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들고 온 들국화 10일간의 콘서트
들국화의 올해 첫 공식 콘서트 <다시, 행진>이 4월 4일부터 14일까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인터파크 아트센터 아트홀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에선 첫 앨범에 수록된 명곡들은 물론이고 들국화만의 진정성이 담긴 7곡의 새 노래도 선보인다. 눌려 지내던 시대의 노래가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을 담았다는 점에서 이들의 새 노래가 주목된다. 전인권은 지난해 공연이 들국화의 건재함을 보여줬다면 올해 공연에선 다시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특히 들국화는 이번 콘서트에 ‘이 땅의 모든 들국화를 위하여,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행진하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담았다. 소설가 박민규는 이번 공연에 대해 “지금의 젊은 세대를 위해 노래해주기 바란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외롭고 힘든 길을 걷고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모든 젊음은 한 송이 들국화임을 나지막이 속삭여 주기 바란다”고 했다.
한편 들국화는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홍대 앞 인디 뮤지션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아티스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할 방침이다. 전인권은 “이번 공연이 끝나면 전국 투어를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소도시를 포함해 전국 32개 도시를 돌 계획이다”고 밝혔다.
2013 들국화 10일간의 콘서트 <다시, 행진>·일시 : 2013년 4월 4일~ 4월 14일, 10회 공연(평일 오후 8시, 토요일 7시, 일요일 6시, 4월 8일은 공연 없음)
·장소 : 인터파크 아트센터 아트홀
·예매 : ticket.interpark.com
·문의 : (02)334-719
록의 살아있는 전설 들국화가 다시 행진을 한다. “행진~ 행진~, 행진하는 거야”라는 노래로 격동의 8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이들은 아직도 열정이 넘쳤다. 음악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 열정과 사랑으로 지난해 젊음의 광장을 희열로 들뜨게 했던 멤버들이 올해는 서울을 필두로 전국을 달굴 계획이다. 식목일을 전후해 열흘간의 콘서트 행진을 준비하고 있는 들국화를 만나 그들의 에너지를 함께 나눴다.‘노래여 잠에서 깨라’ 등 7곡 발표
“진실이다.”
들국화의 리드 보컬 전인권이 말하는 관객과의 소통 비결이다.
14년 만에 재결성한 들국화는 그런 노래로 지난해 지산 록 페스티벌에서 젊은 팬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세대를 초월해 열광하는 팬들을 보고 전인권은 “음악은 테크닉이지만 진실이 바탕이 되면 우리도 좋고 관객도 좋아한다. 관객들은 우리의 공연을 보고 가면서 한 곡도 버릴 게 없다고 한다”고 밝혔다.
다음 달 공연에선 신곡을 대거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엔 신곡 7곡을 발표한다. 그래서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는 옛날처럼 눌린 감정은 없고…, 재미있게 신곡 발표회를 할 것이다.”
전인권은 지난해 공연 때만 해도 옛날 노래를 답습한다는 견해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옛 곡과 지금 곡의 분위기가 다르냐는 데 대해선 음악적인 답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다른지 모른다. 다만 지금의 우리를 표현할 뿐이다.”
이번에 내놓을 곡들이 궁금했다.
“우선 ‘노래여 잠에서 깨라’가 하나 있고, ‘걷고’도 있고…, 가사는 있는데 멜로디는 없는 것도 있고, 멜로디는 있는데 가사는 없는 것도 있다. 아, ‘사람답게’도 있고·….”
순간 아직 노래 제목을 정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왔다. 거기에 전인권도 동의했다.
“잠정적으로 정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고…. 우리 팀은 의견이 많은 팀이다. 이게 옳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들이 많다. 아 그러고 보니 ‘제 자리로’라는 곡도 있네.”
개성 강한 이들 절묘한 조화
들국화는 한때 의견 차이로 오랜 결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단다.
“누구나 자기 의견으로 산다. 우리도 사람인 이상 사람답게 우리의 의견을 제때 제때 전달하고 싶다.”
전인권의 설명이다. 그럼 “의견이 다를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주찬권이 답을 했다.
“회사도 있고 하니 합의점을 찾아서 서로 좋은 쪽으로 맞춰서 간다.” 그래서인지 “음악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록을 선택한 까닭은
많은 음악 장르 중에서 이들은 왜 록을 선택했을까. 전인권은 이 대목에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들었다.
“폭풍의 언덕을 보면 나쁜 놈이 왜 나쁘게 됐는지 알 수 있다. 나쁜 게 굉장히 매력있게 나오거든. 내가 록을 한 것도 그런 것 같다. 우린 너무나 오랫동안 건전한 것만 강요받다 보니 건전한 것에 식상한 게 있었다. 그런데 록을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어떻게 저런 음악이 나올 수 있나.”
