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와 플랫폼은 모두 익숙한 단어지만 ‘에너지 플랫폼’은 낯설지도 모른다. 발달된 인프라 덕분에 우리는 항상 에너지를 끊이지 않고 공급받아왔기에 에너지와 더 연결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에너지 플랫폼 기업들이 잇따라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에너지 스타트업 ‘그리드위즈’와 ‘엔라이튼(구 솔라커넥트)’은 최근 각각 국내 대형 증권사 한 곳씩을 상장 주관사로 선정했다.
IB 업계에서는 에너지 분야에서도 유니콘이 탄생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이 에너지 플랫폼들의 어떤 면모에 주목했는지, 이들이 우리 삶에 더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지 취재했다.
▶공급과 수요 연결하는 에너지 플랫폼
에너지 플랫폼은 발전원과 수요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한다. 지금도 우리는 발전원과 연결돼있다. 전력거래소(KPX)와 한국전력을 통해 석탄발전소, 원자력발전소, 태양광발전소, 풍력발전소 등 발전원으로부터 생산된 전력을 공급받고 있다.
그런데 이 전력 공급 구조는 ‘탄소중립’이라는 전 지구적 과제 앞에서 도전을 받게 됐다. 발전원에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가 추가되면서다. 신재생에너지는 태생적으로 간헐성이 높은 에너지원이다. 태양광은 일조량이 풍부할 때와 그렇지 않은 시기의 발전량 차이가 매우 크다. 풍력도 마찬가지다.
발전소당 발전용량이 기존 석탄·화력, 원자력에 비해 작고 분산돼있다는 특성도 있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지난해 7월 기준 국내 에너지원별 발전량은 석탄이 33.3%, 원자력이 26.9%, 신재생에너지가 7.7%를 차지했다. 국내 가동 중인 석탄 발전소는 57기, 원자력 발전소는 24기다. 신재생에너지원 중 하나인 태양광 발전 시설은 10만 개가량이다. 그만큼 신재생에너지의 발전 시설당 발전량은 기존 발전 방식에 비해 적고 분산돼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점점 더 분산될 전력산업 구조에서는 한전 같은 단일 플랫폼이 공급을 조절하기가 어렵다. 많아야 수십여 곳의 발전원이 있는 상황에서는 공급량이 부족하거나 넘치면 사람이 컨트롤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을 찾기도 비교적 쉬웠다. 그런데 컨트롤해야 할 발전원 지점이 태양광에서만 수십만 개로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력계통을 유지하기 위해 발전원으로부터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며 조절하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더욱이 탄소중립은 저탄소 에너지로 기존 에너지원을 대체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 사용자들이 기존에 비해 에너지를 덜 사용하거나 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어떻게 하면 탄소를 덜 배출하는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을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잘’ 사용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하게 된 것이다.
▶‘수요’에서 출발한 그리드위즈
2013년 설립된 에너지 스타트업 그리드위즈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수요자들이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잘 사용할 수 있을지에서 출발한 기업이다. 이 기업의 핵심 사업 모델인 수요 관리 서비스는 전기 사용자가 일상에서 전기를 아낀 만큼 전력 시장에 판매하고 금전으로 보상받게 도와주는 서비스다. 2014년 11월 전기사업법에 근거를 둔 ‘수요자원 거래 시장’이 생겨나면서 시작됐다.
수요자원 거래 시장에 참여하고 싶은 고객이 그리드위즈를 찾으면 그리드위즈는 우선 고객사의 데이터를 분석해 대략적인 컨설팅을 진행한다. 고객사의 동의를 받아 한국전력에 누적된 회사의 데이터를 분석해 그 기업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한다. 그 뒤에 회사가 그리드위즈 생태계 안에서 수요 관리를 하고자 하면 계측 장치를 설치하고, 실시간으로 그리드위즈 시스템과 연동한다.
시스템은 전력 공급과 수요 상황에 대한 실시간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객사들의 전력 사용을 오케스트라처럼 ‘지휘’한다. 고객사는 전기가 더 저렴한 시간에 공장을 가동하는 등 전력 소비를 효율화함으로써 전력을 아낄 수 있다. 이렇게 아낀 전력을 모아 다시 전력거래소에 매각하고 그 대금을 받는 것이 사업모델이다.
