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아파트 단지가 재건축·리모델링 등 정비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오랜 기간 정비사업이 중단되며 많게는 50년, 적게는 20년 넘은 아파트들이 일제히 새 아파트로 변신을 시도하며 과거 ‘전통 부촌’ 명성 찾기에 나섰다.
사실 ‘동부이촌동’은 정확한 행정구역명이 아니다. 원효대교 북단 동쪽부터 동작대교 북단 서쪽까지 펼쳐진, 한강을 둘러싸고 길게 꼬리 모양으로 생긴 지역을 ‘이촌동’이라고 부르는데, 한강대교를 기준으로 동쪽 생활권인 이촌1동을 ‘동부이촌동’, 서쪽 이촌2동을 ‘서부이촌동’이라고 부른다. 시장에서는 크게 서빙고동 ‘신동아아파트’까지를 동부이촌동으로 묶기도 한다.
동부이촌동은 한국전쟁 이후 공동주택촌(村)으로는 처음으로 ‘부촌(富村)’ 명성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원래 한강변 백사장이었던 이곳은 1967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한강변 개발계획에 따라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시작하면서 아파트촌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0평 안팎의 아파트가 더 흔했던 시절, 27~57평 초대형(?) 평형으로만 구성된 ‘한강맨션’ 같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곳 원조 부촌에서 자가용을 타고 출퇴근하던 ‘맨션족’은 세간의 부러움을 샀다. 적어도 1980년대 초반 강남 압구정지구가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동부이촌동은 한국을 대표하는 부자 동네였다. 하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 하수관에 수시로 문제가 생기는 등 주택 노후도가 심각해졌다. 특히 40년 이상 오래된 아파트를 중심으로 재건축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왔고 몇몇 단지를 중심으로 재건축 추진위원회와 조합 등이 설립됐다. 연한이 되지 않은 아파트들은 통합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소유주 간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좀처럼 사업 속도가 붙지 않으면서 동부이촌동 개발 시계는 하염없이 흘러갔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강맨션
▶한강맨션 재건축 사업시행인가… 660가구→최고 35층 1441가구 아파트로 탈바꿈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지지부진하던 동부이촌동 일대 정비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엔 한강변에 위치한 한강맨션 아파트가 재건축 추진을 위한 8부 능선을 넘었다. 용산구청은 지난 9월 말 용산구 이촌동 300-23번지에 위치한 서빙고아파트지구 한강맨션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 사업시행계획인가를 고시했다.
기존 24개동 660가구로 구성된 한강맨션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전신인 대한주택공사가 중산층을 대상으로 처음 지은 고급 아파트다. 지난 1971년 준공돼 무려 준공 47년 만인 2017년 6월 재건축조합이 설립됐다. 2019년 서울시 건축위원회 심의, 2021년 환경영향평가 심의를 통과했다. 이어 올 3월 사업시행계획인가 신청을 접수했다. 용산구는 6개월간 관계 부서, 유관 기관 협의와 공람 공고, 도시 계획 시설(공원) 조성 계획 수립 등을 거쳐 조합에 인가서를 보냈다. 조합설립 후 4년 만이다. 한강맨션 용도지역은 제3종 일반주거지역으로 건폐율 20.45%, 용적률 255.15%가 적용됐다. 이에 따라 앞으로 지하 3층~지상 35층, 총 1441가구 규모 아파트와 부대복리시설로 새롭게 지어진다. 이 가운데 전용 44~193㎡ 1303가구가 조합원 또는 일반에 분양될 물량이고, 전용 44~59㎡ 138가구는 임대 주택으로 쓰인다. 최고 높이는 106.35m, 총 사업비는 9134억원이다. 정비기반시설로는 도로, 소공원, 공공청사가 있다. 사업시행자가 시설을 조성, 구에 기부채납한다.
다만 조합이 당초 기대했던 ‘50층 재건축’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강맨션은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후 이른바 ‘35층 룰’ 해제 기대감이 커지면서 규제 완화의 첫 수혜지가 될 것으로 관측돼왔다. 조합 관계자는 “향후 서울시의 정책이 바뀔 경우 고층 설계 변경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용산구청 관계자 역시 “높이 기준이 바뀔 경우, 이미 사업시행계획인가가 이뤄진 곳에 대해서도 신청을 통해 변경할 수 있도록 내용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한강맨션은 내년 초 시공사를 선정한 뒤 오는 2023년 관리처분계획인가, 2024년 이주·철거 등을 계획하고 있다.
사업시행계획인가와 함께 시공사 선정 경쟁 또한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이미 재건축조합은 시공사 선정을 위한 기술용역 협력업체 입찰공고를 진행하는 등 시공사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정비사업 강자로 꼽히는 삼성물산과 GS건설의 2파전이 오랜만에 성사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업계 관심이 뜨겁다. 삼성물산은 2015년 입주한 ‘래미안 첼리투스’와 함께 동부이촌동에서 입지를 확고히 한다는 전략이다. GS건설은 한강맨션 바로 옆에 위치한 ‘LG한강자이(2003년 준공)’와 함께 브랜드 타운 조성을 노리고 있다. LG한강자이는 GS건설 전신인 LG건설이 ‘한강외인아파트’를 재건축한 단지다.
