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리모델링에 대한 인식은 ‘재건축을 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해서 하는 정비사업’에 가까웠다. 어차피 헐고 다시 지을 거면 재건축을 하고 싶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정부 규제로 재건축을 둘러싼 사업 환경이 좋지 않아지자 대안으로 리모델링 열풍이 뜨겁게 불고 있다. 서울 강남 일대까지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단지가 속속 나오며 그야말로 유행을 탄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고덕주공이 헐린 자리에 그라시움, 아르테온 등 신축 단지가 속속 들어선 강동구 일대 리모델링 바람이 뜨겁다. 전문가들은 용적률이 높아 사업성이 떨어지는 노후 단지를 중심으로 리모델링 열기가 확산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 9월 리모델링 1차 안전진단을 통과한 ‘고덕아남아파트’가 대표적이다. 1996년 준공된 이 단지는 807가구 규모다. 리모델링을 거치면 지하 6층~지상 23층, 9개 동, 887가구로 변신한다. 이미 시공사도 삼성물산으로 정했다. 새 단지 이름은 ‘래미안 라클레프’가 유력하다.
이 단지는 최근 강동구 시세 리딩 단지로 떠오른 암사동 롯데캐슬퍼스트 아파트와 길 하나를 두고 접하고 있다. 반대편은 고덕래미안힐스테이트가 자리 잡고 있다. 아남아파트와 함께 노후 단지로 꼽혔던 인근 대우아파트는 동부건설을 시공사로 정하고 소규모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아남아파트가 리모델링을 완성할 시점에 이 일대는 신축과 준 신축 아파트가 일렬로 늘어선 주거지역 벨트를 형성하게 된다.
공사비가 많게는 1조원으로 예상되는 강동구 암사동 선사현대아파트는 9월 리모델링 사업 추진을 위한 조합설립을 마쳤다. 이 아파트는 2000년 준공돼 올해로 21년 차를 맞이했다. 용적률이 394%로 높아 재건축은 불가능하다. 꿩 대신 닭으로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 단지는 총 2938가구 규모다. 리모델링을 거치면 가뿐하게 3000가구 이상 초대형 단지로 변신하게 된다.
1기 신도시 내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는 아파트 중에서 사업계획을 승인받은 곳은 한솔마을 5단지가 처음이다. 분당 정자동 한솔마을 5단지.
이 단지 최고 장점은 한강변 아파트라는 점이다. 최근 서울 시내 아파트 시장에서 한강변의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동안 선사현대는 암사동이란 서울 외곽에 접해있다는 이유로 한강변 가치가 평가 절하되어 왔다. 하지만 리모델링을 등에 업고 신축으로 변신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3000가구 대단지 한강변 신축 아파트라는 막강한 프리미엄을 누리게 된다. 건설사들이 잇달아 주민 대상 설명회를 개최하며 공을 들이는 이유다.
단지 공사비만 9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공사가 진행될 시점에는 물가상승분을 반영해 공사비가 1조원을 넘을 거란 전망이 높다. 업계 관계자는 “동작구 흑석동에 들어선 신축 아파트의 경우 한강변 아파트는 매우 높은 프리미엄을 받고 있다”며 “선사현대 역시 리모델링 이후 비슷한 논리에 입각해 집값 상승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덕동에 있는 배재현대 아파트 역시 최근 주민들에게 리모델링 조합설립 동의서를 받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는 1995년 준공한 448가구 아파트다. 고덕래미안힐스테이트 아파트와 지척거리다. 인기 고등학교로 꼽히는 배재고 바로 옆에 있는 입지다.
학부모 선호도가 높은 한영고와 인접한 상일동 명일중앙하이츠도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다. 둔촌주공 재건축 수혜를 볼 것으로 꼽히는 둔촌현대 1·2·3차 리모델링은 이미 궤도에 오른 상황이다. 둔촌현대1차는 포스코건설을 시공사로 두고 최근 착공에 들어갔다. 둔촌현대2차는 지난 5월 리모델링을 건축 심의를 통과했고, 둔촌현대3차는 4월 리모델링 안전진단을 통과했다.
고덕동 일대 재건축 바람을 타고 대대적인 변신을 끝낸 강동구가 이번에는 리모델링을 통해 또 한 번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강남구 일대에서도 리모델링 바람은 거세다. 최근 리모델링 시공사 선정 절차에 들어간 청담신동아아파트가 대표적이다. 청담신동아는 현재 지상 14층, 106가구 규모의 단지다. 리모델링사업을 거치면 121가구 규모로 변신한다. 대치동 현대1차 아파트는 6월 조합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일원동 푸른마을아파트는 6월부터 리모델링 추진위원회를 꾸려 주민 동의율 확보에 본격 나서고 있다.
