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 있던 어느 날 오후, 펄펄 끓는 물이 들어있는 커피포트를 잘못 내려놓는 바람에 거실의 카펫을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에 탄 자국을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열정적인 시간을 떠올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
누구의 사랑이야기일까. 이제 막 첫사랑에 빠진 소녀, 아니면 결혼을 앞둔 처녀.
아니다. ‘불에 탄 자국’ 같은 이 사랑은 중년의 터널을 이미 한참 지나간 프랑스의 유명 여성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아니 에르노의 사랑이야기다. 그녀는 어느 날 남자 A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살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로 시작하는 소설 '단순한 열정'(문학동네)을 발표한다. 아들의 연인을 사랑하게 된 50대 정치가의 이야기로 1990년대 초 화제가 됐던 루이 말 감독의 영화 '데미지' 마지막 장면에는 사랑의 속성을 그대로 정리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린 제레미 아이언스가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시장바구니를 든 채 허름한 자취방으로 돌아온다. 그의 방에는 그를 찾아와 모든 걸 앗아간 여인의 슬라이드가 걸려 있다. 그 슬라이드 앞에서 초로의 남자는 독백한다. 모든 문장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사랑은 어느 날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와 모든 걸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가 떠나 버리는.” 사랑이 위대한 건 폭발적으로 다가와서 모든 것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나이가 많든 적든, 계층이 높든 낮든 사랑은 사람들의 가슴 한복판을 뚫고 지나쳐 간다. 어떻게 보면 무자비하고 어떻게 보면 평등하다.
이 소설은 프랑스 문단에 파란을 몰고 왔다고 한다. 난 이 파란이 과장이었다고 자신한다. 사랑에 관한 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존경받는 한 지식인이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나눈 불륜을 소재로 한 고백소설을 발표했다고 해서 진정 프랑스 문단이 들썩였다면 믿기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란 사회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다.
어쨌든 이 소설의 백미는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묘사다. 솔직함을 넘어서 잘 그린 세밀화를 만나는 것 같다. 이런 식이다.
사랑에 빠진 다음 클래식을 좋아하는 대학교수였던 그녀가 유행가를 좋아하게 되고, 지하철역에 멍하니 서서 그 사람 생각을 하다 전철을 몇 번이나 놓치고, 그 남자가 고작 5분 정도 눈길을 줄 구두와 스타킹을 새로 사게 됐다.
이런 구절도 눈에 띈다.
“박물관에서도 사랑을 표현한 작품만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나체상에 마음이 끌렸다. 그것들을 보며 A의 몸을 떠올렸다.”
사랑에 빠진 한 여자. 사실 여기서 그 여자의 나이나 직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랑의 보편성 안에선 아무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니 에르노 자신도 그 사실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는 “나의 신혼시절 위에, 잠자는 아기의 편안한 얼굴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자유여”라는 구절로 유명한 시 '자유'를 쓴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평생 동안 3번 크게 변신한다. 그 변신의 정점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새로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 시세계가 바뀌었던 것이다. 당연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窓)을 하나 만나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 역시 새로운 창을 만났다. 그녀는 우선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과 고통과 우정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사랑에 빠지면서 일 없이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나, 오후시간에 은밀히 외간남자를 만나거나 통속소설에 빠져 있는 여자들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삶의 보편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남자와 헤어진 후 아니 에르노는 그 남자를 만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 입고 그와 함께 걸었던 파리의 뒷골목을 걷는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 두 달 후 용기를 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 사랑의 열정은 소설의 제목처럼 단순하다. 그래서 아름답고 위대하다.
라이트닝 P38을 타고 떠난 어린왕자
사춘기 시절 뜻도 모른 채 열심히 주고받았던 책선물이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다. 긴 망토에 어깨에 별을 단 엉뚱하고 귀여운 왕자 그림과 ‘B612호 혹성’ 같은 상상력을 건드리는 신화적인 단어들이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로맨틱한 몽상가였던 생텍쥐페리는 사랑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는 당신을 잘 알아요. 당신의 갈망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강해서 당신이 떠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아요. 당신은 전쟁터에서 자신이 깨끗해지기를 바라죠.”
생텍쥐페리가 전쟁터로 떠나는 날 그의 부인인 콩쉬엘로 드 생텍쥐페리는 그를 보내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얼마 후인 1944년 7월31일 정찰임무를 띠고 이 어린왕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비행기 라이트닝 P38에 몸을 싣는다. “나를 잃지 마세요. 당신을 잃어서도 안 돼요”라는 콩쉬엘로의 기원이 적힌 사진을 가슴에 안고 어린왕자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국내에 출간된 책 '장미의 기억'(창해 펴냄)은 생텍쥐페리의 부인인 콩쉬엘로가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회고록이다. 남미 엘살바도르 출신인 콩쉬엘로는 1930년 아르헨티나에서 프랑스 출신 비행기 조종사이자 작가인 생텍쥐페리를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어린왕자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별을 좋아하고 비행기를 좋아하는 생텍쥐페리의 방랑벽으로 인해 그녀가 생텍쥐페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생텍쥐페리의 그늘에서 그녀는 늘 외롭고 우울했다. 콩쉬엘로는 마치 행성들 사이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이 남자를 어느 누구도 붙잡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 심정을 콩쉬엘로는 책에다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신과 함께 있을 수도 없으면서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니.” 콩쉬엘로를 평생 괴롭힌 건 바로 이 사랑의 딜레마였다. 그녀는 책에서 작가의 아내로 사는 것을 하나의 성직(聖職)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이 책은 신비에 싸여있는 생텍쥐페리의 삶에 관한 기록이자 한 여인의 절실하면서도 뜨거운 사랑이 담긴 고백록이다. 소행성 사이를 부유(浮遊)했을 한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한 특별한 여자. 그들의 사랑이 빛나는 건 슬픔과 함께 남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