그러면서 “록도 그냥 록이 아니다. 경량급이 아니고 헤비급이다”라고 했다.
좋아하는 외국 가수들을 묻자 전인권은 비틀즈나 존 레논 등을 좋아한다고 했다.
“비틀즈나 존 레논 모두 표현력이 대단했다.”
이 대목에서 주찬권이 한 수 거들었다.
“비틀즈는 다들 좋아했다.”
최성원도 “당시는 다들 비슷했다”고 덧붙였다.
록을 한마음으로 좋아하는 이들은 한때 사소한 갈등으로 14년을 떨어져 지냈다. 그만큼 개성과 자존심이 강한 이들이다. 결별한 동안 서로 왕래도 없었을 정도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만나지는 않았다. 본심은 서로를 좋아했는데도 그랬다.”
주찬권의 설명이다. 서로를 좋아했고 또 서로를 필요로 했지만 14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돌아서 온 것이다.
‘슈퍼세션’을 할 당시 만날 생각이 있었냐고 묻자 주찬권은 “슈퍼세션 하면서는 같이 모일 상황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모일 수 있게 된 “지금이 아주 좋다”고 했다.
결별했던 그들은 다시 만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큰 것은 없었다. 그저 밴드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들국화적인 것을 계속하고 싶었다. 들국화는 욕심이 많은 팀이다.” 그런 답을 한 전인권에게 들국화적인 게 무어냐고 물었다.
“동심과 같은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숲으로 치면 울창한 숲이다.”
이들의 록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열정은 재결성 후 가진 지난해 공연에서 그대로 살아났다. 관객들은 세대를 넘어서 록의 전설에 환호했다. 전인권은 아직 그때의 감격이 남은 듯 회상했다.
“대단했다. 젊은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다. 우리의 형태를 아주 좋아했다.”
그렇게 좋은데 어떻게 그토록 오래 떨어져 있었는지 궁금해 솔로 시절과 지금을 비교해 달라고 했다.
주찬권은 “솔로나 그룹이나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같이 모여서 하니 훨씬 파워가 있다”며 그룹을 재결성하기를 아주 잘했다고 했다.
전인권도 이 대목에선 그만큼 열심히 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진짜 열심히 살 것이다. 관객들은 시간과 돈을 내서 오지 않나.”
그런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정을 받쳐 음악을 하겠다는 얘기다.
다만 최근 취업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들국화의 공연이 위안을 줄 것이란 뭇 사람들의 기대에 대해선 전인권은 그런 의미는 부여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그들을 달래주고 그럴 생각은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느끼고 가면 된다. 누구나 의견은 있고 그것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가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전설이 된 이유
들국화가 록의 전설이란 소리를 듣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 궁금했다.
전인권은 젊었을 때 얘기를 꺼냈다.
“어느 날 패션쇼에서 부를 외국 노래 두 곡을 연습할 일이 생겼다. 시간이 없었다. 그때는 정말 하루 종일 연습했다. 그때 이후론 그렇게까지 많이 연습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소리 연습은 많이 했다. 창까지 했다.”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어떤 노래라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음악에 취해 살았다는 얘기다.
드럼을 하는 주찬권은 연습 얘기를 재미있게 풀었다. “드럼은 운동 삼아 하기에 좋은 악기다. 그게 좋다.”
덕분에 체력은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연습에 많은 시간을 내지 않았는데 앞으로는 많이 할 생각이라고 했다. 연습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 게 그의 드럼을 독보적 경지로 끌어올린 셈이다.
소문난 기타리스트인 최성원도 그 점에선 같았다. 그처럼 기타를 잘 치려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 다운 답을 했다.
“잘 치려면 좋아해야 한다. 좋아서 하는 것은 연습이 아니다. 그저 같이 노는 것이다.”
이들은 재결성 이후 합정동의 한 연습실을 빌려 연습을 했다. 전인권은 그러면서 숨은 애기를 털어놨다.
“소설가 박민규 씨가 주찬권이 연습실 찾는 걸 보고 가슴이 아팠다면서 자기가 소설을 써서 연습실을 마련해주고 싶다고 썼다. 그게 14년 만에 우리가 접한 현실이다. 그러나 실제 그 정도는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다. 곧 용인에 연습실을 마련해 거기서 연습할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전인권의 몸에도 세월의 무게가 쌓였다. 들국화 초기 47kg에 불과했던 그의 몸무게는 지금 85kg으로 늘었다. 그게 노래에도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 주찬권은 “노래가 중후해졌다”고 설명했다.
전인권은 나이는 먹었지만 음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나이와 고음은 상관이 없다. 정말 열심히 할 것이니 두고 봐라.”