▶동부이촌동 한강변 재건축 단지 ‘3인방’
한강맨션·한강삼익·왕궁맨션
한강맨션이 용산구로부터 재건축 사업시행계획인가를 받아내면서 동부이촌동 한강변 재건축 단지 ‘3인방’이 나란히 재건축에 속도를 내는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한강맨션을 시작으로 인근 삼익, 왕궁은 물론 반도아파트 재건축 사업에도 속도가 붙을 가능성을 점치는 것이다. 일대 정비사업이 마무리되면 용산공원 남쪽 한강변에만 총 7000~8000가구 규모의 새 아파트 단지가 조성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한강맨션 바로 옆에 있는 한강삼익은 이미 지난해 6월 사업시행인가를 받았다. 이촌동에서 재건축 추진 단지가 사업시행인가를 받아낸 건 2009년 ‘래미안첼리투스(옛 렉스아파트)’ 이후 11년 만이다. 한강삼익은 올해 관리처분계획인가를 추진하고 내년 철거·주민이주를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다. 1979년에 준공된 한강삼익은 기존 총 252가구로 단지 규모는 다소 작지만 재건축을 통해 최고 30층, 329가구로 거듭날 예정이다. 역시 한강변에 위치한 왕궁맨션도 건축심의를 끝내고 지난해 3월 재건축을 위한 사업시행계획인가를 신청해 기다리고 있다. 왕궁맨션은 일반분양을 통한 수익이 없는 1 대 1 재건축 방식의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전에는 나란히 한강변을 접하고 있는 래미안첼리투스가 이 방식으로 재건축을 진행했다. 동작대교 건너 신동아아파트의 경우 지난해 11월 추진위원회 설립 3년 만에 조합설립인가를 받고 최근 정비계획안을 수립 중이다.
한강맨션 사업시행계획인가 소식에 이촌동 일대 재건축 아파트 매매가격은 한 번 더 들썩였다. 지난 4월 28억원에 거래된 한강맨션 28평형(전용 89㎡)의 현재 호가는 31억원, 지난 1월 30억5000만원에 거래됐던 37평형(전용 120㎡)은 현재 호가가 40억원이다.
이촌동 A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조합원 지위 승계가 가능한 매물들은 사업시행인가를 전후로 호가가 1억~3억원가량 뛰었다”며 “워낙 값이 올라서 당장 거래가 이뤄지고 있지는 않지만,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 래미안첼리투스를 제치고 대장 아파트가 될 것이기 때문에 (가격이) 더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상승 기대감에 매물 자체도 많지 않다. 한강삼익 인근의 B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재건축 단지는 매물 자체가 많지 않다”며 “왕궁은 일대일 재건축이라 그런지 한 건도 물건이 없고, 다른 아파트도 집값이 더 뛸 것이란 예상에 집주인들이 웬만하면 매물을 잡고 있는 상태”라고 귀띔했다. 이촌동 일대 중개업계는 한강맨션 조합원은 재건축을 통해 27평형은 40평형을, 37평형은 52평형 아파트를 분양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한강변 재건축 단지들은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후 언급된 높이 규제 완화를 예의주시하는 모습이다. 서울시의 한강변 아파트 첫 주동 높이 규제 해제 방침에 따라 한강맨션 조합 측은 사업시행계획인가 신청 당시 조감도와 배치도를 구청에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계획안은 한강변 주동은 15층, 다른 동은 최고 35층으로 계획돼 있지만 ‘2040서울플랜’에 따라 설계가 변경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서 최고 56층 래미안첼리투스(옛 이촌 렉스)가 한강 르네상스 규제 완화를 십분 활용해 2015년 입주한 바 있다. 현재 사업시행계획인가를 준비 중인 왕궁맨션은 2040서울플랜을 염두에 두고 진행시기를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부이촌동 소재 건영 한가람아파트
▶리모델링도 활발… 강촌·코오롱 등
조합설립, 잇따라 신고가 경신
이촌로를 사이에 두고 공원 쪽에 위치한 단지들은 리모델링이 활발하다. 2018년 5개 단지를 묶는 통합 리모델링을 추진했다가 무산됐지만 인근에 개발 호재가 잇따르면서 단지별 리모델링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리모델링 사업 속도가 가장 빠른 곳은 지난 6월부터 이주를 시작한 현대맨션이다. 1974년 지어진 이 단지는 2006년 조합을 설립해 용산구 내에서 처음으로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한 단지다. 앞서 롯데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했고 기존 653가구에서 3개 별동을 더 지어 총 750가구 새 아파트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1999년 입주한 이촌코오롱아파트(834가구)도 지난 8월 12일 용산구로부터 리모델링 조합설립인가를 받았으며 곧 시공사 선정 절차에 돌입한다. 앞서 리모델링 조합설립 신청 기준인 주민 동의율 66.7%를 넘어 지난 7월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한 바 있다. 이 아파트는 리모델링을 통해 기존 834가구에서 959가구로 늘어난다.
