한남 뉴타운 재개발 사업이 완료되면 5개 구역 약 1만 가구 규모의 한강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서쪽으로 동부이촌동, 동쪽으로는 한남동 한남더힐·유엔빌리지 등 전통 부촌과 인접해 시너지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엔사(유엔군사령부) 용지 복합 개발 사업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태원동 22의 34 일대 대지 5만1753㎡에 지하 8층~지상 20층, 5개 동 규모의 아파트 420가구가 들어선다. 이와 함께 오피스텔 722실, 대형 호텔과 업무·상업 시설 등이 조성된다. 사업비만 2조원에 달하는 한국 최대 규모의 도심 복합 개발 사업이다. 아파트는 전용 면적 210㎡ 이상의 대형으로 구성하고 유명 브랜드 호텔도 입주할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 개발 업체인 일레븐건설은 2017년 유엔사 부지를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낙찰받아 현재 개발을 추진 중이다.
지난 3월 현대건설이 시공 우선 협상 대상자에 선정됐다. 용산은 해당 지역을 넘어 광화문과 연계를 통해 ‘국가상징거리’로 탈바꿈할 폭발력도 지녔다. 서울시는 광화문~서울역~용산~한강~노들섬~노량진을 잇는 7㎞ 거리를 국가상징거리로 조성한다는 청사진도 갖고 있다.
광화문과 용산의 관계는 프랑스 파리 구도심과 라데팡스를 참고하라는 조언이 많다. 루브르박물관과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라데팡스는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8㎞ 구간의 직선대로에는 군주국가(루브르궁)부터 프랑스 대혁명(콩코르드 광장),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샹젤리제 거리),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라데팡스)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의 역사와 미래를 한 번에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
▶사업의 일관성·지속성 담보돼야 성공
물론 용산 개발이 현실화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여전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개발 계획은 발표됐지만 정부의 의지, 경제 상황, 부동산 시장의 움직임 등의 상황에 따른 변수가 많다. 전문가들은 15년째 답보 중인 용산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업의 일관성과 지속성이라고 조언했다. 우선 일관성과 추진력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끌고 나갈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현재 용산 개발 프로젝트 중 공원 조성은 국무총리실 산하 위원회, 기반시설 조성은 국토교통부, 주변지역 관리는 서울시 등으로 관련 법과 추진 주체가 분산되면서 사업 추진 동력이 떨어진 상태다.
대통령 직속 용산 개발특구청은 흩어진 용산 개발 계획을 묶어 국가급 프로젝트로 추진할 대표 조직으로 거론된다.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외교부, 서울시 등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머리를 맞댈 수 있는 조직을 구성하고 산학연 전문가는 물론 시민·환경단체를 포함한 민간단체도 힘을 보태는 구조다.
용산정비창 같은 경우는 글로벌 기업들이 혹할 만큼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예를 들어 뉴욕시는 허드슨 야드를 개발할 당시 상업용도 개발을 유도하기 위해 사업자에게 취득세나 재산세를 감면해주는 대신 일정 금액을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도록 했다. 또한 해당 건물이 저소득층 주거비율 기준을 충족한 경우 부동산세를 경감하는 혜택을 제공했다. 이처럼 각종 혜택이 용산에만 주어질 경우 공정성과 관련된 사회적 수용 여부도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일각에선 민관합동펀드 등 용산 개발에 따른 이익을 모든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 설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희정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용산 개발은 정비창과 전자상가, 이촌동 일대 수변 공간, 재건축 단지 등 여러 사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이해관계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5년이 아니라 20년을 고려하고 계획해야 한다”며 “개발 계획의 성공적인 이행뿐만 아니라 개발 이익의 공유, 관리 등 세부적인 측면도 꼼꼼하게 짜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