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먹어야 산다. 근대 영양학의 여러 연구 이전에도 사람은 어쨌든 먹어야 산다는 걸 알았다. 엘리어트는 <황무지>라는 시에서 세상사란 결국 탄생과 섹스, 죽음으로 이루어진 허망한 골조임을 탄식했는데, 거기에 한 가지 사족이 붙는다면 역시 ‘먹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먹기 위해, 먹이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누군가에게 판다. 시간의 소멸은 결국은 죽음에 다다르는 명료한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죽기 위해 먹는 셈이니 이 얼마나 먹는 일의 엄중함인지 모르겠다.
봄이 너무 짧아졌다고 탄식하게 된다. 기후변화를 걱정하기도 한다. 사실은 모르겠지만 오래전에도 봄은 짧았나보다. “봄밤 한 시간 값이 천금이니”라고 송대의 대문장가 소식(蘇軾)이 일렀던 걸 보면 말이다.
소식의 봄밤이 가고 여름이다. 등목, 밤하늘, 모기향, 모기장 같은 여름의 상징들을 이제는 거의 잊고 산다. 고도로 편리해진 지금 당대의 한국의 삶에서 나는 종종 잊었던 것들을 떠올린다. 나는 수제비만 보면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시골 평상에서 먹던 수제비, 옆에서 타고 있던 모깃불 냄새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수제비 맛은 연기의 맛이었다고 기억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오이야말로 가장 여름다운 음식 같다. 오이에서는 차가운 우물 맛이 나니까 말이다.
오이는 성질이 차다. 한국 사람들은 오이를 볶아 먹는 경우가 드물다. 오이는 차갑게 먹는 음식이다. 얼음물을 부은 오이지는 물론이고, 고명으로 쓸 때도 차가운 물국수나 냉면이 제격이다. 자장면에 올라가는 오이는 좀 달라 보이지만, 결국 그것도 매한가지다. 덥고 기름진 자장면의 무거운 맛을 차게 식혀주는 노릇을 하던 게 채 썬 오이였으니까. 차갑게 해둔 오이는 버석, 깨물기만 해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가. 내 친구는 무슨 까닭인지 목이 마르면 차가운 물보다도 오이 한 개를 먹는 걸 좋아한다. 같이 등산을 갈 때도 물은 없어도 배낭에 오이를 담아온다. 정상에서 그는 오이를 베어 문다. 행복한 소년 같은 표정이다. 허기도 가시고 몸에 수분도 공급한다. 이온음료처럼 빠르게 몸에 흡수되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더 좋은 게 오이다. 물을 마시다 체하는 답답한 꼴을 면하게 해준다.
초여름이면 청계산 등산에 별난 재미가 있다. 오이를 사먹는 맛이다. 산기슭에서 오이며 가지 등속을 기르는 농민이 여럿 있다. 오이 맛이 각별한데, 나는 그게 등산 뒤의 갈증 때문인 줄만 알았다. 알고 보니 오이를 오이답게 기르는 까닭이었다. 오이가 반달처럼 휘어져 있고 굵기도 가늘어서 볼품이 없다. 질소비료도 안 주고 무농약으로 기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오이는 고소하고 조직이 아삭아삭하다. 굵은 호박 같은 오이를 보면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물만 줘도 잘 자라는 오이라는데, 비료를 안 주고 몸집을 불리지 않아야 아삭하다는데’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젠 얻어먹기가 어려워졌지만, 여름이면 어머니는 국수를 삶았다.석유풍로(곤로라고도 불렀다)와 찬장 하나 달랑 있던 서울 변두리 빈민의 부엌은 여름이면 찜통이 됐다. 거기서 뭐라도 삶으면 집안이 찜솥처럼 후끈해졌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살림을 길에 내놓고 뭘 끓인다는 건 어머니의 자존심에 허락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간결한 음식으로 상을 보시려고 했는데, 그럴 때 국수가 제격이었다. 물을 끓여 딱 3~4분을 삶으면 대여섯 식구의 한 끼가 해결되었으니까. 어머니는 내게 국수 심부름을 시켰다. 신문지나 시멘트 포대 용지에 대충 둘둘 말린 동네 국수를 샀다. 하얀 1등급 곰표가 아니라 독수리표나 사자표 2등급 밀가루로 만드는…. 거무튀튀하고 부드러운 맛은 없었지만 뭐래도 좋았다. 국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국수를 삶아 공동 펌프로 말갛게 헹구었다. 함지에 국수를 넣고 녹말물이 빨리 빠지라고 재빨리 휘저어 헹구던 어머니의 손동작이 기억난다. 김치를 솜씨 있게 버무리거나 할 때처럼 그 손길이 아주 전문가다웠고, 기계처럼 반복되는 일관성이 있었다. 오직 손끝에 붙은 무의식의 동작이었을 것이다. 두어 번을 헹구어 맑은 물이 나오면 국수는 탄력있게 소쿠리에 무리지어 둥지를 틀었다. 그걸 그릇에 사리를 쥐어 담고 어머니는 미리 끓여서 식혀둔 장국을 부었다. 참, 그 국수가 방안에 있던 우리에게 완성의 신호를 보내는 건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였다. 통, 통, 통. 정확한 간격의 나무 도마의 울림은 이제 곧 국수가 내 입에 들어올 거라는 예고였다. 형제들이 어떻게 국수를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겠다. 오직 나는 내 앞에 놓인 국수 그릇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국수를 빨아들이는 제각기의 물리적 마찰음만 가득했다. 침묵의 방안에서 공명하는 인간의 입술만이 일으키는 독보적 소음은 내 귀에 아직도 생생하다. 후르륵, 후르륵. 나는 어린 아기가 어느 날 국수를 빨아들이는 본능을 선보일 때 감동한다. 아아, 우리는 그렇게 다음 세대에 국수 빨아들이는 법을 전수하고 이제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국수 위에 어머니가 수북하게 담아준 오이채. 간혹 달걀을 삶으면 반 개 쯤은 국수 속에 숨겨 주던 어머니의 지독한 아들 편애. 그리고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감히 어머니에게 따지지 못하고 내 국수 그릇이 왜 더 불룩한지 흘끔거리던 누이들의 시선. 그런 아스라한 장면들이 입체영화처럼 눈앞에 너무도 생생해서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여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