서초구에선 잠원동 신화아파트와 동아아파트가 조합설립 인가를 받았다. 잠원동 신화아파트는 1997년 준공한 166가구 미니단지다. 2002년 지어진 동아아파트는 991가구로 이뤄졌다.
▶리모델링 바람 분당 찍고 일산으로
서울 바깥에서도 리모델링 바람은 거세다. 가장 리모델링에 적극적인 곳은 분당신도시였다. 대표적으로 정자동 한솔마을 5단지(1156가구), 구미동 무지개마을 4단지(563가구)가 사업 승인을 받은 상황이다. 느티마을 3단지(770가구), 매화마을 1단지(562가구), 매화마을 2단지(1185가구) 등에서도 리모델링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리모델링 열풍이 분당을 찍고 일산으로 확산되는 모양새다. 이는 최근 일산 아파트 시세가 크게 점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 일산은 유독 집값이 오르지 않은 지역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수도권 전반에 아파트 급등세가 번지면서 눌려있던 일산의 아파트 시세가 그야말로 폭발하는 상황이다. 집값이 오르니 리모델링을 추진할 수 있는 사업성이 생겼고, 그동안 잠잠했던 단지들이 ‘물 들어올 때 배 띄운다’는 마음으로 잇달아 리모델링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선두주자는 ‘경기도 리모델링 사업성 검토 컨설팅 시범사업’에 선정된 일산서구 ‘문촌마을 16단지’라 할 만하다. 컨설팅은 리모델링 컨설팅 비용과 계획 설계, 기본 설계, 사업성 분석 등 9개월간 3단계에 걸쳐 꼼꼼하게 이뤄진다. 경기도 리모델링 사업 검토 컨설팅 시범사업 공모에 접수한 111개 단지 중 27개가 고양시에서 나왔을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일산 서구 ‘강선마을 12단지’는 최근 ‘찾아가는 공동주택 리모델링 자문 시범사업’ 대상 단지로 뽑혔다. 인근 구도심인 덕양구 준공 27년 차 ‘별빛마을 8단지’는 리모델링 추진위원회가 정비업체와 설계사 선정에 나섰다. 올해 조합설립을 위한 주민 동의서를 걷고 내년 하반기 시공사 선정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내비치고 있다. 일산 장성마을 2단지 강선마을 14단지 등에서도 리모델링을 추진 중이다. 덕양구 샘터1단지 은빛 11단지 옥빛 16단지 등도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단지다.
하지만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단지 중에 단기간 시세를 올리기 위해 사업을 진행하는 곳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동산 상승기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단지마다 호재거리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리모델링 사업성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상태로 사업 추진 현수막만 걸어놓는 것으로 단지 호가가 올라갈 수 있다. 실제 꼼꼼한 사업성 검토 없이 아파트 시세를 올릴 요량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단지도 적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또 리모델링 사업성을 좌지우지하는 수직증축이 쉽지 않은 것도 감안해야 한다. 수직증축을 진행하면 세대수를 훨씬 더 많이 늘릴 수 있어 가구별로 내야 할 추가분담금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구조안정성을 고려해 허가가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또 주민 내부에서 리모델링과 재건축을 지지하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리모델링 사업이 순항해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리모델링 추진을 접고 재건축을 하자는 의견은 나오기 힘들다. 하지만 리모델링 추진이 초기 단계라면 얼마든지 주민 사이에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리모델링 추진위원회와 재건축 준비위원회가 동시에 활동 중인 강남구 수서동 까치마을이 대표적이다. 이 단지는 1993년 준공돼 총 1404가구 규모다. 인근 수서역 환승센터 복합개발 호재로 단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수서역세권개발이 진행되면 수서역 일대는 강남 외곽이라는 인식을 벗어던지고 단숨에 인근 개포동 못지않은 핵심지로 거듭날 수 있다.
이 단지는 지난해 리모델링 추진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동의율이 절반을 넘겼다. 그런데 최근 들어 리모델링 말고 재건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모델링을 지지했던 일부 주민이 재건축으로 선회하면서 적잖은 갈등이 있다는 후문이다.
