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경매회사들은 경매를 하기 전에 출품작품들을 모아 1~2주 정도 보여주는 ‘프리뷰 전시’를 한다. 이 전시를 가보면 주요 작품 앞에 도록을 펼쳐놓고 같이 전시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 작품이 언제 어느 전시에 나왔었다는 ‘전시기록(Exhibition History)’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시기록이 있으면, 그 작품의 중요성을 높여주고 신뢰를 주는 데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경매회사에서 발간하는 경매도록에도 전시기록은 중요한 정보로 실린다. 경매도록에는 각 출품작의 작가, 작품제목, 재료, 제작연도 같은 기본정보와 필요에 따라 작품에 대한 설명이 실린다. 그런데 그 작품이 과거에 어떤 중요한 전시에 나온 적이 있었다면, 그 전시기록은 아주 값진 정보가 된다. 뉴욕과 런던에서 하는 메이저 경매에 나오는 작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전시기록이 붙어 있다.
국내에서도 중요한 작품이 경매에 나오면 전시기록을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 3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6억1000만원에 팔렸던 김환기의 유화 ‘섬’은 수화 김환기가 좋아했던 푸른색과 흰색이 주가 된 그림으로, 섬을 이루는 구릉과 산의 모습을 간결하게 표현해 추상화에 가깝게 그려진 1960년대 작품이다. 이 그림의 프리뷰 전시장에는 이 그림이 나왔던 과거 전시의 도록 두 권이 그림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환기미술관에서 했던 ‘김환기 20주년전’의 도록이 함께 전시되었고, 경매회사 측에서는 이 그림을 사전홍보할 때에도 ‘김환기 20주년전’에 나왔던 작품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어느 한 작가의 중요한 전시, 권위 있는 미술관에서 했던 전시에 나왔던 작품이면 그만큼 값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작품의 진위여부를 논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래서 경매회사에서는 유명 작가의 작품을 위탁 받으면 그 작품이 어떤 중요한 전시에 나왔던 작품인지 리서치부터 들어간다. 다시 말해, 위탁자 입장에서는 어떤 중요한 전시를 통해 작품을 산다면 도록, 리플릿 등을 챙겨서 그 증거를 남겨 놓는 것이 중요하다.
초고가에 비싸게 팔린 그림들을 보면 대부분 과거의 전시기록이 빵빵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반 고흐가 자신의 주치의를 그려 유명한 ‘가셰 의사의 초상’은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달러(약 907억원)에 팔려 당시로서 미술경매사상 최고 낙찰가 기록을 세웠었다. 이 그림이 비싼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경매 직전까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는 이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 몇 년간 세계 미술시장에 자주 등장해 초고가에 팔리는 그림 시리즈 중 하나가 피카소의 마리-테레즈 월터 초상화들이다. 2010년 이후 뉴욕의 메이저 경매에 1년에 한 점 꼴로 나와 적게는 4000만달러 정도, 많게는 1억달러 이상으로 비싸게 팔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들은 대부분 1932년 피카소가 파리와 취리히에서 연이어 했던 그의 첫 대규모 회고전에 나왔던 그림들이다. 마리-테레즈 월터는 피카소가 45세 때 만났던 28세 연하의 여인으로, 그녀를 그린 그림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인기가 좋다. 그런데 피카소가 마리-테레즈 월터를 열심히 그렸던 시기가 마침 그의 첫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던 1932년과 그 직전이다. 그래서 그 전시에 나왔던 마리-테레즈 월터 초상화들은 더 프리미엄을 갖는 것이다.
