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 이름이 왜 발왕산인줄 알아?”
아빠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린 딸이 걸음을 멈춘다.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받치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오른발 앞꿈치를 까닥이는 품이 영락없는 명탐정 코난이다.
“그건 이름에 힌트가 있는 거지? 왕이면 왕이 태어난 곳인가?”
함께 데크 길을 걷던 한 무리의 어르신이 박수로 명탐정의 결론을 응원한다. 우쭐했는지 턱 끝이 하늘로 솟은 아이가 질문에 쐐기를 박았다.
“그런데 왕이 왜 여기에 살아. 성에서 태어나야 멋있는데….”
강원도 평창군에 자리한 발왕산에 올랐다. 해발 1458m, 우리나라에서 12번째로 높은 산이다. 가쁜 숨이 연상되는 높이지만 왕복 7.4㎞의 발왕산 케이블카(대인왕복 2만 5000원)를 이용하면 단 18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코스다. 산책은 정상에 오른 뒤 시작된다. 3.2㎞의 나무 데크길로 조성된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약 1시간 반 동안 수많은 주목들을 만날 수 있다. 저 멀리 동해 바다까지 어우러진 쉼표 가득한 길이다.
천년주목숲길에 닿기 위해선 ‘빨리빨리’란 단어를 잠시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 가을, 겨울시즌의 발왕산은 단풍 명소이자 스키 성지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10월 말에서 11월은 단풍을 즐기려는 관광객이 물밀듯이 들이닥친다. 적어도 1시간 이상 줄 서 기다려야 케이블카 승강장에 들어설 수 있다. 타려는 이들이 많으니 8명이 탈 수 있는 케이블카도 인원을 꽉 채워 출발한다. 팬데믹 이후 일행만 따로 탈 수 있던 나름의 배려가 이 시기엔 통하지 않는다.
꽤 오랜 시간 오르는 케이블카는 국내 최대 길이를 자랑한다. 두어 번 고개를 넘어가는데, 정방향으로 앉아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산 뒤로 동해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공활한 가을 하늘은 볕이 따갑다. 하지만 바람은 서늘해 두툼한 겉옷이 필수다. 케이블카에서 하차한 후 꼭 들러야 할 곳은 발왕산과 평창군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스카이워크. 발왕산에 오른 이라면 한번 들르는 필수 코스인데, 그만큼 빼어난 경치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인생컷을 즐길 수 있는 포토존은 덤이다.
케이블카 승·하차장과 스카이워크가 연결된 건물에는 다양한 식음료가 마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자리했다. 물론 깨끗한 화장실이 있는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카페테라스에서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짙은 녹음과 단풍을 즐기는 것도 여유로운 풍경이지만 가을을 제대로 즐기려면 뒤편에 자리한 천년주목숲길을 걸어야 한다. 나무 데크로 마무리돼 휠체어로도 이동할 수 있을 만큼 가지런한 길이다. 그래서인지 어린 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3대가 함께 걷는 이들도 꽤 눈에 띈다.
곳곳에 이정표와 표지판이 있어 이색적인 주목과 산의 이력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산 이름이 왜 발왕산이냐? 과거 8명의 왕이 날 기운이 있다고 해 ‘팔왕산’이라 불렸던 이 산은 ‘왕이 발현하는 산’이란 뜻을 가진 발왕산이란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을과 겨울의 풍경이 유독 아름다워 TV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도깨비’ ‘겨울연가’ 등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숲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주목 중 모양새가 특이한 나무의 해설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어미와 자식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마유목’이나 속이 비어 있어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고해주목’, 서울대 정문을 닮은 ‘서울대나무’, 줄기의 모양이 8자로 꼬인 ‘8자 주목’, 아버지의 우람한 풍채를 닮은 ‘아버지왕주목’ 등 걷는 내내 다양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숲길 마지막 코스는 산에서 솟은 샘물로 목을 축일 수 있는 ‘발왕수’. 4곳에서 물이 흐르는데, 각각 재물, 장수, 지혜, 사랑이란 문구가 있어 색다른 재미가 있다.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0호 (2024년 11월) 기사입니다]