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시칠리아에서 모시던 셰프가 한국에 왔다. 그와 초청 만찬 준비를 하느라 노량진에 들러서 장을 보는데 병어가 보였다. 그는 처음 보는 고기였다. 무슨 맛이냐고 물었다. 설명할 적당한 낱말을 찾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으음…구름 맛이야.”
셰프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처럼 스르륵 녹는 맛이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틀린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지금 내게 누군가 병어의 맛을 물어보면 ‘솜사탕 맛’이라고 대답하겠다. 정말 병어는 달다. 병어 살은 입에 넣으면 그대로 녹는다. 거친 바다 속에서 그렇게 살이 부드러워서 어떻게 풍파를 이기는지 모르겠다.
6월은 남해의 참숭어가 저물고 남서해의 병어철이다. 몇몇 지방에서는 작은 축제도 한다. 그러나 병어는 사철 맛있다. 누구는 한겨울의 병어 맛을 잊지 못한다. 발이 시린 포장마차에 앉아 병어에 쌈장을 얹어 먹는 맛이란!
병어가 물 관리가 어려운 서울의 포장마차에서도 꿋꿋하게 팔리는 건 그 독특한 성질 때문이다. 병어는 살이 잘 무르지 않고 오래 간다. 등 푸른 생선이 아니니 쉬이 상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살짝 얼리거나 냉동고에 넣어둔 후 해동해도 썩 맛이 괜찮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다 맛있다. 그렇지만 깻잎보다 작은 병어는 그만 잡았으면 좋겠다. 요새 어획이 잘 안되는지 수산시장에 가면 새끼병어가 ‘세꼬시’감으로 팔린다. 맛은 좋겠지만 남겨진 바다는 나중에 뭐가 되나 싶다.
소설가 한창훈의 병어 이야기는 가슴을 치는 맛이 있다. 그는 병어야말로 ‘맨 처음으로 돌아오는 맛’이라고 말한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궁금한 분은 그의 수필집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어보면 된다. 한 번 잡으면 단숨에 독파해버리는 마력이 있는 책이다. 수필 속의 사연은 지인의 개인적인 사연과 병어를 엮은 것인데 가만 되새겨보면 병어는 정말 맨 처음으로 돌아올 것 같은 맛이다. 맛의 근원, 생선의 보드라운 살, 씹으면 새록새록 나오는 진한 맛…. 맛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병어는 떼로 다닌다고 해서 兵魚다. 누구는 떡처럼 넓적하다고 餠魚라고 한다. 신안 비금도는 병어잡이의 최전선이다. 이맘 때 북상하는 병어 떼의 길목을 지키고 서서 산란을 위해 한껏 살을 올린 병어를 잡아 올린다. 이 동네에서 어부가 떡판처럼 커다란 병어를 잡아 차곡차곡 상자에 개켜 넣는 걸 보면 마치 손 빠른 사서(司書) 선생 같다. 두툼하고 알찬 책을 가지런히 책장에 꽂아 넣는 장면이 연상돼서 나도 모르게 흐뭇해진다. 책처럼 병어도 속에 뭘 가득 채워 넣고 있을 것이다.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간 후배가 얼마 전에 내 식당에 들렀다. 마침 새벽장에서 싱싱하다 못해 은박지 같은 피부를 가진 병어를 사왔길래 서양식으로 쪄서 줬다. 녀석아, 올해는 장가를 가렴. 남에게 자랑 같은 건 할 줄 모르고 싫어도 그만, 좋아도 그만인 숫보기에게 사랑이 들라고 다디단 병어를 쪘다. 양념을 하고 토마토소스를 얹어 종이에 싼 후 오븐에 푹 쪘다. 종이 안에서 뿜어져 나가지 못한 병어의 맛이 그대로 살 속으로 파고들길 빌었다.
“형, 그 친구가 병어 맛이 기막혔대요. 고마워요.”
한창훈의 병어 이야기에 나온 그 지인과는 다른 결말을 가져오렴. 그러고 보면 한창훈의 병어는 슬픈 병어였다.
병어는 먹는 법이 좀 있다. 뼈가 연해서 어지간한 크기면 뼈째 썰어서 먹어도 좋다. 이빨에 병어 한 점을 넣으면 살은 사악 녹고 뼈가 남는 듯 하다가 이내 사각사각 씹힌다. 달고 고소한 맛이 우러나온다. 누구는 뼈 속의 골수 맛이 느껴진다는데,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고소하기가 혀뿌리에 오래 남아서 한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음미하고픈 맛이기는 하다. 병어는 특이하게도 뜨거운 밥과 함께 먹는다.
밥을 한 술 뜨고 된장 양념을 묻힌 병어회를 올려서 함께 씹는 것이다. 차갑게 회를 먹는 시속에 비추면 엉뚱한 맛일 것 같으나 이게 궁합이 대단히 좋다. 뜨거운 밥에 차가운 병어의 살이 눅진하게 녹아드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생선조림은 대개 무로 하지만 병어는 감자가 으뜸이다. 양념 잘 먹을 파삭한 감자를 잘 깔고 병어와 대파, 다진 마늘, 간장에다가 매운 고춧가루를 얹어 찐 병어조림은 정신을 아뜩하게 만든다. 병어구이는 또 어떤가. 된장을 살살 발라 연탄불에 구워 놓으면 노랗게 반짝이는 껍질이 바삭하고 입에 녹는다. 구운 병어는 특히 두툼한 살보다 얇은 뱃살 쪽이 진미다. 잔가시 따위는 무시하고 그냥 씹으면 얇아서 깊게 든 된장 양념에서 감칠맛이 뿜는다. 무를 넣고 국을 끓여도 맛있다. 달고 시원한 국물이 속을 부드럽게 위로해준다.
오염 때문인지 고기의 회유 경로가 바뀐 것인지 몇 해 전부터 병어가 덜 잡혀서 비싸다. 올해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시장에서 손바닥만 한 병어 서너 마리에 1만원이면 살 수 있다. 회를 치든 굽든 당신의 병어를 드시라. 초여름, 뜨거운 밥을 해서 병어 살과 마늘을 척척 걸쳐서 한 입 가득 퍼 넣어 보시라. 초여름 높은 하늘, 구름 흘러간다. 솜사탕 같은 구름 한 점 떴다.
Matching Wine 산타 헬레나 레세르바 소비뇽 블랑 (Santa Helena Reserva Sauvignon Blanc)
산타 헬레나는 칠레 프리미엄 와인 브랜드로 칠레의 테루아와 품종의 개성이 잘 조화시키는 와인으로 유명하다. 루아르의 소비뇽 블랑이 칠레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궁금한 사람에게 권하는 와인이다.
문의 레뱅드매일(02-2127-9877)
[박찬일 / 라꼼마 셰프 chanilpark@naver.com│사진 = 정기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