전력 수요자 입장에서는 전력을 아껴 사용할 수 있고 국가 전체에서 보면 발전소를 덜 지어도 된다는 효과가 있다. 그리드위즈에 따르면 이렇게 수요자들이 전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아낄 수 있는 ‘수요자원 시장’ 용량은 올해 기준 4.5GW에 달한다. 이 중 그리드위즈가 운영하고 있는 자원용량은 2GW, 45%에 달한다. 용량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1000개소가량인 고객층이 더욱 넓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전체 발전 설비 용량도 구조적으로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수요자가 절약한 에너지를 모으기만 하는 것뿐 아니라 일종의 ‘밸브’ 역할을 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사업도 영위하고 있다. 전기를 공급하는 ‘호스’가 있다고 생각해보면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게끔 순간마다 호스를 열었다 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많으면 ESS에 에너지를 잠깐 저장했다가 공급이 적어지면 저장한 에너지를 가져다 쓸 수 있게 하는 식이다. 그리드위즈는 현재 900MW가량의 ESS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수요 관리, ESS 서비스 등을 통해 그리드위즈는 지난해 1122억원의 매출과 18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전년 대비 178% 증가했으며 영업이익은 흑자 전환했다. 매출 규모는 올해 더욱 성장할 것으로 회사 측은 내다보고 있다. 주요 주주로는 SK가스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SK가스는 보통주로 20%, 우선주로 5.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류준우 그리드위즈 사장
▶‘공급’에서 출발한 엔라이튼
엔라이튼은 공급단인 발전원에서부터 시작해 수요자들에게까지 가 닿는 플랫폼을 구축했다. 엔라이튼의 사업모델에서 가장 핵심적인 서비스는 태양광 사업자들이 편하게 발전소를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발전왕’이다. 엔라이튼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 발전왕에 누적 등록된 발전소 수는 1만여 개로, 국내 태양광 시장 전체의 10% 수준에 달한다. 설비용량으로는 2GW가 넘는다. 이는 60만여 가구가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발전왕에 등록한 사업자들은 태양광 발전소의 시작부터 관리까지 모든 단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업자가 자신의 발전소 데이터를 발전왕과 연동하면 다른 발전소들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지도에 표시되는 ‘발전여지도’ 서비스를 통해 예상 수익을 알 수 있고, 자신의 발전소에 이상 징후가 생길 때 알림을 받을 수 있다. 태양광 사업자들은 발전왕의 이 같은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 자체로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대신 주요 수입 창출원은 발전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관리 서비스와 금융 상품이다.
대표적으로 발전 시설의 예초·진단·안전 관리를 할 수 있는 ‘발전왕 올케어(O&M)’가 있다. 발전 시설들이 가입할 수 있는 ‘발전소 보험’도 핵심 서비스다. 회사 관계자는 “엔라이튼의 발전소 보험은 다른 발전소 보험보다 보험료가 낮으며, 넓은 보장 범위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많은 공급자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보니 수요자들에게도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들이 생겼다. 대표적인 서비스가 ‘RE100 솔루션’이다. 기업이 필요한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제공받겠다고 선언하는 자발적 캠페인인 RE100은 세계적으로 탄소중립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참여 기업을 넓혀갈 것으로 예상된다.
엔라이튼에 따르면 이 회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글로벌 환경경영 인증기관인 탄소 공개 프로젝트(CDP·Carbon Disclos ure Project)와 공식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RE100을 선언하는 기업들이 더욱 많아지고, 이를 달성해야 하는 2050년이 가까워질수록 실제로 해당 기업이 신재생에너지로 전력을 100% 충당했는지를 증명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고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엔라이튼이 고객사들을 대상으로 공신력 있고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재생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찾는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엔라이튼 역시 빠르게 성장하는 전기차 시장을 겨냥해 관련 신사업에도 진출했다. 충전소별 요금을 비교하고 충전소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충전왕’을 통해서다. 회사 측은 국내 최대 규모의 태양광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고 활용한 노하우가 이미 있는 만큼 전기차 데이터를 통해서도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두 에너지 플랫폼의 빠른 성장에 발전 업계는 물론 금융투자 업계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 인프라 전문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에너지 관련 스타트업은 정부 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인식과, 규제로 인해 성장이 쉽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었다”며 “이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상장까지 이어지는 기업들이 나오면 향후 비슷한 분야에 더 많은 투자들이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