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명화극장]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특별한 가족인 척, 사실은 지지고 볶는 우리 모두의 가족 스토리
김유진 기자
입력 : 2019.12.27 15:20:59
수정 : 2019.12.31 09:24:20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그의 전작 영화들이 그렇듯이 표면적으로는 가족에 대한 얘기를 담은 작품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의 영화 중에 가족을 가장 전면에 내세운 작품처럼 느껴진다. 칸 영화제에서 고레에다에게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어느 가족>은 어떻게 보면 유사(類似) 가족 얘기다. 영화 속 할머니, 아빠, 엄마, 이모, 아들, 딸 모두가 사실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 나오는 중심인물들은 혈연관계로 묶여 있다. 보통의 모든 가족들이 그런 것처럼.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 ‘부재(不在) 가족’의 얘기다. 장남 아키라와 그의 동생 3명에게는 아빠가 없어진 지 오래다. 엄마도 금방 돌아오겠다는 쪽지만 남긴 채 이들을 버린다. ‘(엄마 아빠가 존재해야 할)가족’을 잃은 12살의 장남은 ‘(부모가 부재하는)가족’을 위해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가 않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 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 등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진짜 가족은 무엇인지, 진짜 가족 관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감성을 토대로 구축되어야 하는 것인 지를 갈파한다. 현대사회에서 가족은 가장 부담스럽고 쓸데없는 존재들인 양 사실은 그 관계 안의 진실과 거짓, 혹은 의도된 거짓을 잘 구분해내면 꽤나 유의미한 삶의 양식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갖고 있는 가족觀, 가족을 생각하고 그것을 그리는 예술觀의 총합과도 같은 영화다. 가족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했다는 느낌을 준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이야기는 두 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제는 잊혀져 가는 전설의 배우 파비안느(카트린느 드 뇌브)와 그의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다. 영화의 시작은 고리타분한 척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사실은 내심 꽤나 즐기고 있는 것이 명백한, 파비안느의 기자 인터뷰로 시작한다. 영화광 출신으로 보이는 기자는 오래전부터 파이안느의 덕후다. 그는 그녀의 작품 중 안 본 것이 없으며 따라서 인터뷰는 날카로운 질문 따위보다는 찬사와 약간의 아부가 곁들여져 있다. 게다가 이 인터뷰는 파비안느의 자서전 출간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자서전은 말이 책이지, 사실은 온통 자기 자랑과 변명, 공치사, 선택적인 기억으로 채색된 허구의 이야기로 가득한 것에 불과하다.
때마침 딸 뤼미르 내외가 파비안느의 집에 들이닥친다. 뤼미르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면서 미국인 남자 사이에 낳은 딸아이를 키우고 산다. 남편 행크(에단 호크)는 엄마 파비안느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인지도가 있는 2류 배우이다. 뤼미르가 엄마 파비안느 집에 온 것도 그녀의 자서전 때문이다.