1758가구 규모 강남구 개포동 대치2단지는 리모델링 조합을 설립하고 건축심의까지 통과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주민들은 재건축을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인근에 있는 822가구 규모 대청아파트 역시 리모델링 사업을 진행하다가 주민갈등으로 속도가 나지 않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수년 사이에 강남 집값이 급등하면서 리모델링보다 재건축을 했을 때 시세차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런 갈등은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어 의견을 조율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아파트 중 가장 규모가 큰 개포동 대치2단지 전경.
리모델링과 재건축은 장단점이 명확하다. 손쉽게 추진할 수 있는 것은 리모델링 쪽이다. 아파트를 헐고 재건축하려면 준공 후 30년이 지나야 한다. 안전진단에서 D등급 이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안전진단에서 고배를 드는 아파트가 속속 나오고 있다. 안전진단 1차를 통과하더라도 특히 2차에서 발목이 많이 잡힌다. 정부가 2차 안전진단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안전진단이 통과될 경우 아파트 시세가 올라가고 인근 아파트 시세 역시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어 정부 입장에서는 속도조절을 해야 할 압박을 느낄 수 있다. 한 번 안전진단에서 물을 먹으면 언제 다시 통과될지 기약할 수 없어 사업 추진이 늘어진다.
반면 리모델링은 준공 15년 차부터 안전진단 C등급 이상이면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조합설립을 위한 동의율도 재건축은 주민 4분의 3(75%)이지만 리모델링은 3분의 2(66.7%) 이상이면 된다.
재건축은 안전진단 이후에도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인가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 규정에 걸려 10년 보유, 5년 실거주한 매물이 아니면 아파트를 쉽게 팔 수도 없다.
무엇보다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재초환)가 문제다. 재초환은 재건축 사업에서 조합이 일정 수준 이상의 이익을 볼 경우 이익의 일부를 정부가 가져가는 제도다. 강남권 일대에서는 조합원마다 수억원의 재초환을 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재초환은 조합에 일괄 부과되는 것이라 추후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전망이다. 예를 들어 특정 단지 재초환 총액이 1000억원인데 조합원이 200명이라면 조합이 200명의 조합원이 얼마씩 돈을 내야할지를 알아서 정하는 구조다.
그런데 아파트를 산 시기와 금액은 전부 다르기 때문에 조합이 합리적으로 조합원의 비용을 배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전국 50여 개 재건축조합이 ‘전국재건축정비사업조합연대’를 결성하고 공동 대응에 나선 이유다. 중장기 재초환 때문에 싸우는 단지가 늘어나면 이를 본 노후 단지들이 재건축 사업 진행을 꺼리게 될 수 있다.
다만 용적률이 높은 단지는 재건축은 아예 옵션에 넣을 수 없다. 무조건 리모델링을 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용적률이 300%를 넘는 아파트를 재건축하는 것은 불가하다. 재건축 이후 지금 허용된 용적률보다 수치가 오히려 내려갈 수 있다. 재건축 이후 가구 수가 기존보다 내려갈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용적률이 통상 200% 밑이라면 재건축 가능성이 있다. 압구정이나 반포처럼 땅값이 아주 비싸다면 200%를 일부 웃도는 용적률로도 재건축을 추진할 수 있다.
한국리모델링협회에 따르면 8월 기준 전국에서 리모델링 조합설립을 마친 아파트는 총 85개 단지(6만4340가구)에 달한다. 지난해 12월 54개 단지(4만551가구)였던 것과 비교해 8개월 만에 60%가량 늘어난 수치다. 조합설립 전 단계인 추진위원회 설립 후 사업을 추진 중인 단지까지 포함하면 규모는 훨씬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 규모 2030년엔 44조원으로 성장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국내 리모델링 시장 규모가 지난해 17조3000억원에서 2025년에는 37조원, 2030년에는 44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리모델링은 한계도 있다. 안전의 문제로 내력벽을 활용하기 때문에 내부 구조 설계에 한계가 있다. 자칫 기존의 2베이에서 앞뒤로 늘어나는 구조를 가져 집 모양이 동굴처럼 될 수도 있다.
수평증축은 전용면적의 최대 30% 이내(85㎡ 미만 40%)만 늘릴 수 있다. 수직증축은 15층 이상이면 최대 3개 층까지 증축할 수 있고 세대수는 기존 가구 대비 15%까지 늘릴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면 재건축이 리모델링보다 설계의 용이성, 사업의 확장성, 수익 증가 측면에서 우월한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재건축 추진이 어려워진 일선 단지에서 리모델링에 대한 관심은 여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