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작곡가 브루크너(1824~1896)의 마지막 교향곡 9번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진다. 그 과정은 험난하다. 먼저 1악장에서 비장하고 어두운 관현악 선율이 서서히 몰려온다. 거친 불협화음이 애잔한 선율로 바뀌었다가 다시 광폭하게 몰아친다.
2악장에서 야만적인 팀파니와 날카로운 현악은 운명의 최후로 몰아세운다. 마치 속세의 죄를 묻는 심판의 목소리 같다. 그러나 3악장에서는 모든 혼돈이 끝나고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다. 저 멀리 하늘에서 햇빛이 장엄하게 비추는 것 같다. 인간이 꿈꾸는 궁극, 피안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그리고는 숨이 멎듯이 조용하게 음악이 사라진다. 브루크너는 꼬박 10년을 바쳤지만 마지막 4악장을 쓰지 못한 채 숨졌다. 마치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것을 상징하듯.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이 곡을 마무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결국 3악장에서 멈춰 버렸다.
평생 수도원과 성당에서 독신으로 살아
대부분 삶이 그러하듯 그의 일생도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았다. 충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세상의 인정을 받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하루 7시간 예배를 드리고 신을 위해 음악을 써내려갔으나 매번 차가운 비판과 비웃음에 직면했다.
린츠 대성당 돔의 전속 오르가니스트였던 그는 27세에야 작곡을 시작했다. 16세의 어린 소녀에게 첫눈에 반해 소품을 작곡해 바쳤으나 거절당했다.
1868년 44세에 비로서 교향곡 1번을 발표했으나 청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1877년 교향곡 3번 ‘바그너’를 공개했을 때도 수모를 겪었다.
오스트리아 빈의 콧대 높은 관객들은 시골에서 올라온 무명의 작곡가에게 귀를 열어주지 않았다. 연주가 끝났지만 객석은 썰렁했고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사실 이 곡이 연주되는 것도 힘들었다. 1873년 완성됐지만 연주해주겠다는 오케스트라가 없었다. 브루크너는 친구이자 지휘자인 헤르베크를 통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계속 접촉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1년 후에야 기회가 왔으나 빈 필하모닉 단원들이 연습 중에 “이 곡은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며 포기해버렸다. 그의 교향곡은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지루하고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3년 후 간신히 빈 필의 동의를 얻어 그가 직접 지휘했는데 청중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결국 20여명만 남았다. 굴욕의 순간에 정적을 깨뜨리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작곡가 말러(1860~1911)였다. 당시 18세의 음악 청년이었던 말러는 미친 듯이 기립박수를 치며 브루크너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그리고 이 교향곡을 피아노 연탄곡(한 대의 피아노에서 두 사람이 연주)으로 편곡하고 악보를 출판했다. 그는 평생 동안 ‘브루크너 음악의 전도사’를 자청하며 주요 작품들을 연주했다. 사재까지 털어 브루크너의 악보 인쇄를 지원했다.
염세주의로 가득 찬 말러는 브루크너의 숭고한 음악세계를 동경했다. 말러의 제자 브루노 발터는 “말러는 신을 찾기 위해 계속 방황한 반면 브루크너는 이미 찾았다. 브루크너는 평생 신앙인으로 살았고, 그의 음악에는 신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비록 말러의 찬사를 받았지만 당시 이 곡은 실패작으로 평가받았다. 바그너(1813~1883)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창조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바그너의 음악극 <발퀴레>와 만난 것 같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 곡은 기존 교향곡의 틀을 깨는 혁신적 선율이면서도 신과 자연을 섬기는 소박한 인간을 담은 수작으로 재평가 받는다. 연주시간이 65분을 기록해 당시로서는 가장 길었다. 바그너를 존경한 브루크너는 그의 흔적을 교향곡 곳곳에 심어놓았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발퀴레>를 연상시키는 악상이 종종 나타난다. 이 작품에 ‘깊이 존경하는 거장 바그너 선생님께’라는 헌정사까지 붙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바그너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빈 음악계는 브람스와 한슬리크가 주축이 된 보수주의 음악가들과 바그너와 리스트가 이끄는 진보주의 음악가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59세에야 교향곡 7번으로 인정받아
1881년 브루크너는 꿈속에서 친구가 들려주는 휘파람 소리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 선율이 자네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걸세”라는 친구의 말에 번쩍 잠에서 깬다. 이후 곧바로 난로를 켜고 작곡에 돌입했다. 꿈에서 얻은 영감으로 제1악장 주제 선율을 만든 작품이 바로 교향곡 7번. 천국을 향한 기도처럼 엄숙하고 경건하다.
