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1879~1953)의 교향곡 8번 1악장 아다지오. 저음의 콘트라베이스가 어둡고 무겁게 공포를 토해낸다. 바이올린은 가늘고 여린 울음을 길게 쏟아낸다. 오케스트라는 비통함을 속으로 삭히려 버둥거린다. 저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아픔을 묻으려고 하지만 허사다. 재앙의 위력은 점점 더 거세진다.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대기를 찢어놓을 듯하다.
1943년 여름 독소전쟁 중에 탄생한 이 곡은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의 공포가 절절히 느껴진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군은 병력 180만명을 투입해 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결사 항전하는 데다 혹독한 겨울 추위가 독일군을 수세로 몰았다. 1943년 11월에는 소련군이 대반격을 펼쳤고 결국 1945년 5월 독일군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소련이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도 불구하고 쇼스타코비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교향곡을 썼을까. 생명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는 전쟁 그 자체의 비극과 그의 솔직한 내면 풍경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혁명은 불행의 근원이었으나 작곡의 동기가 됐다. 그는 1946년 쓴 논문을 통해 가장 소중한 작품으로 교향곡 8번을 꼽았다. “내 음악에는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매우 흥미롭고 복잡하며 비극적인 양상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나는 귀청을 찢는 듯한 거대한 망치와 거기서 살고 있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묘사하고 싶었다. 그 불안과 고뇌, 용기, 환희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게다가 모든 진리의 움직임은 특별한 명료함과 드라마티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 ‘거대한 망치’는 소련 공산주의를 의미한다. 붉은색 옛 소련 국기에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혁명에 박차를 가하는 세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생을 긍정하는 낙관주의 예술만을 강요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도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애써 반골기질을 숨기려고 했다. 교향곡 8번을 발표할 때 “교향곡의 내용을 정확히 서술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곡의 바탕이 되는 사상은 ‘인생은 즐겁다’. 우울한 것들은 사라지고 이제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지고 있다.”
그것은 역설이었다. 실제는 비관적이고 무거운 선율이 가득했다. 결국 그의 속마음은 들통 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투쟁 의지를 결여했으며 사사로운 감정과 왜곡된 표현주의로 점철된 자기연민이자 고백”이라고 비난했으며 1956년까지 연주를 금지했다.
그를 공산당과 타협한 ‘기회주의자’로 보는 시선도 있다. 장대한 교향곡 7번 C장조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조국 전쟁에 동원된 곡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발표 당시 쇼스타코비치도 “이 곡은 전쟁의 시(詩)이며, 뿌리 깊은 민족정신의 찬가”라고 둘러댔다.
1941년 7월 말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기 직전의 상황을 지켜보고 쓴 이 작품은 승리를 기원한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웅장한 선율이 울려 퍼진다.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는 인민들의 사기 고양에 큰 도움을 주는 작품이라고 극찬한다. 여기에 발맞춰 쇼스타코비치는 이 교향곡을 레닌그라드시에 헌정했고 스탈린상까지 수상했다. 독일 히틀러의 공격에 맞선 교향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주장도 제기됐다. 옛 소련 음악학자 솔로몬 볼코프의 저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구상된 작품이다. 쇼스타코비치는 “7번을 작곡할 무렵에 나는 인간성에 대적하는 또 다른 적을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히틀러에 버금가는 스탈린의 포학한 정치에 희생된 수백만 명의 비운을 애도하며 만들었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야닉 네제 세갱이 지휘하는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첼리스트 장 기엔 케라스와 함께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사진제공=성남아트센터)
사회주의 희생양 된 쇼스타코비치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예술의 자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934년 엄청난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독재자 스탈린이 그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멕베스>를 보다 격분해 공연장을 뛰쳐나갔다. 권위적인 집안에서 고생하던 여인 카테리나가 하인과 불륜에 빠지고 이를 알게 된 시아버지와 남편을 살해하는 오페라다. 욕망을 쫓다 결국 목숨을 잃는 파국적인 내용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와 유사하다. 날카롭고 긴장된 리듬으로 인간의 밑바닥을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당시 큰 성공을 거둔 오페라다.
그러나 스탈린은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퇴폐적인 줄거리에 열을 받았다. 오페라에 나오는 살해 장면도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늘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스탈린은 그 장면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스탈린과 공산당의 눈 밖에 난 이 작품은 결국 오랫동안 상연이 금지된다. 전도유망하던 작곡가는 하루아침에 ‘인민의 적’이 됐다.
훗날 그는 “1936년 1월 28일 신문을 넘기다 ‘음악이 아니라 황당무계’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 한 구절을 내 가슴에 깊이 새겼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구절”이라고 회상했다. 그 충격으로 잠시 작곡 활동도 중단했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끝에 1937년 거장 므라빈스키(1903~1988)의 지휘로 교향곡 5번 ‘혁명’을 초연하며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거슬리지 않는 음악 어법을 사용해 명예회복에 나선 것. 마치 ‘그래, 너희들이 원하는 게 이런 거냐’식이다. 다행히 공산당은 이 작품에 호의적이었다. 덕분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로 임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