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츠로셀은 화재로 공장을 잃었다. 그러나 공장은 새로 지으면 됐다. 어쩌면 공장보다 되찾기 어려운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품질이었다. 고객의 신뢰라는 것이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장 대표였다. 그리고 배터리 품질의 본질은 다름 아닌 안전성과 균일성이었다.
왜 이 회사에서 고객의 신뢰가 그토록 중요했을까. 리튬 일차전지라는 시장의 특성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된다.
“시장 규모로 보면 리튬이차전지가 훨씬 큽니다. 그런데 이 이차전지 시장은 대기업들이 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삼성, LG, SK 등이 있지 않습니까. 비츠로셀 같은 중소·중견기업은 이차전지 쪽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일차전지가 작은 시장은 아닙니다. 전 세계에 내로라하는 선별된 전지기업들이 과점하는 시장입니다. 진입장벽이 높은데 일단 발을 들여놓고 인정만 받으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시장입니다.
이 시장에서 비츠로셀이 다루는 분야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스마트미터 시장. 수도, 전기, 가스계측기 시장이다. 여기는 수명이 최대 20년 이상 요구된다. 조건은 마이너스 40℃에서 85℃ 정도. 계측기가 실외에 설치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석유 시추 분야. 여기는 180℃까지 견뎌야 하는 극한 상황이다. 시추를 하려면 약 3km를 파고 들어가고 수평 이동까지 한다. 만약 배터리로 인해 장비가 멈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세 번째로 커지는 시장이 방산. 유도무기 같은 건 배터리가 없으면 그냥 고철 덩어리다. 여기는 마이너스 32℃ 정도까지 견뎌야 한다.
일단 스마트미터 시장. 장 대표가 좀 쉽게 설명한다.
“미국 어느 도시를 가든 보도블록 아래에 비츠로셀의 배터리가 하나씩은 묻혀 있다고 보면 됩니다. 한번 땅 속에 들어간 수도계량기를 꺼내 배터리를 바꿀 일도 거의 없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땅속과 겨울의 추위를 오가면서도 10년, 15년, 경우에 따라 20년 가까이 묵묵히 전기를 공급해야 합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예를들어 100만 개가 장착됐는데 만약에 서부에서 10개가 문제가 되면 그 100만 개 다 의심하게 됩니다. 100만 개를 만들면 100만 개가 다 양품이거나 다 불량품이어야 합니다. 일부 불량은 최악입니다. 이게 균일성입니다. 품질에 엄격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는 화재가 오히려 기회라고 봤다.
“우리가 이런 난리통에도 과거와 같은, 어쩌면 과거보다 더 품질이 좋은 제품을 납품할 수 있다면 확실한 세계 1등 기업으로 도약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앞으로 세상이 변해 새로운 제품에 대한 니즈가 생길 터인데 그럴 때 시장을 뚫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장 대표는 그런 품질경영에 대한 철학을 공장에 이식했다. 2017년 화재 이후 다시 지은 당진 스마트캠퍼스는 생산공정의 자동화 수준을 높이고 상당수 검사 공정을 전수검사 방식으로 전환했다. 사람의 숙련도에 따라 제품 편차가 생기는 것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다.
여기에 비츠로셀 기술 진화의 첫 번째 실마리가 있다. 주력인 리튬염화티오닐전지(Li-SOCl₂)는 오래 버티는 데 강하다. 특히 보빈형(Bobbin Type)은 자기방전이 적어 스마트 수도·가스계량기처럼 장기간 전원 교체가 어려운 장비에 적합하다. 그러나 오래 달리는 것과 순간적으로 큰 힘을 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계량기가 데이터를 무선으로 전송하는 찰나에는 평소보다 강한 전류가 필요하다.
비츠로셀은 여기에 전기이중층커패시터(EDLC·Electric Double Layer Capacitor)를 붙였다. 장 대표는 리튬일차전지가 ‘마라톤 선수’라면 EDLC는 몇 초간 폭발적으로 뛰는 ‘100m 단거리 선수’라고 비유한다. 한쪽은 장기간 전력을 공급하고, 다른 한쪽은 통신 순간의 출력을 거든다. 비츠로셀은 초창기 EDLC를 외부에서 조달했다. 그러나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배터리가 원인인지 커패시터가 원인인지 따져야 했다. 납기와 품질도 외부 업체의 사정에 영향을 받았다. 결국 기술 인력을 데려오고 연구·생산설비를 갖춰 안으로 끌어들였다.