노래 연습할 겸 노래방에도 가는지 궁금했다.
전인권은 “전혀”라고 했다.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기보다는 클래식 듣는 게 좋다고 했다. 그는 또 재즈는 좋아하지 않고 그 보다는 탄탄한 구성이 있는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외국 곡은 좋아할 뿐 아니라 때로는 카피도 한다고 했다. 노래하는 게 과제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좋은 노래를 만나는 기쁨에 설레기도 한다고 밝혔다. “좋은 책을 보면 설레지 않나.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룹 들국화와 멤버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등이 담긴 들국화의 첫 앨범은 1986년 9월 세상에 나오자마자 전곡이 히트를 치며 전설을 만들었다.
말랑말랑한 발라드와 트로트가 판치던 군사정권 시절 반항적인 가사와 절규하는 듯한 전인권의 노래는 팬들의 가슴을 울리며 한국 록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렇지만 전인권은 노래하면서 늘 눌려 지내야 했고 권력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들국화는 1983년 결성됐는데 1985년에 주찬권이 가세하며 힘을 받은 셈이다. 당시 멤버는 보컬 전인권, 베이스 최성원, 드럼 주찬권, 키보드 허성욱, 기타 조덕환 등이었다. 1집에서 대성공을 거뒀지만 이들은 2집에선 참담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게다가 음악적 견해차가 불거지면서 서로의 길을 걸었다. 이후 97년에 허성욱이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활동을 재개했지만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사실 멤버들의 이력만 보면 들국화 결성 자체가 기적과도 같다. 출신이 다른 그들이 만났기 때문이다.
서울 토박이인 전인권은 고등학교 중퇴 후 나중에 검정고시에 합격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79년 모던 포크 팝 그룹 ‘따로 또 같이’의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로 데뷔했고 같은 해 개인 음반을 발표하며 솔로로 나서기도 했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의 아들 최성원은 휘문고를 거쳐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3인 가수 참여 프로젝트 앨범 <이영재, 이승희, 최성원>에 참여해 솔로 가수로 데뷔했고 84년엔 <우리노래전시회> 프로젝트 앨범에도 참여했다.
드러머인 주찬권은 어려서부터 음악과 함께 살았다고 했다.
“나는 5살 때부터 음악을 했다. 음악 밖에 몰랐다. 나는 음악하고만 살았다. 집에서 음악하는 것을 반대해 음악하려고 집을 나왔다. 15살 때였다. 음악하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주찬권은 잠시 혼자서 음악 활동을 하다가 1982년 이환규 최효남 등과 만나 그룹 ‘믿음 소망 사랑’을 결성했다. 한국의 비틀즈를 꿈꾼 그룹 치고는 이름이 건전했다. 주찬권은 “멤버 중에 교회 다니는 친구가 이름을 제시했는데 괜찮은 것 같아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들이 어떻게 만났을까.
“인연이 있었다. 억지로는 안되고, 만날 사람끼리 만났다”는 전인권의 답변이 먼저 돌아왔다.
최성원도 록을 하는데 집안의 반대는 없었다고 했다.
“반대는 없었다. 음악이 좋았다. 어려서부터 좋아했다. 대학 때는 취미로 했다.”
주찬권은 한때 한국 록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신중현과 활동을 했는데 이것이 들국화와 연결고리가 됐다.
“1982년에 신 선생님이 킹레코드에서 ‘믿음 소망 사랑’의 1집 음반을 낼 수 있도록 소개해 줬다. 그래서 신중현과 세 나그네에 들어가게 됐다.”
거기서 들국화와 인연을 맺게 됐다고 주찬권을 설명했다.
“신중현 선생님은 그때 이태원서 라이브 전용 극장 록 월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도 거기서 공연했고 들국화도 거기서 공연을 했다. 그래서 만나게 됐다.
마침 들국화가 음반을 취입하게 됐는데 드러머가 없어서 내가 드럼을 쳐줬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합쳐지게 됐다.”
세 사람은 결별 후 각기 음악 활동을 했지만 두드러진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전인권은 88년에 영국 가수 앨 스튜어트의 곡을 번안한 ‘사랑한 후에’를 내며 솔로로 활동하다 자신의 밴드 ‘가야’를 이끌기도 했다. 영화 <몽중인>이나 <안녕! UFO> 등에도 출연했다.
최성원도 88년에 개인 음반 ‘제주도의 푸른 밤’을 내며 솔로로 활동했고 청주 주성대학의 실용음악학과 강사로 후배들을 지도하다 제주도에 자리를 잡았다. 최성원은 요즘도 제주도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찬권은 2000년대 후반 슈퍼세션 멤버로 활동했다.