올 3월 열렸던 경매에서 김환기의 유화 ‘섬’이
6억1000만원에 낙찰되는 현장. <사진제공=서울옥션>
어떤 전시에 나왔었나가 중요
직접 전시되지 않았어도, 그 그림과 관련된 작품들이 유명 미술관의 중요한 기획전에 나왔다면 그 사실이 해당 작품의 가격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까지 개인거래와 경매를 통틀어 역사상 가장 비싸게 거래된 것으로 알려진 그림은 2011년에 카타르 국립미술관이 약 2억5000만달러에 산 것으로 알려진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다. 엠비리코스라는 그리스 선박왕이 가지고 있던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거래가 있기 직전인 2011년 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전시를 했다. 카드놀이를 소재로 그린 세잔의 그림들만 모아서 한 전시였다. 하지만 이 전시에는 엠비리코스가 소장한 바로 그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전시되지는 못했다. 엠비리코스가 원래 작품을 잘 빌려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잔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워낙 필요한 작품이기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이 그림의 이미지를 흑백사진으로 벽에 붙여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그림이 미술관에서 노출되었다. 어찌 보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도 손에 넣지 못한 그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적인 박물관이 아쉬워 흑백사진으로라도 보여줘야 했던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 전시는 성공을 거두었고, 이 전시가 얼마나 좋은 전시인지, 세잔의 일생에서 카드놀이 하는 농민들이 작품의 소재로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가 전 세계에 보도됐다. 그리고 얼마 뒤 엠비리코스가 오랫동안 소장했던 그 유명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최소 2억5000만달러(약 2750억원)의 가격에 카타르 국립미술관에 팔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비록 엠비리코스가 소장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직접 그 전시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만 모아서 기획전을 따로 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보여준다. 세잔이 1890년대에 카드 놀이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그린 것이 세잔의 작품세계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 전시가 입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흑백사진으로라도 그 전시에서 보여졌다는 것은 바로 엠비리코스가 소장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그 시대 세잔의 작품으로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지난 3월 열렸던 서울옥션 경매 프리뷰에서 천경자 작품과 그 작품이 전시됐던 도록을 함께 놓은 모습. 경매프리뷰에서는 전시기록을 보여주기 위해 주요작품과 그 작품이 실린 도록을 함께 전시하곤 한다. <사진제공=이규현>
도록 표지나 포스터에 실린 작품
미술관에서는 중요한 전시를 할 때 도록을 발간한다. 일반적으로 전시작품이 모두 도록에 실리지만, 때에 따라서는 전시작품이 다 실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럴 땐 당연히 도록에 실려 있는 작품일수록 가치가 높다. 미술관에서 중요한 작품일수록 도록에 빼놓지 않고 싣기 때문이다. 금상첨화로 그 도록의 표지에 실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전시 기획자 측은 물론, 작가 자신도 앞에 내세우고 싶을 만큼 좋은 작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계 현대미술시장의 블루칩 작가인 영국작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작품들은 피카소의 마리-테레즈 월터 초상화처럼 세계 미술경매 때마다 단골로 나와 고가에 팔리고 있다. 그의 비싼 그림들 역시 전시기록이 화려하다. 한 예로 베이컨의 ‘삼부작’(1976)은 2008년에 8630만달러에 팔려 당시로서 현대미술 경매사상 최고를 찍었던 작품인데, 그림이 완성된 다음해인 1977년 파리에서 했던 베이컨의 가장 중요한 갤러리 개인전의 도록 표지에 실렸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전시 이후 런던 테이트 미술관,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퐁피두 미술관 등에서 했던 베이컨 전시에 줄이어 나왔었다. 이 그림이 팔리고 4년 뒤에는 베이컨의 또 다른 그림 ‘거울에 비친 글 쓰는 형상’이 뉴욕에서 4480억달러에 팔려 또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앞서 말한 베이컨의 1977년 파리 개인전의 포스터에 나온 것이었다. 당시 이 그림을 경매했던 소더비 측은 도록에 그 포스터 사진을 실어서 이 사실을 강조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20세기 후반 영국 현대미술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화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화가가 전성기 때 파리에서 했던 중요한 개인전의 도록 표지에 나온 작품과 포스터에 나온 작품이 각각 경매에서 고가에 팔렸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매회사에서는 매달 경매를 할 때마다 도록을 발간하는데, 이 때 도록 표지에 싣는 작품 역시 그 경매의 하이라이트 작품이다. 그래서 표지에 들어간 작품은 더 신뢰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도록에 들어간 작품이 더 비싼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중에 그 작품이 다시 거래될 때엔 ‘언제 언제 도록표지에 실렸던 작품’이라는 프리미엄이 붙게 된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값을 더 치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을 수 있고 권위 있는 곳에서 한 전시, 믿을 수 있는 도록에 실린 작품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드물긴 하지만, 정체불명의 단체가 만든 거짓 도록에 위작을 실어서 전시기록을 조작하는 ‘사기’도 가끔 발생한다. 그러니 아무 전시에나 나왔고 아무 도록에나 있는 작품이라고 무조건 좋은 작품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