작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회사의 성격이 달라졌다. 배터리셀을 잘 만드는 회사에서 고객 장비에 필요한 전원을 함께 설계하는 회사로 진일보한 것이다.
스마트미터가 시간을 견뎌야 한다면 석유·가스 시추는 ‘극한 상황’을 버텨야 한다. 시추 장비는 땅속을 파고 내려가면서 고온과 고압, 충격과 진동을 견뎌야 한다. 당연히 배터리도 함께 내려가면서 고난을 같이 한다.
비츠로셀의 고온전지(High Temperature Battery)는 최대 180℃급 환경을 겨냥한다. 일반 소비자가 배터리 가격 몇 천원을 따진다면 이 시장의 계산법은 전혀 다르다. 땅속 깊은 곳에서 전원이 멈추면 배터리 하나를 바꾸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시추 장비와 작업 전체가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장 대표는 “배터리는 사람으로 치면 심장에 해당한다”라며 “배터리 때문에 장비가 멈추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신뢰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이 시장에 들어오면서 비츠로셀은 중요한 경영 전략 하나를 터득했다. 제품이 극한 환경에서 작동한다면 영업도 현장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
미국 휴스턴에 있는 비츠로셀 USA를 두고 장 대표는 “여기 나가 있는 게 그냥 판매 목적이 아니다”라면서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현지 인력이 대응하고, 필요하면 한국의 엔지니어가 날아간다”라고 설명한다. 단순히 셀을 납품한 뒤 다음 주문을 기다리는 영업과는 결이 다르다.
2017년 화재 뒤 1년이라는 복구 시한을 스스로 정하고 세계 고객에게 적어도 두 달에 한 번 진행 상황을 알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공장은 새로 지을 수 있지만 한 번 다른 제품으로 설계를 변경한 고객을 다시 데려오는 데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고객들과 오랜 시간을 두고 쌓아온 신뢰 관계는 어느 순간 사업 확장으로 돌아왔다.
비츠로셀은 2025년 캐나다의 이노바파워솔루션(Innova Power Solutions)을 336억원에 인수했다. 이노바는 석유·가스 시추 장비용 고온 배터리팩과 모니터링 시스템에 강점을 가진 업체다. 비츠로셀이 강했던 것이 셀과 글로벌 대형 고객이라면 이노바는 배터리 팩과 중소·중견 고객망을 갖고 있었다. 비츠로셀은 오랫동안 셀을 공급해 온 고객이자 파트너를 인수함으로써 셀에서 팩, 다시 전력 관리와 모니터링 영역으로 올라섰다.
장 대표는 “이노바 창업주와는 15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면서 “매물을 찾아 기업을 산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기술과 사람을 지켜본 거래 상대가 어느 순간 한 회사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화재 때 비츠로셀을 살렸던 ‘고객과의 신뢰’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새로운 기술을 품는 통로가 된 셈이다.
비츠로셀이 만드는 제품을 한 줄에 놓아보면 다소 기묘한 풍경이 펼쳐진다. 수도계량기, 석유 시추 장비, 군용 무전기와 포탄 신관, 유도무기, 자폭드론, 그리고 이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까지 등장한다. 서로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나 한 꺼풀 벗기면 같은 질문이 숨어 있다. ‘전기가 필요한 바로 그 순간, 전원을 보호할 수 있는가?’
수도계량기에서는 그 순간이 20년 뒤일 수 있다. 석유 시추 장비에서는 지하 3㎞의 180℃ 환경일 수 있다. 유도무기에서는 포탄이 발사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방산용 앰플전지와 열전지가 성장한 것도 같은 이유다. 최근에는 기존 리튬망간전지 기술을 활용해 불화탄소(CFx)와 이산화망간(MnO₂)을 결합한 리튬·불화탄소-이산화망간(Li/CFx-MnO₂) 계열 자폭드론용 전지도 개발하고 있다. 작은 전지 하나의 실패가 무기체계 전체의 실패가 되는 시장이다
그리고 이 근본 질문은 이제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등장하는데 그게 AI 데이터센터다.
