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던 9월을 보내고 만난,
유난히 사람이 그립고 그리운 10월. 만연한 가을, 그 한 자락을 부여잡고 있다. 사람이 그립지만 홀로 있는 것 또한 어색하지 않은 가을에 가장 좋은 친구는 독서와 레드 와인 한잔이다. 조용한 일요일 오후,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한 손엔 책을 또 한 손엔 와인 잔을 들고 책을 읽다보면 잔에서 피어오르는 와인의 향이 더해져 책의 향기가 더욱 진해질 것만 같다.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릴케는 가을을 통해 인간의 고독에 대한 성찰을 시도했다. 하지만 성찰에는 가을의 해가 뜨고, 들에 바람이 불며, 과일이 익고 그리고 짙은 포도주의 향이 스친다.
릴케의 시에서도 볼 수 있듯 가을은 포도가 수확되어 와인으로 탄생되는 때다. 알알이 보랏빛으로 꽉 여문 포도송이들은 가을 단풍을 닮은 붉은빛의 와인으로 태어난다. 하늘도 청명하게 높고 바람도 선선한 낭만적인 계절적 분위기가 붉은 컬러의 와인을 더욱 찾게 해 사계절 중 단연 ‘와인의 계절’이라 부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독 가을이면 그윽함과 분위기를 가진 계절적 탓에 여름 내 즐겼던 화이트 와인과 헤어져 레드 와인을 찾게 된다. 이러한 이유를 전문가들은 ‘기온’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레드 와인은 섭씨 18도 정도에서 마시면 가장 맛있는데 가을의 기온이 비슷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라는….
사실 가을이면 레드 와인을 마시고 싶다는 마음이 들겠지만 오히려 꼭 마셔야할 이유도 있다. 길게 느껴졌던 여름을 넘기느라 지친 몸에 와인은 원기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건강해지고 있다는 위안으로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는 데도 효과가 있다. 이는 파스퇴르의 말로도 설득의 힘을 얻는다. 파스퇴르는 “포도주는 모든 술 가운데서 건강에 가장 유익한 술이다”고 했다. 이렇듯 계절적 요소로 인해 레드 와인에 가을은 완벽한 마리아주를 이루는 셈이다. 곁들여 먹는 안주가 없어도 가을이라는 분위기와 한 손에 들린 책만으로도 충분히 레드 와인을 즐길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셈이다.
가을에 독서와 함께 즐길 와인 리스트
유독 가을을 떠올리게 하는 레드 와인이 있다. 낙엽, 흙, 진한 버섯, 감초 등 와인에 담겨있는 향으로 가을을 더욱 가을답게 만드는 레드 와인이다. 이 고독한 와인의 향은 장기 숙성된 올드 빈티지나 오크 숙성을 통해 타닌 감을 끌어올린 와인이나 품종에 따라 숙성돼 생겨난 부케를 통해 가을의 청취가 와인 보틀에 담긴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주품종인 피노누아는 섬세하고 가녀린 그 성품부터가 가을을 닮았다. 와인 메이커에 따라 다양한 향을 담는 와인이 피노누아로부터 비롯되면 버섯 향부터 낙엽 향까지 복합적인 가을의 아로마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향을 담은 와인 중에서 ‘알베르비쇼 부르고뉴 피노누아’는 가벼운 미감에 섬세한 피노누아의 특징을 잘 담아냈다.
토양의 향이나 나무 향이 물씬 풍기는 레드 와인은 어떨까. 대표적인 ‘샤토 라 플러 드 부아’는 프랑스 보르도의 라랑드 드 뽀므롤이라는 곳에서 생산되는 와인이다. 이 와인의 복합미는 토양에서 마련된다. 자갈 아래 점토층이 있는 포토밭에서 강건하면서도 복합미 있는 메를로가 생산되는 것이다.
정제와 여과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음으로써 와인 본연의 성질을 그대로 보존시키는 것도 이곳만의 독특한 양조법이다. 와인의 풍미를 그대로 지키면서 18~24개월간 오크통 숙성을 통해 타닌 감이 강한 ‘라 플러 드 부와’가 탄생된다.
칠레의 프리미엄 와인 ‘1865 리미티드 에디션’도 무게감 있는 중후한 타닌에 나무 향과 커피 향이 도도하게 피어나는 와인이다. 이러한 가을의 향들이 과일 향과 어우러지면서 복합적인 아로마를 선사한다.
건조된 포도로 양조하는 이탈리아 고급와인 ‘아마로네’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로네는 이탈리아의 3대 명품 와인 중 하나. 수확 후 포도를 말리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선반에 펼쳐 놓고 이듬해 1~2월까지 건조시킨다. 이렇게 건조된 포도에서 농축된 당분을 모두 알코올로 변환시킨 와인이 바로 아마로네다. 때문에 드라이하고 파워풀한 미감에 알코올 도수는 높은 와인이 탄생된다. 그 중 ‘토마시 아마로네’는 토마시의 플래그십 와인이자 가장 유명한 아마로네 와인 중 하나다.
와인이 말을 건네다 황지미 소믈리에 그리고 깔베 쌩떼밀리옹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블랜딩의 미학과 함께 프랑스 와인의 진정한 가치는 프랑스 농부의 땀과 노력, 열정에 있다. 마치 부모님이 자식을 돌보듯 포도 알갱이 하나하나가 잘 영글 수 있도록 애정을 쏟고 오크통에서의 숙성기간을 거쳐 탄생되는 프랑스 와인에는 장인정신이 묻어난다. 프랑스 유학 시절 수많은 샤또를 방문해 프랑스인들의 와인에 대한 열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와인 제조에도 참여하면서 프랑스 와인에 대한 애착이 커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와인은 프랑스 와인의 자존심인 보르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깔베 쌩떼밀리옹’이다. 1818년 설립 이래 깔베는 깔베만의 독특한 저온 발효와 블랜딩, 매년 7000여 개의 샘플 와인 중 단지 5% 만을 선택해 생산하는 엄격함과 전문 와인 메이커들의 노력으로 ‘로고만을 보고도 선택할 수 있는 브랜드’라는 신뢰성을 얻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본 바 있다. 특히 ‘깔베 쌩떼밀리옹’은 농부들이 손으로 직접 수확한 좋은 포도만을 선별해 사용하고 새로운 프렌치 오크통에서 12개월간의 숙성기간을 거쳐 생산돼 메를로의 부드러움이 풍성하게 느껴지는 단 한 모금도 허투로 마실 수 없는 와인이다. 루비 컬러가 아름다운 이 와인은 고소한 아몬드와 매혹적인 장미 향이 풍성한 아로마를 형성한다. 또한 마신 후에도 만족스러운 여운이 오랫동안 지속돼 천천히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와인이다. -소믈리에 황지미, 2010 한국 소믈리에 대회 1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