이 외에도 강촌·건영한가람·한강대우·우성아파트 등이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조합설립 동의서를 징구 중이다. 이들 단지는 앞서 공동 리모델링을 추진했지만, 무산되면서 각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촌동에서는 강촌아파트, 이촌코오롱아파트가 공동리모델링 업무협약을 맺었고 한가람아파트도 리모델링 사업 설명회 개최를 앞두는 등 모두 4000여 가구가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1001가구 규모인 이 강촌아파트는 올해로 준공 22년 차를 맞았다. 재건축도 고려했지만 사업 가능 연한(준공 30년)을 채우지 못한 데다 현재 용적률이 339%로 재건축을 하면 오히려 사업성이 떨어져 리모델링으로 방향을 돌렸다. 강촌아파트는 리모델링 후 113가구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법정 동의율(66.7%)을 넘긴 후 9월 중순 조합설립 총회를 개최하는 등 사업이 순항 중이다. 올 8월 조합설립인가를 받은 이촌코오롱 아파트는 시공사 선정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1999년 입주한 이 단지는 리모델링을 통해 기존 834가구에서 959가구로 늘어난다.
건양한가람(2036가구)의 경우 1998년 입주해 리모델링 연한인 15년을 훌쩍 넘어섰다. 역시 재건축 사업 가능 연한을 못 채운 데다 용적률이 높아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경우다. 어쨌든 새 아파트를 염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덕분에 동의서를 걷기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주민 동의율 60%를 넘겼다. 동부이촌동 리모델링 단지들은 고급화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롯데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한 이촌 현대맨션은 리모델링 사업으로는 최초로 고급 브랜드인 ‘르엘’을 도입했다. 한가람, 이촌코오롱에도 벌써부터 1군 대형 건설사들이 현수막을 내걸고 본격적인 수주전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이 중에는 현대건설의 고급 브랜드인 ‘The H(디에이치)’도 포함돼 있다. 인근 B공인중개사사무소 관계자는 “동부이촌동은 입지가 좋은데도 래미안첼리투스가 입주한 2015년 이후 신규 공급이 없었다”며 “낡은 단지들이 새 아파트로 거듭나면 가치도 더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촌동 리모델링 단지들의 사업에 속도가 붙자 집값도 함께 오르는 모양새다. 건영한가람 전용 114㎡는 지난 8월 28억원에 주인을 찾았다. 저층 매물이긴 하지만 앞서 5월 같은 면적 아파트가 21억5000만원에 거래된 지 석 달 만에 6억5000만원이나 시세가 뛰었다. 같은 아파트 전용 84㎡ 호가는 23억5000만~27억원에 달한다. 지난 10월 11일에는 같은 면적 아파트가 23억8000만원에 실거래됐다.
이촌코오롱 아파트에서는 가장 작은 전용 59㎡ B타입 저층 매물이 17억5000만~18억원에 나와 있다. 단지 내에서 세대 수가 27가구밖에 되지 않은 탓에 매물이 적은 평형이다. 지난해 10월 14억원에 마지막으로 거래된 이후 1년여 만에 호가가 3억5000만~4억원 올랐다. 같은 면적이어도 향이 좋은 전용 59㎡ A타입은 지난 9월 18억원에 매매 계약서를 썼다.
▶남으로는 한강, 북으로는 용산공원 낀
‘전통 부촌’ 재탈환 기대감 후끈
전문가들은 한강을 끼고 있는 강북 노른자위 땅인 동부이촌동에 정비 사업이 원활히 마무리되면 이 일대가 ‘전통 부촌’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동부이촌동이 한강변에 위치한 데다 길 건너 용산 미군기지가 대규모 공원으로 개발될 예정이어서 강북권 최고의 요지로 꼽히는 만큼 가치 상승 여력이 크다는 분석이다.
단지에 따라 도보 거리에 지하철 4호선·경의중앙선 이촌역이 지나는 초역세권이다. 또한 용산역에는 아이파크몰·이마트·CGV 등 각종 쇼핑·문화시설이 모여 있다. 앞 단지 한강맨션을 넘어 한강 조망도 가능하다. 미군기지 이전 부지에 조성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용산공원과도 가깝다. 강남~용산을 잇는 신분당선 연장 사업도 기대감을 높이는 호재다. 김광석 리얼하우스 대표는 “신축 아파트 선호가 높은 상황에서 이촌동 일대 리모델링 사업이나 재건축 사업이 마무리되면 노후했던 동부이촌동 환경도 말끔히 개선될 것이란 기대를 모은다”며 “동부이촌동 일대가 ‘전통 부촌’ 명성을 되찾아올 날이 머지않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