서로 최고로 인정하는 그들
그들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먼저 전인권이 입을 열었다.
“당시 기타 잘 치기로 유명한 김양일이가 드럼의 최고라고 해서 찬권이를 봤는데 아무리 멀리서 봐도 확 드러나는 친구였다. 그렇게 보기가 좋았다. 성원이는 꿈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봐도, 멀리서 봐도 확 띄었다. 음악도 굉장했고 외모도 굉장했다. 귀티의 끝을 보여줬다.”
주찬권도 이 대목에서 “옛날엔 성원이가 어린왕자였다”고 거들었다.
전인권에 대해 최성원은 “인권이는 음악에 아주 열심인 친구다. 인생의 95%가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전인권은 자신의 어두웠던 시절 얘기로 받아넘겼다.
“아니다. 내 인생의 95%는 마약과 그림이었다. (마약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당시 그 환상은 내가 쫓아갈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깨고 보니 잡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쨌든 대마초가 그의 음악에 도움을 주었는지가 궁금했다.
“당시 음악적인 취향에 맞았다. 내 감성에 맞은 것 같다. 요즘 와서 보니 내 나름대로 환상이 있었다. 그것이 내 음악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러나 전인권은 절대로 마약을 해선 안 된다며 신신당부했다.
그가 대마초에 빠진 게 어두웠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어서였을까. 그는 늘 눌려서 노래했다고 했다. 당국의 제재를 많이 받았기에 당시엔 맑은 정신으로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열여덟 살부터 그랬으니…, 박통시대엔 무얼 할지 몰랐다. 장발이라고 머리 자르고 그것도 그냥 자르는 게 아니라 때리며 자르기도 했다. 그래서 옛 곡은 자유롭지 못했다. 이장희와 김민기만 겨우 조금 탈출했고 나머지는 건전가요만 했다.”
“요즘에야 맑은 정신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전인권은 그래서 “새 곡은 나름대로 자유롭게 나올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때 주찬권이 “인권이가 이제 할아버지가 됐다”고 소개했다.
그러자 전인권은 “인생이 바빠졌다. 손녀가 나와서 챙길 게 많아졌다. 손녀가 섹시한 음악만 찾으면 큰일 아닌가. 그만큼 바빠졌지.”
그러면서 “과거의 그 모든 게 고맙다”고 했다. 살아오면서 거친 모든 것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 그는 특히 감옥서 인내력과 신중함을 배웠다고 했다.
“감옥서 시간을 마음대로 쓰다간 그곳이 곧 지옥이다”고 하는 그는 그 덕분에 신중하게 인내하면서 시간을 잘 보내야 함을 배웠다고 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신의 길을 따라오지는 말라고 했다.
서유리의 가창력 인정
들국화는 재결성 후 토크쇼 <놀러와>에 출연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방송 이후 무지 많은 전화를 받았다. 사랑과 평화 등 밴드들의 전화가 특히 많았다. 아주 좋아하더라. 오랜만에 제대로 하니 경의를 표하는 것 같더라. 너무 고마웠다.”
전인권의 설명이다.
후배 중에 그들의 음악을 이해하는 이들이 있을까.
“어느 친구가 ‘제주도 푸른 밤’을 하는데 굉장하더라고. 다만 너무 변형시켜서 처음엔 이상했어. 외국에선 편곡을 하더라도 마디를 변형하지는 않는데, 그들은 기본은 존중하지. 그런데 요즘은 너무 달라졌어. 그리고 보이스 키즈에서 서유리가 ‘사랑일 뿐이야’를 불렀는데 대단했다.”
이처럼 좋게 보는 가수도 있으나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각자 음악하면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래서 친근하게 가기는 어렵다. 누구나 잘 어울리지는 못하다.”
다만 최근 보여주는 가수들 가운데 진짜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데 대해 전인권은 인터넷이 그런 점에선 순기능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음악하는 사람과 미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제는 사기와 예술이 확실히 구별된다. 인터넷 때문에 (진짜가)아닌 것은 가차 없이 드러난다. 거기서 검증된 게 맞다.”
그러면서 방송이 음악성 있는 가수들에게 문을 더 열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중에게)안 보이는 가수들이 엄청 많다. 그런 사람들이 빛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설에 섹스 소설도 있지만 헤밍웨이도 있지 않는가.”
TV에서 보여주는 가수들 위주로 가지 말고 음악성 있는 가수들에게 기회를 주라는 얘기다.
그는 특히 경제가 발전한 만큼 이제 문화도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장희 씨에게 들은 얘기인데, 정주영 씨가 영국서 회의 할 때 거북선을 갖고 가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에게 그만한 유산이 있었기에 수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좋은 문화유산을 더 키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