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우라도 납기는 지킨다는 김 회장의 신념은 그 후 6년 뒤 일어난 소위 ‘전세기’ 사건으로 다시 한번 전직원의 뇌리에 각인된다.
2002년 가을, 미국 LA 롱비치 항만에서 대형 노사분쟁이 발생한다. 항만노조와 선사 하역업체 대표와의 단체교섭이 결렬되면서 파업이 벌어진 것이다. 해외에서 물건을 실은 컨테이너선이 항만에 들어왔는데 항만 근로자들이 짐을 내리지 않아 목적지까지 배달이 안 되고 있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국가안보와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며 ‘긴급사태’를 선언하고 조속한 업무 재개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당시 CNN 보도에 따르면 미국 경제에 하루 약 20억달러 이상의 손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됐다. 롱비치 항만은 주로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품이 하역되는 곳. 세아의 제품도 여기에 발이 묶여 있었다. 2, 3차분을 계속 배에 실어보내도 물건은 그냥 배 안에서 대기 중일 게 뻔했다.
사실 물건이 주문처에 도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아가 책임질 일은 없었다. 소위 본선인도 조건(FOB; Free on Board)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수출업자인 세아는 물품을 지정된 선적항까지 운송하고 선박에 실을 때까지의 비용과 위험만 책임지고, 그 이후부터는 수입자가 모든 부담을 떠안게 된다. 요컨대 배에 실어주기만 하면 끝이다.
그러나 김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이럴 때 우리가 물건을 제때 배달해 준다면 신뢰를 확실히 쌓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올드 네이비(Old Navy), 갭(Gap) 같은 중요한 고객이었다. 이들과 장기 거래관계를 맺는다면 어느 정도의 손실은 감수할 만했다. 그리고 사이판의 성과를 전 세계에 알릴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대한항공 측에 연락했다. 화물기 한 대를 전세 내 LA로 가자고 했다. 비용은 억대였지만 10만 장 정도의 옷을 실을 수 있었다.
제품 오더는 추수감사절에서 시작해 연말까지 대대적인 판매를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만약 타이밍을 놓친다면 그 옷들은 대부분 재고로 쌓일 게 뻔했다. 어어쩌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팔릴지 모른다. 김 회장은 “우리가 시즌에 맞춰 옷을 공급해 준다면 수입업자들로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냐”며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당연히 할 일이었다”고 말한다. 공항에 도착한 옷은 48시간 내로 수입처로 배달됐다.
“바이어들은 세아의 이런 결정에 상당히 감동했습니다. 선박에 선적만 하면 우리의 책임은 없었지만 수입업자들의 손실이 뻔한데 우리만 돈 벌자는 게 양심에 걸렸습니다. 바이어들이 세아의 제품을 신뢰하게 됐고 사이판 생산을 원하는 바이어도 많아졌습니다. 우리가 사이판에 공장을 세울 때만 해도 많은 업체들이 빠져나갈 궁리를 했었는데 거꾸로 약 10여 개 회사들이 사이판에 공장을 새로 설립했습니다. 세아가 사이판 경제를 바꿔놓은 것입니다.”
세아가 사이판에 공장을 짓겠다고 마음먹을 무렵, 김 회장은 사이판에 있는 여러 공장을 둘러봤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인수할 의향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스마트 셔츠’라는 공장이었다. 그는 직원 한 명과 함께 매물로 나온 이 공장을 둘러보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공장에서 안내를 맡은 사람이 세아 측 인사를 맞았다. 그가 원인향 씨라는 분이었다. 나중 세아에 입사해 아이티법인 지원 총괄을 맡은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제가 근무하던 사이판 공장에 1995년 여름 신사 두 분이 오셔서 안내를 맡게 됐습니다. 키가 조금 큰 분이 사장님이고 작은 분이 같이 온 직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작은 분이 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지금의 김웅기 회장님이었던 거지요. 그렇게 만나게 돼 공장 소개를 하고 협의도 잘 돼 제가 다니던 ‘스마트 셔츠’를 인수하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런데 며칠 시간이 흘렀는데도 계약금을 넣지 않다가 결국 인수를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직원 보너스 때문이었다. 조금 있으면 추석인데 세아 직원들에게 줄 보너스를 감안하면 회사 인수 자금을 지불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공장 인수냐, 직원 보너스냐 이 둘을 놓고 김 회장은 직원 보너스를 선택했다.
“만약 회장님께서 당시 그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면 아마도 세아는 지금보다 더 크고 더 빠르게 성장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이판에서 제법 큰 공장이었고 와이셔츠, 니트, 스웨터 등 3개 생산라인을 갖추고 1000명 이상 거주 가능한 기숙사까지 완비한 건실한 회사였거든요. 김 회장이 탐낼 만한 회사였습니다.”
원 씨는 “회사의 큰 계약보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의 보너스에 신경 쓰는 회장님의 결정이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게 됐다”며 “그게 제가 세아로 회사를 옮기게 된 결정적 계기고, 제 인생에 가장 잘한 선택이 바로 세아 입사”라고 떳떳하게 말한다.
1995년 7월 세아상역이 자본금 100%를 출자해 만든 사이판 위너스 공장. 그러나 공장을 운영한 지 12년 7개월이 지난 2008년 2월 5일 김 회장은 눈물겨운 결단을 내린다. 공장 폐업이었다. 투자한 지도 오래되지 않은 공장, 그리고 오늘의 세아를 만든 시발점이 되는 장소였다. 김 회장 스스로 ‘제2의 창업’이라며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했다. 전 직원을 가족처럼 대했던 회사였기에 문을 닫는다는 건 주위 사람들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기업가는 어떤 경우에도 감정에 휘둘릴 수는 없다. 김 회장은 냉정했다. 이유는 인건비였다.
“사이판은 미국령이어서 미국 정부가 매년 최저임금을 인상합니다. 아무리 무관세 혜택이 있어도 2008년에 인상된 최저임금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이 없었습니다. 시작할 때는 3.35달러였는데 문 닫을 때가 돼서는 5.5달러로 상승한 것입니다. 쿼터도 2005년에 없어졌습니다. 10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직장을 잃고 떠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5~6차례 나누어 단계적으로 철수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식당에서 떠나는 직원들과 회식을 했는데 아쉬움에 눈물 흘리는 직원들이 많아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다들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후일 어떤 직원들은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베트남 공장의 생산 관리자로 채용하여 재회하기도 했습니다. 20년 정도 전 일입니다만 아직까지 몇몇 열심히 일한 근로자들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애정이 많았던 직원들입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