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좋아하던 핑클을 보며 한 주를 마감하다니. 이거 참 별일이지. 대학 다닐 때 좀 좋아했었냐고. 일요일 밤에 캔 맥주 하나 손에 들고 TV 앞에 앉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니까.”
쪼로로 투명한 잔에 이슬 한 방울 가득 따르던 친구 입에서 오랜만에 TV 예능프로그램 찬가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 참, 효리 언니 한 번 보겠다고 궁리하다 실패했던 거 생각나? 그 핑클이 캠핑을 떠났는데 희로애락까지 구구절절이라니까.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도 그런 고민이 있었구나, 생각하면 나도 헛산 거 같지 않아서 나름 위안도 되고 아주 쬐끔 네 생각도 나고.”
무려 20여 년 전 핑클에 푹 빠져 밤낮 흥얼거리고 다니던 그에게 4명의 멤버는 그 시절, 그러니까 그의 20대 시절의 상징이자 로망이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하다못해 술 먹고 꽐라가 됐을 때도 입에 올린 이름은 오직 핑클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10분쯤 침 튀며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던 그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막장 드라마 반전이 이런 거였나 싶을 만큼.
“그런데 그 기다림과 설렘, 시작과 함께 느껴지는 행복이 다음 회 예고편이 나갈 때 즈음 싹 사라진다. 아예 그런 게 있었나 싶을 때도 있어. 이렇게 이번 주도 끝이구나. 아… 이제 7시간 후면 출근해야 한단 말인가. 이 생각이 바로 이어져. 맥주 한 캔 더 땄다가 숙취라도 올까봐 바라보기만 한다니까. 채플린이 그랬다며.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내가 그 시간에 맥주 캔 보면서 그 생각을 한다. 아, 땄을 땐 희극이지만 바라만볼 땐 비극이구나.”
대학 졸업하고 줄곧 월급쟁이라 불렸으니 20년 가깝게 남의 돈에 울고 웃었다며 한참 부연이 이어졌다. 그러다 대뜸 “넌 어떠냐?”는 질문에 한 잔 톡 털어 넣고 또 다시 쪼로로. 달빛이 하얀 밤, 하늘엔 별 대신 가로등이 반짝, 투명한 잔엔 이슬이 방울방울, 잔디마냥 가지런히 늘어선 녹색 병은, 하염없다.
“Call me call me call call give a call”을 외치며 헤어진 후 돌아오는 길에 몇 해 전 인터뷰한, 지금은 문화심리학자로 불리는 김정운 당시 교수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느리게 걷고, 천천히 말하며, 기분 좋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거예요. 행복은 추상적 사유를 통한 자기 설득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이기 때문이죠.”
걷기 위한 여행은 그렇게 쪼로로, 톡, 반짝 힘내며 시작됐다. 친구 말을 빌자면 입에 풀칠하는 생활이 외롭거나 지겨울 땐 훌쩍 떠나 힐링하고 돌아올 필요가 있다.
▶모세의 기적, 그리고 길을 여는 사람들
늦여름 폭염에 차창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끝에 물방울이 송글 맺혔다. 창밖 기온은 무려 40℃. 이런 시기엔 강바람이 생명수요, 바닷바람이 오아시스다. 강과 바다를 지척에 두고 걷는 길은 기적처럼 경쾌하고 때로 경이롭다. 서울 도심에서 두어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앞바다에 자리한 제부도. 318번 지방도로가 끝나는 서신면 송교리 감뿌리에서 멀리 바라보면 끊어진 도로가 제부도로 이어진다. 없던 길이 실재하니 이 또한 기적이다. 하루에 두 번 썰물 때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면 포장도로가 싸악 드러난다. 총 2.3㎞ 길이의 갯벌을 가르면 그 위로 차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길 바깥의 갯벌은 광활하다. 목적지는 제부도 선착장. 이곳부터 시작되는 산책로가 해안누리길의 들머리다.
선착장에 차를 주차하고 밖으로 나서니 눈앞에 붉은 색 등대가 한가롭다. 제부항 방파제 등대인데, 나무 데크로 이어진 제부항 바다낚시터와 이어지며 제부도하면 떠오르는 상징이 됐다. 평일 낮인데도 커플들의 모습이 꾸준한 걸 보면 영락없는 데이트 코스다. 등대 옆으론 한 무더기의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표정이 심각하다. 슬쩍 바다에 드리운 통발을 확인해보니 이게 웬걸, 퍼덕이는 물고기가 꽤 실하다. 봄이면 숭어가 많이 잡히는 전국의 낚시 명소 중 하나다.
땅 위엔 잠자리, 하늘 아래엔 갈매기, 바다 위엔 왜가리가 한가로운 항을 뒤로 하고 산책로에 들어섰다. 바다 위에 다리를 놓듯 길을 만들고 데크로 마무리한 이곳은 바닷바람이 기막히다. 해안선을 따라 7~8m 높이의 철제 기둥 위에 길이 놓여 밀물 때도 별다른 염려 없이 걸을 수 있다. 중간 중간에 해변으로 내려서는 계단까지 마련돼 있는데, 아래로 내려가면 바위 사이에 숨 쉬고 있는 갖가지 조개류도 볼 수 있다.
831m에 이르는 해안 산책로는 그렇게 제부리해수욕장까지 이어진다. 이등변삼각형 모양인 제부도의 서쪽해안인데, 원래는 사구였던 곳에 민박집과 식당이 들어서며 해수욕장이 됐다. 길이가 1.4㎞나 된다. 성긴 모래사장은 맨발로 걷기가 쉽지 않다.
여느 해수욕장처럼 아스팔트길로 구분된 식당가를 따라 걷다보면 남쪽 끝자락에 ‘해안사구(海岸砂丘)’라는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서 해변으로 눈을 돌리면 바위 봉우리 세 개가 뾰족하다.
매의 부리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진 ‘매바위’는 큰 바위가 신랑, 작은 바위가 각시, 그 앞의 바위가 하인이다. 신랑바위 옆에 비스듬히 난 굴을 ‘연인굴’이라 부르는데, 이곳 또한 커플들의 셀피 포인트 중 하나다.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이 일대가 굴 천국이 된다.
해수욕장을 지나 다시 길을 재촉하면 해수욕장 반대쪽 섬 길인 해안 드라이브코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와 맞닿아 차로 이동해도 좋은 길이다.
바닷길이 지루하다면 산을 탈 수도 있다. 해안산책로에서 제부리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길에 탑재산으로 오르는 양 갈래 길이 있는데, 산을 타고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섬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좋지만 야트막한 산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의 풍광은 직접 눈으로 확인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탑재산 망루에서 볼 수 있는 낙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걷기프로젝트 코스
제부선착장→해안산책로(1.1㎞)→제부리해수욕장(0.8㎞)→매바위(1.6㎞)→어촌체험마을(0.7㎞)→제부도 입구 안내센터(2.2㎞)→제부선착장→해안산책로→탑재산→제부선착장
제부도로 갈 수 있는 시간은?
제부도 진입로는 하루에 두 번 바닷물에 잠긴다. 통행이 가능한 시간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여행이 즐겁다. 시간표는 국립해양조사원, 화성시 홈페이지, 제부도 종합정보센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부도에는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회는 기본이고 사계절 모두 바지락이 나와 칼국수가 유명하다. 가을에는 대하구이, 겨울에는 조개·굴구이가 좋다. 가격은 결코 저렴하지 않지만 양은 꽤 많다. 식당에 따라 민박패키지도 있다. 저녁식사와 야식, 아침식사를 포함한 패키지에 민박까지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