AI가 화면에서 답을 만들어 내는 데는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몇 초 뒤에서 수천, 수만 개의 그래픽 처리 장치(GPU)가 한꺼번에 연산을 시작하면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순식간에 출렁인다. 비츠로셀이 주목한 것은 그 거대한 전력 흐름 속의 아주 짧은 순간이다. GPU 부하가 갑자기 치솟을 때 전력 변동을 완충하는 커패시터 뱅크 유닛(CBU·Capacitor Bank Unit)에 비츠로셀 하이브리드 커패시터(VHC·Vitzro Hybrid Capacitor)와 리튬이온커패시터(LIC·Lithium Ion Capacitor)를 적용하는 구상이다. 흥미로운 점은 VHC가 AI 시대를 맞아 갑자기 꺼내 든 기술이 아니라는 데 있다. 비츠로셀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소형 VHC를 만들어 왔다.
장 대표는 “6~7년 동안 양산을 했다”라며 “이걸 사이즈를 키워서 AI 데이터센터용으로 준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존에 보유했던 기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시장을 만난 것이다. 물론 아직은 미완의 영역이다. 고객이 요구하는 출력과 온도, 수명에 맞춘 샘플이 실제 데이터센터 전력장치에 채택되고 대량 주문으로 연결돼야 비로소 새로운 캐시카우가 된다.
장 대표는 회사의 미래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3대 전방 산업에서 초격차 기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는 중입니다. 작년 매출을 보면 스마트그리드가 51%, 방산이 22%, 석유·가스가 21%를 차지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캐시카우인데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되지요. 이를 수익 창출원으로 해서 지속 성장을 위한 신규 사업 모델에 적극 투자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확실하게 열리기 전에 준비된 자로서 커다란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그려놓은 지도의 바깥쪽에는 AI 데이터센터뿐 아니라 리튬 포일, 리튬 잉곳, 실리콘 음극재, 리튬 재활용, 직접 리튬 추출(DLE·Direct Lithium Extraction), 우주항공용 특수 이차전지 팩까지 등장한다. 2030년에는 매출 6000억원, 영업이익 1600억원을 목표로 잡고 있다. 이 많은 신사업들이 성공할 것인가를 지금 예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AI 데이터센터용 VHC와 LIC도 아직 그 가능성을 검증받는 과정에 있다. 리튬 포일과 실리콘 음극재 같은 소재 사업 역시 사업화까지 넘어야 할 문턱이 적지 않다. 새로운 시장에 진입한다고 해서 기존 경쟁력이 그대로 통한다는 보장도 없다. 비츠로셀이 앞으로도 자신이 잘하는 방식으로 새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화재가 난 공장에서 차로 5분 정도 되는 거리에 추사고택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대표적인 서예가추사 김정희가 태어난 곳이다. 2017년 화재 복구 당시 장 대표는 이곳에 있는 추사기념관을 거의 매일 찾았다. 그의 발길을 오래 붙잡은 작품이 하나 있었다. <세한도(歲寒圖)>였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논어의 구절을 담아그린 작품이다.
2017년 4월 21일의 화재가 장 대표에게는 바로 ‘세한(歲寒)’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한 혹독한 시절. 그런데 막상 그 겨울을 맞고 보니 끝까지 푸르름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첫째가 직원이었고, 둘째가 고객이었다. 장 대표는 지금도 <세한도>를 볼 때면 그때 생각에 눈물이 난다고 한다.
얼마 전 새로 마련된 기념관 옆에는 백송(白松) 한 그루가 서 있다. 추사가 24세 때 연경, 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오며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수령 200년이 넘고 높이가 10m에 이르는 이 백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백송은 처음부터 하얗지 않다. 어린 나무의 껍질은 담회색이다. 40년쯤 자라면 묵은 껍질이 조각조각 벗겨져 나가고서야 비로소 백송 특유의 흰빛을 드러낸다.
비츠로셀은 내년이면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이제 또 한 번 오래된 껍질을 벗으려 한다. 백송이 그러하듯이.
[손현덕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