영화는 두 모녀 사이에 암처럼 퍼져 있는 감정의 앙금, 그것 때문에 빈번하게 벌어지는 갈등과 번민을 연속해서 보여주며 진행된다. 그 모든 일은 파비안느의 오만과 편견, 쉽게 말해서 거짓 때문이다. 그녀는 거짓투성이의 삶을 살아 왔다. 도통 자신의 속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게 영화배우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여러 가지의 얼굴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 역시 여러 가지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파비안느는 배우라는 미명 하에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오로지 자기애(自己愛)만으로 살아가는 여성이다. 자서전 초판을 5만 부 찍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뤼미르를 보자마자 “글쎄 초판을 10만 부나 찍는다지 뭐니”하는 식으로 뻥을 치는 여자다. 5만 권이나 10만 권이나 대단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 늘 일말의 사실은 있다. 자기만의 해석으로 가득한 사실. 그래서 진실일 수도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대부분은 진실이 아니지만 거기에 담긴 부분적 사실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고 얘기하기도 뭣하다. 자서전 내용도 죄 거짓과 은폐 투성이다. 파비안느는, 십수년 동안 자신의 손발 노릇을 해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매니저 뤼크(알랭 리볼트)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뤼크는 그 점에 깊이 실망하며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다. 오로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며 자신만이 제일 중요하다. 딸 뤼미르는 그런 그녀가 혐오스럽다. 넌덜머리가 날 만큼 짜증이 난다. 뤼미르는 엄마 파비안느가 자신을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한 적이 있는지, 애틋한 모성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굳이 자신만이 아니더라도 엄마 파비안느는 다른 사람들 역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고 뤼미르는 생각한다. 둘의 관계는 점점 더 파국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뤼미르의 이 모든 생각, 의심, 행동 역시 엄마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그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어린 딸의 마음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파비안느가 지닌 여러 개의 얼굴, 여러 면의 진실만큼 뤼미르의 진실 역시 복잡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얘기다. 그건 매니저 뤼크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뤼미르는 뤼크에게 다시 엄마에게 돌아와 달라고 얘기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사실은 돌아올 생각으로 떠난 거죠?” 그렇다면 뤼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있어 진실한 관계는, 그래서 이른바 가족이라는 틀로 묶이는(혈연으로든 아니면 유사한 무엇으로든) 관계는, 인간의 삶이 늘 진짜와 가짜의 애매모호한 경계를 오가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완벽한 진실은 없다. 진실은 각자의 해석이다.
그건 영화 속에서 파비안느가 찍고 있는 ‘영화 속 영화’의 촬영 장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영화 속 영화’에서 파비안느는 70대가 된 딸 역으로 나온다. 상대역 배우는 우주 공간을 오가면서 7년마다 지구로 오기 때문에 극중에서 엄마지만 여전히 30대의 외모를 지니고 있다. 어릴 때부터 늘 자신을 떠나 우주로 날아가는 엄마에 대한 갈증 때문에 ‘영화 속 영화’의 늙은 딸은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그건 파비안느가 실제 생활에서 딸 뤼미르에게 감정이입해 흘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파비안느의 ‘눈물=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단순하게 연기뿐인 것인가. 아니면 딸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흘리는 것인가. 파비안느에게도 모성애가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촬영이 끝나고 평소처럼 다시 스노비시(Snobbish)한 태도로 돌아온 파비안느를 보고 있으면 무엇이 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건 영화 자체에도 적용할 수 있는 얘기다. 영화는 어떤 면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얼굴의 모양새가 달라진다. 때론 완전히 정반대의 해석을 하게도 만든다. 오히려 영화의 가치는 다중(多重)적이고 중층(重層)적인 의미를 비교적 균형 있게 내포하고 있을 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딸 뤼미르는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 끝에 누군가에게(엄마의 경쟁 상대 배우로 그녀는 바다에서 익사했다.) 떠나보냈다고 생각하고, 파비안느는 딸을 그 누군가에게 뺏겼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 고백도 영화 대사를 읊듯 어디선가 미리 써와서 외운 것처럼 얘기해서 그것 역시 진실인지 아닌지를 헷갈리게 한다. 진실의 여러 얼굴. 그중에서 하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부의 얼굴을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얘기로 보인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프랑스의 전설적인 두 배우 카트린느 드 뇌브와 줄리엣 비노쉬, 미국의 유명스타 에단 호크가 결합돼 있다. 영화는 아시아적이지도, 유럽적이지도, 미국적이지도 않다. 보통의 가족 얘기인 척 아주 특별한 얘기를 하고 있으며 특별한 가족의 얘기인 척, 사실은 지지고 볶는 우리 모두의 가족 얘기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진실과 허구가 마구 뒤섞여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살짝 헷갈리기도 한다. 영화가 매우 ‘영화적’이라는 얘기다. 영화는 ‘영화적’이어야 하다.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