2년에 걸쳐 완성한 이 곡은 친구의 예언처럼 브루크너에게 큰 성공을 가져다줬다.
27세에 늦깎이 작곡을 시작한 브루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인정받았다. 그는 이 곡에 신을 향한 경배와 작곡가 바그너에 대한 존경을 담아냈다.
이 작품의 제2악장에는 임종을 앞둔 바그너를 위한 장송 행진곡이 녹아 있다. 1863년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 반한 브루크너에게 바그너는 우상이었다. 그는 바그너를 닮기 위해 애썼으며 1873년 빈 아카데미 바그너협회에 가입했다.
브루크너는 제2악장에서 바그너가 만든 악기 ‘바그너 튜바’ 4대의 장엄한 선율을 통해 바그너를 떠나보낸다. 바그너 튜바란 혼과 튜바 특징을 혼합한 금관악기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악당을 표현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아주 느리고 무거운 이 선율은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고뇌하는 장면에 흐르기도 했다.
중저음 악기인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호른 소리로 심연을 향해 내려가던 2악장은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으로 끝난다. 호른이 마지막 소리를 하늘을 올려 보내며 차분하게 마무리한다. 평생 바그너를 따랐던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무한선율을 모방하려고 했다. 무한선율이란 리듬과 화성이 끊어지는 느낌 없이 자유롭게 흘러가는 형식. 오페라에서 하나의 아리아가 끝나도 극 진행이 중단되지 않게 하려고 사용됐다.
그러나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관능적인 반면 브루크너의 선율은 순수했다. 두 사람의 개성과 예술관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야심만만한 바그너는 화려한 오페라극장에서 소나기 같은 박수를 받았지만 브루크너는 오스트리아 린츠 대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경건하게 살았다.
교향곡 7번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브루크너는 8번에서 재능을 꽃피운다. 완성된 교향곡 중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불멸의 걸작으로 호평 받았다. 1892년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빈에서 초연됐으며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헌정됐다. ‘묵시적’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 곡은 현악기의 트레몰로(특정한 음을 빠르고 규칙적으로 반복)로 시작된다. 낮고 비극적인 선율이 반복되다가 밝고 서정적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내 강렬하고 불길한 하강 음형이 등장한다. 마치 죽음을 예고하는 것 같다.
3악장 아다지오의 첫 번째 주제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포르테곡인 ‘방랑자 환상곡’에서 따왔으며 장엄하고 풍부하다. 4악장은 힘차게 시작된다. 팀파니로 승리와 환희를 두드려대며 장엄한 행진곡이 계속된다.
가난이 신에게로 이끌어
신을 위해 작곡한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대곡이자 난곡이다. 너무 숭고하고 심오해 어지간한 오케스트라는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다. 브루크너의 음악이 다소 느리고 지루한 것은 경건한 신앙심 때문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선율에는 신이 머물고 있다. 천천히 움직이되 거대하게 상승하는 교향곡은 마치 하늘을 향해 치솟은 고딕 양식의 성당 같다.
독신을 고집했던 브루크너는 탐욕을 깨끗이 버리고 하늘에 닿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는 왜 그렇게 신에게 헌신했을까.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소년가장이 된 그를 받아준 곳이 성당이었기 때문이다.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마을 무도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런데 브루크너는 왜 미사나 레퀴엠, 오라토리오 등 교회 음악이 아니라 교향곡에 하느님의 뜻을 담았을까. 37세에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관현악법까지 배웠다. 그리고는 연주 시간이 60분 넘는 장대한 교향곡을 차곡차곡 써내려갔다. 신의 장엄한 뜻을 담기 위해 좀 더 규모가 큰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베토벤과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브루크너는 교향곡의 형식을 빌려 한 차원 더 높은 교회 음악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듣고 나면 성경책을 읽은 느낌이 든다. 참으로 거룩한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